소설리스트

색련-75화 (75/111)

#75

왕조오는 수행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무장을 나서다 고개를 설레 저었다.

“신통의 위세가 하늘을 덮었구나.”

벽해의 황제 은종은 술과 여인을 잘 다루며 호탕한 성정이었다. 백면서생이라기보다 무장의 풍모에 가까웠고, 황자 시절 삼 년간 예국을 유학한 경험으로 예 황제와도 막역했다. 황태자에 책봉되고 나서는 노쇠한 선황제를 대신해 정무를 보면서도 모든 공을 화소 태후에게 돌렸으니, 어머니를 향한 효심도 사뭇 지극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역시 태후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지.’

화소 태후는 대대로 벽해의 황후를 배출해 낸 정통 가문의 수뇌였다. 그 아들인 은종 또한 천한 피가 섞이지 않은 유일무이의 적통이었다. 그런데 엄격한 태후 밑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던 은종이 딱 한 번 어머니의 명을 어긴 일이 있었으니, 당시 은종의 파격적인 반항은 비단 정통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같은 종교를 섬기는 예국에까지 파장이 미쳤다. 나라 안팎으로 반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은종이 화소 태후의 바람대로 정통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았더라면 이 같은 몰락은 겪지 않았을 것을.’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사내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잡스러운 피를 황후로 봉했다. 그녀가 지금의 옥명 황후였다. 먼 옛날부터 신통은 정통에 종속된 노비 가문이었는데, 주제도 모르고 권력을 탐하여 윗선을 유혹하는 행작이 요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노비 가문이라는 굴레를 벗자마자 줄줄이 후궁 자리를 꿰차 성총을 흐린 것은 물론이요, 종국에는 주인 가문인 정통을 몰아내고 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세상에 그토록 천박하고도 막되어 먹은 족속들이 또 있으려는가?

왕조오는 벽해라는 이국의 정서와 풍경을 좋아했다. 이 산과 옥토와 바다를 두루 갖춘 크고 아름다운 나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타국의 칙사에게 언제나 극진했고 수도의 풍류도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했다. 그들의 문화는 본디 예의와 학문을 중시하는 예국과는 적이 달라 선구적이고 자유분방하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스르는 것은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며,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였을 땐 시시비비 막론하고 마냥 두들겨 패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헌데 전하께서 노주 구별은 못 할 망정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패륜을 자행하려 하십니까?’

왕조오는 그때 아직 황태자였던 은종에게 술병을 기울이며 한탄을 가장한 직주를 올렸다. 정녕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왕조오가 아는 은종은 단순하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해서 더욱 명쾌한 사내였거늘.

‘그 이야기는 더 논하기 싫소.’

어리석은 사랑이란 그토록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체통 없이 입아귀를 비죽배죽하고는, 휙 돌아서 박석을 걷던 은종의 너른 등이 여전히 두 눈에 아삼아삼하였다.

“왕 공, 금성의 향선이 뵙길 청하옵니다.”

“향선이라고?”

왕조오가 막 사신관에 당도하였을 때, 넓은 정원 한가운데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눈썰미와 기억력이 탁월한 왕조오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리고 몇 시진 전 향선 명부를 읊을 때 단에 나섰던 향선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향선 나함, 왕대인을 뵙습니다.”

‘나함’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왕조오는 멈칫했다. 불교의 수행 단계인 사향사과(四向四果)의 단계를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가문은 벽해의 정통 가문뿐이었기 때문이다.

‘태후의 사람이로군.’

왕조오는 날카롭게 파악을 마쳤다.

“원주 미함은 함께 들지 않은 것이냐?”

너의 존재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듯, 자신의 배다른 형님인 미함을 들먹이는 왕조오의 노련함에 나함은 내심 놀랐으나, 티 내지 않고 공손히 대답했다.

“신, 초량 공주와 규종 공의 차남 나함이라 합니다. 태후 마마의 뜻을 받자와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존전에 들었습니다.”

초량은 화소 태후의 여동생이며, 규종 공은 총재 회의를 주관하는 명재상이었다. 화소 태후가 삼십여 년 전 규종과의 사이에서 미함을 낳았으니 이 자는 미함의 이복 아우가 된다. 화소 태후의 힘이 사해에 뻗칠 때 그 정부인 규종도 최고 관직에 올라 나라 안팎을 행호령했다. 허나 지금은 신통의 위세에 밀려 자리만 겨우 지키는 형세에 불과했다.

왕조오는 잠시 나함을 응시하였다. 유난히 짙은 눈썹과 눈두덩이 붙어 날카롭고 진한 인상이었다. 눈꼬리와 관자놀이가 가무잡잡하고, 코가 유난히 크고 쌍꺼풀 없는 두 눈은 날카롭고 부리부리했다. 얼마간 상을 볼 줄 아는 왕조오는 나함에게 열넷의 내자와 서른 명이 넘는 자식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하고 머리 회전이 좋고 남모를 탐심이 가득한 사내리라 짐작했다.

“태후 마마께서 은밀히 대인과의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허허, 내전의 태후께서 타국의 장수와 밀담을 원하신다…?”

말꼬리를 붙들린 나함은 당황스러워 입을 다물었다. 부러 뜻을 알면서도 저리 모르는 척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겹구나.’

사실 왕조오는 다 귀찮았다. 벽해를 흠모하던 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고, 신통이 득세하고 갈수록 분별력을 잃는 벽해에 얼마간 정이 떨어져 버렸다. 게다가 소싯적 영화를 놓지 못하는 호호백발 뒷방 늙은이와의 독대라니.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왕조오는 욕심 많은 여인네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어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내 조만간 용전에 들어 폐하를 알현할 요량이니, 뜻이 있거든 직접 거둥하시라 일러라.”

수북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끝에 헛기침을 섞어 넣은 왕조오는 그대로 나함을 지나쳐 본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

낌새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빙충이리라.

정통 향선들은 본디도 대놓고 헐뜯거나 시비를 붙이는 족속이 아니었다. 항상 그 자리에 없는 사람만을 골라서, 나름대로는 합당한 명분을 붙여 격조 있게 욕설 없이 그에 관한 담화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장본인이 나타나면 입을 싹 다물고 군기침으로 마무리를 둔다는 식이었다. 와중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는 자도 더러 있다. 딴청을 피우거나 괜히 접선을 부쳐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자도 있다. 그러면서도 당사자의 눈치는 또 엄청 살펴서, 시도 때도 없이 눈이 마주치는데도 불구하고 아닌 척 안 본 척 데구루루 눈알을 굴려 시선을 피하는 모양까지 아주 틀에 대고 찍어 낸 듯 똑 맞아떨어졌다.

‘……이것들 봐라?’

홍의는 오묘하게 입아귀를 비틀며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런 때야말로 굴신은 독이 된다. 오히려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 수 있는 담력과 기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암상과 독선, 평소 함께 밥을 나누어 먹고 학문을 돕던 동지들의 사막스러운 돌변. 이유야 빤하니 괜한 낱셈으로 쓸데없는 품 들이지 말지어다. 저토록 헤픈 반응이야말로 여태껏 누구 하나 홍의를 진정한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는 방증인 셈이니.

나약한 존재, 한심한 존재, 도와주어야 마땅할 불쌍한 하층 귀족 나부랭이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넘어선다면 누구라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향선 홍의는 그들에게 있어 동정의 대상이었을 뿐, 따르며 올려다볼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이미 합당한 명분마저 있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는 게야. 미함 공은 참 사람 보는 눈도 없으시지. 오 년간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배신을 때려?’

‘애초에 저런 본 데 없는 놈에게 향선의 위를 내려 준 것부터가 모반이었지. 칠별관 문성이 제 특기인 아첨과 화술로 재상들에게 사바사바하여 꽂아 준 자리라 하니,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부자가 아닌가.’

‘일국의 향선으로서 동지들을 배반하고 색을 팔아 재물을 꾀하다니, 참으로 인두겁을 쓴 짐승이 따로 없군. 나라가 대체 어찌 되려는지!’

나라 타령 나오는 순간 이미 볼 장 다 본 것이다. 앞에서는 조가비처럼 굳건히 잠겨 있던 입들이, 뒤에서는 갓 낚아 올린 아귀처럼 알아서들 쩍쩍 벌어지곤 한다. 홍의는 사뭇 위악적인 헛웃음을 뿌리며 정통 향선들을 똑바로 견주어 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홍의를 향해 있지만 사실 진짜 분노하는 대상은 따로 있음이 자명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적이자 원수인 신통을 대신하여 만만하고 약한 홍의를 희생물로 삼고 경멸의 살을 쏘아 대는 것이다. 그처럼 치졸하고 배릿한 먹이사슬의 이치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꺼내든 알량한 자기 변호가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까지 스스로를 몬 것도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다. 항변의 여지도 의지도 없이, 홍의가 택한 길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하루아침에 가엾은 돌림쟁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쩝. 괜히 입맛을 다시다 휘하의 무동들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이미 저희들끼리 추렴을 마치고 간만에 부드레한 고기 안주에 포도주 부어 마시느라 주군이 조리돌림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허 참. 거 참.”

결국 다향원 이곳저곳을 홀로 서성이던 홍의는 한숨과 함께 뒷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뒤뜰은 잔치 음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시비들과 해어화들, 병사들과 내관들이 일손을 합쳐 찰밥을 찌고 전을 지지고 탕을 끓이고 누룩을 빚고 엿을 고느라 훈김이 마를 새가 없었다. 괜히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홍의는 짭조름한 육전 몇 개 집어먹고 홀짝술도 몇 잔 얻어 마셨다. 그러자 기분이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내 음식을 얻어먹었으니 품앗이를 해야겠군.”

시비들이 기함을 하며 말렸지만 아랑곳 않고 힘쓰는 일을 달라며 나섰다. 땔나무 장작을 패고, 닭털을 뽑고, 절구에 찹쌀을 빻았다. 본디 내치락들이치락 하는 잡생각을 몰아내려면 그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최고였다. 숨 가쁜 노동에 시달린 맑은 이마에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이고, 홍의 님, 그것 그리 잘게 빻으시면 안 돼요!”

“응?”

가루가 아니라 죽을 만들 기세로 돌절구 속의 보리를 빻고 있던 홍의가 공이질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앳된 시비가 사색이 되어서는 맷돌로 갈아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머쓱한 홍의가 아, 그래? 읊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다음 순간, 독한 사향내를 풍기는 나래 같은 소맷자락이 시비의 허리를 풀썩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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