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성대한 벽해의 연회는 이튿날도 이어졌다. 마침 칠월 보름 우란분(于蘭盆) 행사가 겹친 날이라 오전부터 뜨거운 찰밥을 연잎에 싸서 찌는 고소한 냄새가 금성에 가득 퍼졌다. 우란분재란 본시 석가의 제자인 목련존자가 죄지은 모친이 지옥에 떨어져 있을 때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아귀에게 공양을 베풀고 교시한 데서 유래하였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자 벽해에서는 조상의 영혼에 음식을 공양하여 추수를 고하고 은혜를 갚는 연례행사로 변모하였다.
금성의 연무장 오색빛깔 채붕 아래서는 수격 기예가 한창이었다. 악사들이 두드리는 가죽 북 장단에 맞추어 마치 화려한 춤사위처럼 구르고, 뛰고, 날아오르는 유연한 몸짓이 칼같이 예리하였다. 홍의는 수십의 사내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가 자칫 단호하게 보이다가도 유순히 처진 눈꼬리가 부드럽게 붓을 뺀 그림 같았다. 팔다리가 길어 몸놀림은 날렵하고, 옆태는 소년 같다가 다시 앞을 볼 때는 장성한 장부이니, 다른 향선들처럼 화려한 장신구를 치런치런 매달지 않았음에도 아무려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이다. 그에 연무장 앞에 붉은 피륙을 쳐 놓고 모여 앉은 귀족들의 잔사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 아이가 태자 전하의 색신으로 들었다는 칠별관 문성의 아들인가?’
‘말해 무엇 해, 황후께서 저 아이를 어찌나 귀애하시는지 오죽하면 북천의 땅까지 내리셨다지 않아?’
‘풍문으로 듣기에 저 아이가 태자 전하의 성교육 스승으로 대내에 들어 황실을 아주 한바탕 휘저어 놓았다는군. 방중술로는 벽해 제일인 이로 서로 자매조차 내지 못한 천자의 씨를 사내 된 몸으로 받들었다니, 이거 이거, 신통 여인들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지 뭔가?’
다 들린다. 태자는 태연하게 말간 얼굴로 앉아만 있었지만, 애당초 시커먼 면사를 두르고 있어 인상을 쓰고 있든 히죽거리고 있든 누구도 알 턱이 없겠지만, 아무튼 속으로는 울컥울컥 짜증이 돋아 홍의의 공연이고 뭐고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위는 여전히 파리 떼 앵앵거리는 소리로 속이 다 시끄러웠다. 면사 안쪽에서 미간을 좁히던 태자가 결국은 한숨처럼 옥지를 향해 물었다.
“바늘 있느냐.”
옥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자 앉은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바늘 말씀이시옵니까?”
바늘뿐만 아니라 아예 손바닥만 한 반짇고리 함을 하루 온종일 소매 아가리에 장착 중인 옥지에게 저런 질문은 살짝 실례라고도 할 수 있다. 혹시 오늘 드린 최고급 용포의 솔기가 타지기라도 했는가 싶어, 옥지는 벌써부터 반짇고리가 든 왼쪽 소매 안으로 다른 손을 집어넣던 참이었다.
“쟤네 입 좀 꿰매.”
진담이신 듯하다. 옥지는 입을 인자하게 다물고는 비어 가는 태자의 찻잔에 다시금 차를 꼴꼴 따랐다.
“대궁의 시녀를 죽였다고 들었다.”
“…….”
막 공연을 마친 홍의가 단을 내리던 때, 옆에서 내내 말이 없던 황후가 문득 입을 열었다. 태자는 여전히 저 멀리 홍의를 응시하며 천천히 대답하였다.
“지저분한 손으로 폐하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네 언제부터 그리 폐하를 아꼈더냐?”
“아들이 아비를 위하는 마음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지당한 이치입니다.”
황후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손 안의 염주를 굴렸다. 작게 절그럭거리는 소음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마침 연무장에는 홍의의 뒤를 이어 자리를 채운 광대들이 목련경의 한 장면을 그대로 구현해 낸 연극 판을 시작한 참이었다.
“세존이시여! 대체 저희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목련아! 너의 어미의 죄가 수미산 같아, 깊고 깊은 지옥에 떨어졌느니라!”
오색 채운의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아귀 수라장을 그대로 재현해 낸 벽화를 두고 각 역할에 맞게 분장을 한 만담꾼 소리꾼들이 열심히 흥을 돋우고 있었다.
가면을 쓴 목련존자가 지옥의 굴길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외쳤다.
“나는 두루 살피었습니다. 칼산 지옥과 맷돌 지옥, 독물 지옥과 화탕 지옥까지 모두 살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머니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저희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가마에 끓여 몸이 만 토막으로 자디잘게 나뉘고, 피와 가죽이 어지러이 흩어지며 하루에도 만 번을 죽고 살아난다는 화탕 지옥에도 아니 계십니다. 머리에 불 동이를 이고 머리뼈가 활활 불타는 화분 지옥을 샅샅이 휘돌아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제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에 옥리가 죄인 가운데 한 여인을 데려왔다. 쇠 창으로 배가 꿰인 채 온몸에 못이 박혀서 피가 철철 쏟아지는 와중, 겹겹이 쇠칼 고랑을 팔목과 발목에 찬 채 온몸이 시뻘건 불에 활활 타고 있는 여인이었다.
“어머니인 청제 부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소고 가락이 따닥따닥 이어졌다. 태자의 금빛 상투관으로 불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알싸한 분노가 일었다. 곳곳에 피어오른 모닥불이 두려운 채광으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별궁에 불이 났다!’
‘물을 퍼 날라라! 태자궁까지 불이 번진다!’
기억의 습격이었다. 오래된 꽃담 뒤편,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산, 소맷부리 안쪽에 열심히 쟁여둔 곶감들이 아래로 툭툭 떨어져 발등을 구르던 감각들.
아주 소중했던 것들이, 아주 애절하게 움켜쥐었던 것들이 소맷자락 사이로 하릴없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때 어렸던 자신은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태자는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푸르게 솟아오른 혈관을 뜨거운 불의 얼룩이 더듬었다.
“…허면, 어찌하겠느냐?”
여느 때처럼 빳빳이 등허리를 세우고 앉은 황후가 여전히 무대를 바라보며 하문하였다. 내내 기억에 잠겨있던 태자가 번뜩 정신이 돌아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목련은 어머니 대신 지옥으로 들어가 쇠 창에 꿰이고 불구덩이를 헤매리라 하였고, 아들의 효성에 감복한 세존께서 욕심 많은 청제 부인을 개로 환생시켜 주었다 하더구나. 아비를 그토록 위한다는 네가, 이 어미를 위해서도 그리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겠느냐?”
차곡차곡 쌓인 불길이 이제는 차디찬 냉소가 되어 잇새에 물렸다.
“청제 부인이 그에 만족하셨답니까?”
“…무슨 뜻이냐?”
“저는 어머님께서 한갓 개의 삶에 만족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지 못하겠습니다.”
마침 목련존자가 고통스러운 업을 받고 있는 어머니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이어졌다. 황후는 천천히 실소를 섞어 응답하였다.
“제대로 보았구나.”
“…….”
“태자비와의 귀숙일이 잡혔다고 들었다. 네가 아들로서 이 어미에게 효를 다하는 일은, 오롯이 후사 안돈에 정진함 뿐임을 숙고해야 할 게다.”
태자는 차분하게 답했다.
“준명 앞에서는 발기가 되지 않습니다.”
황후는 헛웃음을 쳤다.
“이로와 서로를 들여 돕도록 하면 될 것이다.”
“허면 또 파정에 이를 수 없겠지요.”
“홍의를 이용하라. 네 그 아이와 합하여 얻어 낸 용정을 외따로 태자비에게 심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혈통 좋은 종마를 교배할 때 쓰는 방식이군요.”
“여운아.”
참으로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황후는 인상을 찡그리고 긴 한숨을 뽑았다.
“대체 어찌 이러느냐? 대체 무엇이 너로 하여금 이토록 효를 저버리고 사사건건 어미에게 반하도록 한 것이냐? 정비를 홀시하고 남첩을 보란 듯이 침전에 들인 것으로는 부족했단 말이냐?”
황후는 미간에 손등을 괴었다.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 그 아이가 네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그 아이가 너와 동침 몇 번 했기로 고추가 없어졌느냐, 아니면 울대가 사라졌느냐? 홍의는 사내다. 여전히 그 태내는 비어 있으며 서역의 모래벌판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다. 홍의는 너에게 후사를 안겨 줄 수 없는 몸이란 말이다.”
“…….”
“내 너를 괴롭힐 요량으로 이러는 게 아니다. 본디 황제는 무엇이든 취할 수 있지, 허나. 단지 취하기 위하여 목숨 줄을 내어놓는 일은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네 정녕 어미의 참뜻을 모르고 계속 왼새끼를 꼴 참이냐?”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좌중이 놀라 극을 멈추고 엎드렸다.
“그래도 놓지 못하겠다면, 후사를 보아라.”
“…….”
“준명과의 사이에 태손이 난다면 내 더 이상 너의 지밀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리라.”
그리 방점을 찍은 황후가 빠르게 몸을 돌려 단을 내렸다. 모두가 읍례하는 와중에도 태자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으어억! 으아아!’
호흡이 가빴다. 귓속이 먹먹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소리로 울부짖는 굴피집의 사내가 떠올랐다. 눈앞으로 푸른 눈동자가 쏟아졌다. 수백 개, 수천 개의 파란 눈동자들이 공중을 내리 떠다니며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후사.’
그 단어가 피부로 다가오자 태자의 주먹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전하,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옥지가 다급히 달려와 곁에 바싹 붙어 섰다. 태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전하, 옥체 미령하시옵니까? 연전처럼 가슴이 불온하게 뛰시옵니까? 청심환을 올리오리까?”
옥지가 안절부절못하며 정신없이 재우쳐 물으니, 그제야 감았던 눈을 파르라니 뜨는 태자였다.
“…홍의는.”
성음이 속삭임처럼 작고 힘이 없었다.
“홍의 님은 방금 기예를 마치고 잠시 다향원에 향한 듯합니다. 속히 다령하라 전하리까?”
“삼경에 ‘그곳’으로 갈 것이니 미복을 준비해라.”
옥지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꿇고 소리를 죽여 아뢰었다.
“전하, 시국이 좋지 않사옵니다. 부디 연회를 마친 연후에 길을 잡으심이….”
“준비해라.”
한 번 더 만류하려던 옥지는 결국 무용한 반항임을 깨닫고 순순히 머리를 조아렸다.
“속히 행장을 꾸리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