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달조차 구름에 잠기어 스산하고 물기 어린 밤이었다. 태자는 믿을 만한 병사들을 최소한 간추려 태자궁 후원에 소집하였다.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막 태자궁으로 돌아온 홍의도 영문을 모르는 채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이끌려 갔다.
“전하, 난데없이 무슨 일입니까? 다 늦은 시각에….”
“가자.”
짧게 일축하고 돌아서는 태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좋지 않은 낌새를 감지한 홍의는 입을 다물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병사 몇몇과 화경과 옥지, 그리고 검둥개들만 동행하여 오른 야간 산행이었다. 홍의는 산을 오르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세간에 떠돌던 태자의 도깨비 놀음,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은밀한 이 행렬에 자신이 동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난번 태자가 도깨비불을 좇아 밤마을을 돌았다는 이야기를 미함에게 전해 듣고 속으로 무척 약이 올랐었는데, 막상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는 형국이 되자 두렵고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파르게 기운 비탈을 허정허정 오르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헐떡이며 산을 타고 있던 옥지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불렀다.
“얘, 옥희야.”
“예, 홍어 님.”
“…….”
“아, 홍삼 님이셨던가요…? 아무튼.”
“…그래, 서로 간에 어찌 부르든 그게 무어 중하겠니. 이래저래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좌우지간,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옥지는 지체 없이 대꾸하였다.
“가 보면 아실 것입니다. 그보다 속곳은 챙겨 오셨습니까?”
“속곳? 속곳은 왜?”
“간혹 초행길의 병사들은 두려움을 못 이기고 잠방이에 소피를 지리기도 하거든요. 뭐 소인의 눈대중으로 홍의 님의 담력을 가늠키 어려우니, 혹시나 하여 여쭌 것이어요.”
“…….”
“흐흠. 옥지야, 그리 말하면 홍의 님이 당황스럽지 않겠느냐? 홍의 님, 걱정일랑 붙들어 매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속곳을 세 개나 챙겨 왔거든요. 여차하면 빌려드릴 터이니 심려 말고 오르던 산 오르시면 됩니다.”
그렇게 어살버살 흰수작을 늘어놓던 옥지와 화경이 웃음 참는 얼굴로 눈을 맞추더니 그대로 홍의를 앞질러 휭하니 가 버렸다. 이제는 저것들까지 나를 골려 먹는가 싶어 홍의가 잠시 헛웃음을 치는데, 다음 순간 지척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날짐승 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휙휙 주변을 살폈다. 시커멓게 물들어 괴이하게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벌써 열 보는 앞서간 그네들을 발견하고 행여 뒤를 놓칠세라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태자는 산을 오르는 내내 말이 없었다. 현곤과 금관을 벗고 면사만 드리운 채 짙은 아청빛의 무복을 차리셨는데, 홍의는 괜히 그 소매 밑으로 삐죽 나온 손끝이나 건드리며 수작을 붙이려다 어쩐지 머쓱하여 관두길 여러 번이었다.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말도 많은데.’
태자비의 협박도 그렇거니와, 정통 향선들의 낌새도 심상찮으니 아닌 척해도 마음이 편편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냉랭해 보이는 태자의 모습에 쉬이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생각하기를 접고 누구 말대로 산이나 타기로 한다. 홍의는 거치적거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리에 힘을 실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창 산을 오르려니 오히려 집중이 되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몇 번씩 뒤처지던 홍의가 특유의 다릿심으로 이내 선두를 차지하자, 돌치와 깜치가 돌아보며 콧김을 뿜었다.
남산은 너르고도 험준한 산이었다. 인간의 거듭 밟고 다져 댐으로써 생겨난 조붓한 낙엽 길에 발목을 세 번이나 접질릴 뻔했다. 봉우리에 오르기까지도 몇 시진을 허비했거늘, 봉우리를 돌던 검둥개들이 다시 아래로 길을 잡는 것을 보자 확 쫓아가서 들멍대는 엉덩짝을 걷어차고 싶어졌다. 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인가. 홍의는 숨이 가빠 헐떡이는 게 아니라 성질이 올라 씨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태자를 기준으로 모두가 흠칫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도중에 대충 바위 위에 앉아 다 같이 옥지가 싸 온 주먹밥으로 요기를 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묻자 옥지는 예의 음침하게 가 보시면 안다고 답하였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홍의는 부들부들 떨며 주먹밥을 콱콱 씹었다.
곧이어 일출이 시작되었다. 눈부신 햇발이 어둠을 찢고 나와 푸른 숲을 찌를 무렵이었다. 가뜩이나 높은 산을 돌고 돌던 검둥개들이 좁은 바위틈을 가리고 있던 덩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홍의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병사들이 헐레벌떡 달려가 덩굴을 마저 치우니, 장정 두 명쯤 간신히 들어갈 법한 바위 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각기 짐을 나누어 들고 어둡고 좁은 굴길을 조심조심 지나니 마치 비밀한 요새처럼 초록 잎 무성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인적이 드문 정도가 아니라 일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만 같습니다.”
본디 홍의에게 남산은 익숙했다. 황실 사유지인 목란골을 제외하고는 무동들과 체련을 나서거나 유오를 다니느라 안 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제집 안방처럼 훤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외진 곳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방을 가린 높은 봉우리 틈으로 삐죽 솟아난 작은 봉우리였다. 나무들에 매달린 거미줄이 끈적끈적 이마에 들러붙었다. 앞을 보아도 나무, 옆을 보아도 나무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뭇가지의 가장귀 사이로 이어진 은빛 실타래에 알알이 매달린 이슬은 세상에 존재하는 빛이라면 모두 비추어 낼 듯 맑고 영롱하였다.
“내 쌍생형제가 있는 곳이야.”
홍의는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주 태연자약하게 내뱉은 태자는, 더 설명할 마음은 없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예사롭게 걸어 나가고 있었다.
봉우리에 다다르자 주섬주섬 오랏줄을 꺼내어 저희들끼리 늘어뜨려 붙드는 병사들의 모습에, 지켜보는 홍의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마지막 언덕을 오르니 산속에 파묻힌 나지막한 초막이 드러났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홍의는 침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채소밭, 다 녹슬어 스러져 가는 호미와 괭이가 줄줄이 걸린 반쯤 허물어진 창고, 흙벽이 무너지고 건초가 썩어 가기 시작한 초가삼간….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사는 세간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무관심과 부주의한 환경 속에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홍의의 검은 눈동자가 매의 눈처럼 빠르고 예민하게 굴렀다. 그 짧은 찰나에 이곳의 모든 것을 파악하다시피 한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병사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긴장해 있었다. 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태자가 홍의의 팔을 붙들어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검둥개들이 미끈한 근육을 잔뜩 세우고 마치 맹수와도 같은 살기를 뿜으며 일대를 어슬렁어슬렁 맴돌기 시작했다. 사람이 산다고, 더군다나 태자의 형제가, 황족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대체 이런 살벌하고도 치밀한 경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홍의가 서름한 기분에 사람들을 살피는 가운데, 문득 뒤쪽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이 들려왔다.
“어어억! 으어어어!”
홍의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놀라 돌아본 곳에서는 시커먼 꼽추가 달려오고 있었다. 상대의 두 눈은 태자와 꼭 같은 물빛이었고, 아랫도리만 간신히 기워 입은 맨몸뚱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체로도 너무나 추저분하고 괴상하여 일면으로 보기에 오금이 저리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추물이었다. 게다가 옴에 피를 빨린 저창인지 온몸에 붉은 물집이 가득했고, 곳곳에서 누런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화경의 지휘 아래 칼과 오라를 바싹 다죄어 양손에 벼르고는, 주춤주춤 꼽추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둥개들이 몰려와 둥글게 원진을 짜고 그를 향하여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곧이라도 달려들어 모가지를 물어뜯을 듯 기다란 꼬리를 사납게 흔들며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쌍생형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대체 어찌.”
“쉿.”
태자는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홍의를 한 팔로 저지하며 쇳소리를 내었다. 병사들의 벽이 점점 자신을 에워싸니 울분에 찬 꼽추가 들고 있는 다 녹슨 호미를 마구 휘저으며 괴성을 질렀다. 화경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흙바닥에 억눌렀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바닥에 짓눌린 사내를 보느라 시선이 아래로 향한 홍의가 곧 귀신이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굳었다. 그리고 벽력처럼 소리쳤다.
“개들을 묶어라!”
모두가 놀라 돌아보았다. 홍의는 이마까지 벌게져서는 가슴팍을 들썩이더니, 다시 한번 우렛소리를 내질렀다.
“어서 개들을 묶고 칼을 내리라는데도!”
병사들이 술렁거리며 태자와 홍의를 번갈아 보았다. 홍의는 이 와중에 태자를 향하여 황급히 부복례를 올리고는 무척 다급하게 아뢰었다.
“전하, 지금 당장 돌치와 깜치를 이곳으로부터 십 리쯤 떨어진 곳에 묶어 두고 병사들도 모두 물려 주십시오. 주변에 사람이 없을수록 좋습니다. 화경에게도 더는 간섭지 말라 일러 주십시오.”
“…….”
태자가 대꾸가 없으니 병사들이 눈치를 살피며 슬슬 칼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태자는 화경을 향하여 물러나라는 듯 턱짓을 하였다.
“하오나, 전하!”
옥지가 놀라서 다가들자 홍의가 강강히 막아서며 그런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내가 전하를 지킬 터이니, 너는 어서 검둥개들을 데리고 물러나 있거라!”
곧이어 좁은 마당에는 홍의와 태자, 그리고 꼽추만이 남았다. 그런데 칼을 내리고 물러나는 사람들과 목줄에 매여 끌려 나가는 개들의 뒷모습을 살피던 사내가, 참으로 놀랍게도 씨근거리던 것을 멈추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