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나, 나함 님!”
양순한 시비가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행주치마를 움켜쥐었다. 향선의 정복이 아니라 나들잇벌을 차려입은 나함은 지긋한 눈길로 품 안의 시비를 바라보면서, 입은 홍의를 향해 열었다.
“기왕에 연회를 즐기려거든 방외색이나 탐할 일이지, 예서 청승맞게 무얼 하는가?”
시비는 거의 작은 짐승처럼 몸을 옹송그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와락 인상을 찡그린 홍의가 잠자코 지켜보다 나함의 덜미를 붙들어 슬슬 잡아끌었다. 그리고 시비를 향하여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예까지 어인 일인가?”
팔짱을 끼우고 시큰둥하게 묻자, 나함은 저 멀리 달아나는 시비의 뒤태를 아련히 응시하다가 그제야 홍의를 돌아보았다.
“일단 그 공이부터 내려놓게. 거 괜히 싸돌아다니면서 향선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짓 좀 그만하라고. 아랫것들 버릇 나빠지니까.”
“똥 싸는 소리 하네.”
매번 자신의 집안일 외에는 관심도 없었던 나함이 요즘 들어 유독 어쭙잖은 떠세에 재수 없는 오지랖을 부린다. 게다가 지체 높은 정통 향선인 나함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슬슬 눈치를 보는 것이다. 괜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해진 홍의는 얼른 말려 올라간 소맷부리를 내리고 대충 석계에 걸터앉았다. 나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나가던 시비를 불러 세워 조촐하게 술상까지 보게 했다. 홍의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태자궁으로 아주 처소를 옮겼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타락에 비할 바 없이 뽀얗고 고소한 동동주를 사발에 가득 부어 한 번에 쭉 들이켠 나함이 석계에 한쪽 다리를 얹고는 접선을 슬렁슬렁 부쳤다.
“하여 지금 다향원에서 무슨 내기가 오가는 줄 아나?”
“뭔 내기.”
“과연, 누가 깔리는 쪽인가!”
“…….”
“일전에 전하께 대물이 어쩌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홍의가 그쪽 같다고 내 살짝 언질을 둔 상태지. 내 휘하의 무동들이 돈 잃는 건 싫었거든.”
“…자네 지금 죽여 달라고 염불 외우나?”
차라리 다른 정통 향선들처럼 무시를 하거나 비웃을 일이지, 이리 면전까지 찾아와 불난 집 앞에서 부채춤을 추듯 구는 나함이 어째 더 짜증스러웠다. 홍의는 끓어오르는 열불을 식히려 동동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턱을 닦아 허공에 휙 털어 냈다.
“결론이 뭔가?”
“그만두게.”
나함은 묵묵히 정면을 보며 읊조렸다.
“색신인지 지랄인지 집어치우고, 한시바삐 다향원으로 돌아와 자네의 자리를 되찾으라는 말이네.”
홍의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나함은 사뭇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미 신통과 척지고 태자비의 된시앗을 자처한 상태임을 내 건너 들어 알고 있네. 이 와중에 정통마저 자네에게 등을 돌린다면, 그때는 정녕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되겠지. 내 일말의 사심 없이 자네가 걱정되어 하는 말이니 겉귀로 듣지 말고.”
“…….”
“지나고 보면 그게 다 썩은 떡고물이라. 결국은 얹히고, 탈 나지. 자네는 본래 이러한 부조리를 누구보다 경멸하지 않았던가? 정녕 스스로를 잃은 채 한갓 색신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인가? 물론 나는 그러한 것들을 언제나 목격해 왔어. 처음에는 고향에 두고 온 정인이 있다며 닭고집을 부리던 해어화들도 채찍과 당근에 거듭 휘둘리다 보면 점차 순종적인 충복으로 변절하더군.”
나함의 말이 날 선 칼처럼 천천히 가슴팍에 박혀 드는 듯했다. 홍의는 여태껏 남들이 무어라 말해도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라고, 절대 타인의 말을 향하여 애써 벼른 줏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옥죄어 왔다. 하나, 홍의도 사람이었다. 양쪽 귀로 세차게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이러이러한 경시와 저러저러한 훈시에, 결국은 단단했던 판단력이 흐물흐물 물러지고 말았다. 특히 가시 같은 타인의 시선들이 살갗을 파고들 때면 대뜸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전하 또한 이런 기분이셨을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굴길에 갇힌 기분.
홍의는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한껏 뜨겁게 얼굴을 쓸어 내고 보는 손바닥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였다. 자신은 고작 하루 만에 이토록 혼란스럽고 갖은 상념이 물미는데, 스무 해가 넘도록 꼬박 이리 살았을 그를 생각하니 명치가 꼬집히는 듯 아려 왔다.
“…자네가 내게 이러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군.”
홍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물끄러미 나함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기에 앞서 기분이 상당히 나빠. 자네의 이복 형님이자 우리의 주군이신 미함 공도 내게 이런 월권을 행사치 않는다네.”
“…….”
“지난번 여도지죄의 고사를 들먹이며 나를 겁준 것도 그렇고, 말은 어연번듯하지만 결국은 자네 또한 남모를 셈속이 있기에 이리하는 게 아닌가?”
그 질문에 나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이상 같잖은 충고로 내 심사를 어지럽히지 말아 주게. 내 상황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대로 신통에게 칼을 맞고 정통에게 버림받는다고 한들, 나는 이 선택을 번복할 생각이 없네.”
싸늘히 말을 마친 홍의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함도 더는 붙드는 말 없이 그저 물끄러미 보기만 하였다. 바삐 교차하는 인파를 어렵사리 헤치며 뜰을 나서는, 나름 아끼고 귀히 여기던 오랜 벗의 고집스런 뒤태에 대고 나함은 짧게 혀를 끌밖에 도리가 없었다.
“…되도 않는 오기나 부리고 말이야.”
나함은 앓는 소리를 내며 벌러덩 드러누워 한량처럼 손을 겹쳐 뒤통수를 베었다. 밤하늘을 가리는 땔나무 연기를 가늠하다 후욱, 입김으로 불어 없앴다. 한 치 앞도 못 보게 만드는 이물이란 것은 이렇듯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허나 세상 그 무엇도 사랑만큼이나 유해하게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요물은 없는 듯했다.
***
“전하께서는 사냥을 잘하는 법을 아십니까?”
물소 뿔로 만든 각궁은 가볍고 단단하여 말을 달리며 쏘기에도 크게 힘들지 않고 맞춤하였다.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 위에 반들거리는 아청빛으로 채색을 하고 새코 머리를 가죽으로 감싸서 세 가지 색의 천으로 덧발라 낸 그것은 생김생김이 활치고는 무척 고운 편이었다. 태자는 감상하듯 시위 고리를 내려다보며 만지작대다가 면사 쓴 얼굴을 들었다.
“글쎄요.”
숲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린 물비린내와 은은한 풋내가 산그늘 아래 차갑게 식은 공기와 뒤섞여 면사를 뚫고 민낯을 어루더듬는 듯했다. 찬비를 맞고 물이 통통히 오른 나무들과 골짝이 미어져라 만개한 보랏빛 얼레지 군락이 아름다웠다. 태자는 숲속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사람 드문 숲속이 편안했다.
“범이 발톱을 감췄다 내는 이유는 정중동 속에 몸을 사리기 위함이지요. 그처럼 완벽한 고요의 속임수에 넘어간 먹잇감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함을 만끽하다가 단숨에 목덜미를 깨물립니다. 그리하여 곧 죽어도 말 많은 놈은 절대 노련한 어부나 엽렵한 사냥꾼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게지요.”
태자는 수풀 속에 고개를 쳐든 고라니를 향해 시위를 겨누었다.
“제가 보기에 태자께서는 사냥꾼의 기질을 타고났습니다.”
왕조오는 면사를 쓴 채로도 들짐승 날짐승 가리지 않고 명중시키는 태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묻는 것에만 답하고 시답잖은 질문은 애초에 하지 않는 언중한 성격에 무인의 기질까지 갖추었으니, 그야말로 타고난 황제의 재목감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자 또한 병석에 누운 황제를 대신하여 그 벗인 왕조오를 사뭇 극진하게 대하였고, 왕조오도 자신이 사신관에 머무는 동안 서로 잦은 왕래가 있기를 청했다.
사냥을 마치고 산을 내리는 길에는, 돌치가 발을 절었다. 험한 협곡을 뛰느라 제 몸을 돌보지 못한 탓이었다. 태자는 궁에 당도하자마자 시비들과 내의들도 물리고 정원에 주저앉아 아껴 기르는 짐승의 발을 살피기에 열중했다. 무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라 옥지가 옆에서 쩔쩔매었다.
볼록하게 굳은살이 박인 다섯 개의 발바닥을 살피고, 다리를 잇는 뼈 마디마디를 꼭꼭 눌러보고, 발바닥 사이를 한껏 벌려 안쪽의 여린 살까지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뼈는 무사하였고, 뒷발 깊숙한 곳에 아까 헤치고 다닌 덤불의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시가 뽑혀 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진 돌치가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태자의 주변을 뛰어다녔다. 뱀처럼 긴 꼬리가 휘익휘익 태자의 몸을 치고 지났다. 지켜보던 모두가 감탄하며 흔흔히 웃었다. 특히 왕조오가 가시 하나 뽑은 것 가지고 살신성인의 자태라느니 추켜올리는 모습이 살짝 가관이었는데, 그는 기어이 태자와 겸상을 하고 싶어 태자궁까지 쫓아 들어온 참이었다.
“소장이 특별히 태자 전하께 드릴 선물이 있사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국의 병사들이 청록색 쓰개에 덮인 예쁘장한 꽃가마 하나를 모셔 왔다. 모 없이 둥글게 다듬은 아기자기한 가마는 품이 아주 작은 것이 삼척동자 한둘이나 들어가 앉을 법한 크기였다. 미리 검수를 마쳐 안에 든 것을 앞서 확인한 옥지의 입가가 씰긋씰긋 자꾸만 올라갔다. 태자가 의아하여 바라보았다.
일단 검둥개들을 물리고, 왕조오가 친히 가마에 덮인 쓰개를 내리고 문을 올려 받쳤다. 동시에 새하얀 솜뭉치 두어 개가 데구루루 굴러 나와 모두의 시선을 앗아 버렸다. 강아지였다. 갓 두어 달은 되었을까. 천성이 대담하고 장난기가 넘치는 녀석들은 누가 부르기도 전에 당차게 뛰어나와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에 자신의 냄새를 묻히느라 바빴다.
“아이고, 저 발발한 것들 좀 보게! 어쩜 저리 조그마하고 귀여울꼬?”
“에그머니, 벌써 제집이구나! 제집이야!”
궁 사람 모두가 정원으로 달려 나와 박장대소를 하며 구경하였다. 태자가 슬그머니 쓰개를 젖히어 아직 가마 구석에 돌돌하게 웅크리고 있는 두엇을 발견하고 손수 배를 받치어 꺼내었다. 아직은 바깥세상이 두렵고 설어 잘게 떨리는 몸뚱어리가 새털처럼 푹신하고 야들야들했다. 너스르르 뒤덮인 새하얀 털과 통통하고 잘생긴 주둥이는 얼핏 늑대 새끼의 외양과 비슷했다. 면사 안쪽에서 강아지를 유심히 살피던 태자가 살짝 놀라 읊조렸다.
“…푸른 눈이군요.”
“하하, 서역 어드메에 있다는 새하얀 눈의 벌판에서 달리는 늑대개입니다. 전하께서 개를 몹시 좋아하고 아끼신다기에 소장이 특별히 준비하였는데, 어찌 신금에 차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옥처럼 박힌 푸른 눈이 온순하게 태자를 담았다. 눈높이로 강아지를 들어 올려 손가락을 주둥이 앞에 갖다 대어 보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어리어리한 눈망울로 고개를 갸웃대던 강아지가 입에 들어온 것을 깨물기도 하고 핥아 맛을 보았다. 이내 작달막한 꼬리를 쫑쫑 흔드는 강아지의 모습에 둥글게 모여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과 시비들이 모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놈들이 성견이 되면 더욱 풍성하게 털이 자라나, 목덜미에 아주 손이 푹푹 박힐 지경이 된다고 합니다.”
“기대되는군요.”
태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올망졸망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에 푹 빠져 버렸다.
“…전하, 돌치가 강샘을 부리나 보옵니다.”
문득 옥지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으며 일렀다. 아니나 다를까, 내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돌치가 불안한 기색으로 낑낑거리다 태자의 옆구리에 커다란 머리통을 쑥 밀어 넣었다. 닭처럼 모가지를 쭉 뺀 채 하릴없이 주인의 얼굴만 올려다보는 모습이 여간 애달픈 것이 아니었다. 태자가 드물게 웃는 소리를 내며 돌치의 목덜미를 주물러 주었다.
“네가 최고다.”
한껏 귀를 젖힌 돌치가 잔뜩 호기심이 어린 눈망울로 아직 어린 강아지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뜀박질하는 오동보동한 뒤태에 코를 박고 킁킁대면서 이내 함께 싸돌아다니며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사냥을 할 땐 그리도 날쌔고 용맹스럽더니, 물 것 안 물 것 가릴 줄 아는 것이 참으로 명견이라며 왕조오가 감탄하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십오 년 전쯤인가요? 그즈음에도 소장이 벽해에 없는 특이한 동물을 황실에 진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공치사할 생각에 들뜬 왕조오가 무람없이 운을 뗀, 그 순간이었다.
강아지를 어르던 태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 뿐만 아니라 옥지와 화경, 그리고 오래도록 태자궁에 머문 다른 내관들과 시비들까지 일제히 입을 싹 다물었다.
돌연히 싸늘해진 분위기를 낌새챌 만도 하련만, 무언가 헤아리는 듯 고개를 쳐들고 관자놀이를 두들기고 있는 왕조오는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편인 듯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아아, 그래, 원숭이였지요!”
태자가 천천히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면사 끝이 불온하게 휘날렸다. 지켜보던 옥지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돌이켜 보면 견원지간이라, 개를 귀애하는 태자께서는 그다지 곁이 가는 동물은 아니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식사하셔야지요.”
“…예?”
태자의 면사가 왕조오를 향했다.
“저는 수라를 들자마자 곧바로 석강 준비를 해야 하니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왕 공은 천천히 둘러보고 오십시오.”
갑자기 냉랭해진 어투에 왕조오가 당황한 얼굴로 눈만 끔적였다.
이어서 태자가 걸음을 옮기니, 수행인들과 개들이 동시에 그 뒤를 졸졸 쫓는 장관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너른 정원에 외따로 남은 왕조오는 멀건 동태눈을 뜨고 한참을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