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2화 (8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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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건만 동굴은 몹시 습하군요. 축축하기도 하고.”

옷가지를 챙기던 홍의는 그제야 동굴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랫도리를 추키고 허리끈을 여미는데 가뜩이나 땀에 젖은 몸에 물먹은 옷자락이 찝찝하게 감겼다.

“네 동굴도 몹시 습해. 촉촉하고.”

“…….”

태자는 한바탕 실컷 뛰어놀아 충만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드러누워 식은 소리를 지껄였다. 그리고 슬쩍 손을 뻗어 홍의의 엉덩이 살을 주물렀다. 홍의는 온화한 표정으로 상대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태자는 그래도 좋은지 홀로 피식피식 웃었다.

“…전하.”

“응.”

“황자 마마를 어찌하실 겁니까?”

맨몸에 속저고리를 걸치던 태자가 잠시 멈칫하고는, 대답 없이 깃을 여몄다. 홍의는 기다렸다.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태자는 저고리 위에 유를 걸치고 가반을 챙길 때까지 태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홍의의 관자놀이에 정교한 핏줄이 빠직 불거졌다.

“전하는 가끔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만큼 말수가 적으신 것 같습니다.”

‘…야한 소리는 아무 때고 곧잘 던지면서.’

홍의는 속으로 불퉁거렸다. 그리고 다가가서 벌어진 저고리의 고름을 매어 주고 요대를 정돈해 드렸다.

굴 밖으로 나오니 달빛이 밤하늘을 어루만지듯 창창하고 애애했다. 두 사내는 잠시 선선한 밤바람에 젖은 몸을 쏘여 말렸다. 그러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발견하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한참 땀을 쏟은 직후라 갈증과 구미가 왈칵 돋았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알알이 옹골찬 보리수가 가득이었다.

입 속에 넣자마자 알아서 물큰하게 터지는 보리수는 완전히 무르익어 무척 달착지근했다. 손안의 어떤 것은 쥘힘에 혼자 터져 단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홍의가 환장하게 달다며 감탄하자, 지켜보던 태자는 예고도 없이 고개를 꺾어 입술을 부딪쳐 왔다. 맞물린 입새로 붉은 즙이 주르륵 흘러 턱 밑에 고였다. 입술을 한차례 머금고, 혀로 밀고 들어와 입 안의 과즙을 샅샅이 감빨았다. 홍의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어, 진짜 달다. 더 따 갈까?”

“…….”

태자가 혀를 내어 스스로의 입술을 날름거리며 중얼거렸다. 망연하던 홍의는 손아귀에 짓눌려 완전히 뭉개져 버린 보리수를 바라보다 뒤늦게 목덜미를 붉혔다.

“…신이 따겠습니다.”

태자를 의식할 때, 홍의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배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주변에도 알 수 없는 빛이 떠다니는 것 같다. 이따금 힐끔힐끔 돌아보고는 안 본 척 헛기침을 두는 것도 우습다. 참으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사내라며 태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멀지 않은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보는 입매가 자꾸만 말려 올랐다.

도경이나 금성에도 자생한 보리수나무는 많았다. 허나 채 익기도 전에 민인들이 샅샅이 훑어가 버리고, 궁원에서 키우는 것들은 황족들의 전유물이라 홍의 같은 하층 귀족은 맛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홍의는 신이 나서 열매를 씨가 마를 지경으로 쓸어다가 장유 자락에 고이고이 담았다.

“옷에 물들 텐데.”

“괜찮습니다. 이것 잔뜩 따 가서 황자 마마 자시라고 드릴 겁니다. 남으면 저희 아버지도 갖다 드리고요.”

가만가만 홍의를 응시하던 태자가 여전히 턱을 괸 채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 사람은, 널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유일한 형제이자 벗이었던 사람이야.”

“…….”

열매로 향하던 홍의의 손길이 시나브로 느려졌다. 뒤늦게 돌아보았다.

“내가 너 외에 마음을 연 단 한 사람이기도 해. 무어 형제니까, 더구나 일다경 터울로 난 쌍생 형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정이긴 하지만….”

“예, 전하. 충분히 이해하옵니다.”

“한데 갑자기 그 사람이 변했어. 아마 삼 년 전이었을 거야. 나는 걱정되어 간 건데. 그리워서 보러 간 것인데 그 사람은 괴성을 지르며 돌팔매질을 했어. 곡괭이를 들고 달려들었어. 아, 돌에 맞은 적도 있었지. 피가 날 정도로 말이야.”

“…….”

“밥도 안 넘어갔어. 몇 날 며칠을 앓았지. 진정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를 기다려 주고 그리워해 주는 사람은 하늘 아래 그 사람뿐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것이 고작 삵 때문이었다고 하니까, 화가 났던 것 같아. 아니, 정확히는….”

“서운하셨던 거지요.”

“…….”

“전하는 서운하셨던 겁니다. 그리 긴 배신감과 슬픔은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앙금을 녹일 시간도 필요하답니다.”

“…내가 유별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요. 전하만 유별한 게 아니라 다들 그렇습니다.”

홍의가 태자에게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히 올려다보았다.

“다들 그리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서운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리 사람들과 부딪치다 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보게 되고, 모르던 것도 알게 되고, 다음부터는 조금 더 유연히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게 되지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모두가.”

“…모두가.”

태자는 천천히 홍의의 말을 곱씹었다. 폐쇄된 삶을 살아온 태자에게 타인에 대한 이해는 아직 멀고도 어려운 난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들 그리 산다는 말이 별스러울 만큼 와닿았다.

“다행이야.”

태자는 손을 뻗어 홍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에 꽂아 주며 말했다.

“예? 무어가 말입니까?”

“네가 내 곁에 있는 것.”

“…….”

“고마워.”

떨리는 눈꺼풀로 꽃잎이 내려앉듯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가슴이 맥맥해져 홍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

그리 말한 태자가 비갠 뒤 쏟는 햇살처럼 투명하게 웃었다. 붉은 입매가 발씬 말리고 하얗고 간잔지런한 잇바디가 드러났다. 어떤 백 마디의 고백보다도, 그토록 환하고 밝은 미소가 홍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가만히 돋을새김되었다.

***

막집으로 돌아온 홍의는 서둘러 지붕 개초를 도왔다. 깨끗하고 풍성한 볏짚 지붕을 새로 덮은 초가집은 더는 을씨년스럽지 않고 정답게만 보였다. 집 이곳저곳을 보수하고, 새로이 울타리를 튼튼히 세우고, 썩은 채마밭의 흙을 뒤집어 갈았다.

그 사이 태자는 막집의 뒤편으로 가 작은 무덤에 술을 뿌리고 있었다.

“누구의 무덤입니까?”

홍의가 다가가 물으니 태자는 나지막이 대꾸했다.

“욕쟁이 무덤.”

어느덧 슬금슬금 나타난 사내가 태자의 옆에 섰다. 그는 익숙한 듯 투박한 손길로 무덤에 돋은 잡풀을 뜯었다.

한참 뒤 세 사람이 함께 안마당으로 나서니, 소제를 마친 병사들과 화경이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홍의는 사내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하였다.

“열매즙은 하루에 한 모금씩 드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빼놓으면 효험이 없으니 꼭 자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또한, 새 붕대와 끈은 침반 밑에 있으니 다섯 밤을 주무신 후 새 걸로 갈아 주시고요. 가시기 전에 시렁 위에 놓인 녹두 가루로 손을 깨끗이 씻으시는 것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매 끼니 잘 챙겨 자시고, 아침저녁으로 목간하시고, 또 아무거나 주워 드시면 큰일 나요… 야생 짐승 고기는 웬만하면 속까지 전부 익혀 자시고요. 아시겠지요? 참말 알아들으신 것 맞지요? 허면 소신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마마, 강녕하시고 부디 그때까지 옥체 보존하십시오.”

사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태자가 면사를 추어올렸다. 병사들 모두가 뒤돌아섰다.

홍의는 잠시 한 걸음 물러났다. 꼭 닮은 네 개의 눈들이 올곧게 서로를 마주하였다. 태자는 묵묵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사내의 손을 잡아 보았다. 희고 깨끗한 손과 검고 얽은 손이 서로 간에 놓칠세라 꽉 쥐였다. 태자가 눈을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약조, 안 잊었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눈에서 봇물 터지듯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태자는 차가운 어수를 들어 다정하게 사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내 널 꼭 데리러 올 테니.”

“어… 으.”

“그때 우리 같이 사는 거야. …네 삵들도 함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태자의 소매를 붙들었다. 홍의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뒤돌아서 하릴없이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암지흑을 밝히며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유난히 환하고 서글픈 밤이었다.

사내는 하도 울어 눈짓물이가 된 채로도 홍의와 태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타리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홍의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덩굴을 가르고 금오산 봉우리에 다다를 때까지, 홍의의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끊길 줄을 몰랐다.

“울보.”

옆을 걷던 태자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읊조렸다. 홍의가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로 태자를 슬쩍 흘겼다. 어쩐지 방사를 나눌 때 할딱할딱 숨이 넘어가도록 우는 것과 연관 지어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전하는 어찌 그리 슬픈 몌별에도 용루 한 방울 안 흘리십니까?”

독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 젓자, 태자는 여전히 부숭부숭 마른 눈을 무심히 깜박였다.

“군주는 우는 거 아니랬어.”

“허면 날 때도 안 우셨습니까?”

“날 때야 울었겠지.”

“소신은 가을쯤 되면 낙엽만 떨어져도 눈물이 날 때가 있사옵니다.”

“…그건 좀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말로는 투덕투덕하면서도 병사들 몰래 은근슬쩍 손가락 끝을 엮다 깍지를 끼었다. 어차피 뒤에 처져 걷고 있는 상황이고 밤 숲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찬 손이 손가락 마디마디를 휘감자 홍의의 가슴이 뛰었다. 볼이 달아오르고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간지럽습니다.”

“손 말인가?”

“손도 그렇고, 전하 말씀하시는 어조가요. 전하는 편한 자리에서는 굳이 해라체나 하게체를 쓰지 않고 동무 대하듯 무람없이 말씀하시곤 하지요? 그 나직나직한 어조를 듣고 있노라면 귀랑 가슴이 간질간질하다니까요.”

태자가 살풋 웃었다.

“나도 네 목소리 들으면 간지럽던데.”

“어디가요?”

“거시기가.”

“…….”

“왜 갑자기 손을 놔, 홍의야.”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입만 열면 온갖 질문이 밖으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온몸이 궁금증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러나 홍의는 태자가 스스로 입을 열기 전에는 묻지 않기로 했다. 본디 말의 경계가 심한 사내라 스스로 때를 정하지 않고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 성정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짓궂게 놀려먹기를 시작한 태자를 피해 홍의는 얼른 병사들 틈에 섞였다. 홀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느라 혼났지만, 어쨌거나 쌓은 바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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