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4화 (84/111)

#84

벽해(碧海)는 국가 이름 그대로 푸른 바다를 품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오백년 전 벽해의 시조 진성대제는 대륙에 흩어진 소국들을 통합하여 왕권 강화에 힘썼고, 정통의 일족들은 건국을 도운 공신 가문으로서 진성대제와 연혼하여 나라의 제일가는 권문세족으로 거듭났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근친혼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것이 곧 벽해의 ‘혈통 제도’와 ‘인통 제도’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적통만이 황태자가 될 수 있다는 혈통 제도와, 정통가문 사람만이 재상이 될 수 있다는 인통 제도는 다른 듯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가문과 백성을 천대하고 멸시하였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 반하는 세력이 생겨나, 혈통 제도와 인통 제도의 혁파가 수시로 상소 안건에 오르곤 하였다.

‘예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벽해의 이 제도를 두고 오랑캐의 폐습이라 험담을 한다는군.’

‘‘사랑이 백화난만한 벽해’도 이미 옛말에 지나지 않아. 이미 걸출한 학자들 사이에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천박하고 고루한 제도라는 말이 공공연하다지?’

그러나 이십일 년 전, 당시 황태자였던 은종이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신통의 옥명 공주를 황태자비로 삼으면서 허물어져가던 폐해의 누습이 다시금 공고한 국가체제로서 자리를 잡고 말았다.

‘내가 이복오라비와 혼인한 것이 오랑캐의 혼도라고? 폐단이라고? 허나 이 나라의 모두가 이 같은 방식을 따른다면, 그것은 폐단이나 부조리가 아닌 그 나라의 문화이자 풍속이 될 터다.’

어쩌면 씨받이 가문 출신이라는 부정한 꼬리표가 그녀의 조악한 야망을 더욱 거세게 담금질했을는지 모른다. 옥명 황후는 황제의 지독한 편애와 사랑을 믿고 벽해를 빠르게 점령해나갔다. 특히 족친들로 하여금 근친혼과 색공으로 세를 불리도록 장려했는데, 예를 들어 본남편이 따로 있는 황후의 여동생 윤명 공주는 자신의 형부인 황제의 첩이 되어 색공을 했다. 그에 황제는 윤명 공주와 윤명 공주의 본남편에게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 같은 회뢰(賄賂, 뇌물을 주고받음)의 방식이 황실을 넘어 귀족들에게까지 세습되었고, 나아가 학문과 무예의 장인 다향원조차 온갖 패륜과 색탐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입학 동기였던 무동이 하루아침에 우방무동(右方武童, 무동 중 가장 높은 직급)으로 승격하였다. 매사 빤질거리고 깐족거리며 학문 수업과 체련에 불참하던 어떤 무동은 어느 날 단숨에 향선 자리를 꿰어 차서는 포달스러운 성깔을 드러내었다. 이해할 수도 용인할 수도 없는 일들이 홍의의 주변에서 너무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나라 귀족 나리들 말입니까?’

삯바느질을 하던 달래는 정색을 짓고 돌아보았다.

‘나라의 부흥보다 재보와 색을 탐내는 그 모리배의 족속들을 이르심입니까? 금성의 귀족들은 언제고 자기의 세를 지키려 아랫것들의 뼛골을 착취하기에 급급하고, 또 그 아랫것들은 그런 주인들을 꼬여내 나 스스로의 삭골뿐 아니라 처자식의 골수까지 뽑아 먹히길 소망하지요. 다향원의 신분 낮은 무동들이나 해어화들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웃전에게 색공을 하는 일입니다.’

‘…무동들도 몸을 판단 말인가?’

‘그뿐이면 다행이지요.’

달래는 음성을 낮췄다.

‘남색 취향의 유력가나 신통 가문의 여인들에게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보다 더 확실하고 신속한 방도는 바로 자기 처나 자식을 상관에게 바치는 일입니다. 다향원의 법도에 따르면 작위가 없는 무동들은 향선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하여 신분을 높이기 위해 향선이나 재상에게 자신의 아내나 딸을 바치고, 그들은 그 아내와 딸을 첩으로 삼아 성관계를 맺은 뒤 후견인이 되어 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든든한 뒷배일까요?’

악착같이 씨족가문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내남을 구별 짓기 좋아하는 족속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고, 낮고 비천한 자들은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화려하고도 꽁꽁 닫힌 거가대족의 세상에 속해보고자 갖은 발악을 하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홍의를 향하여 달래는 씁쓸히 웃었다.

‘문리는커녕 까막눈에 천출인 제가 보기에도 이는 명백한 패륜입니다. 허나 이러한 인간상납의 풍속을 거부하고 고결하기를 택한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순식간에 금성에서 병신 돌림쟁이 취급을 받을 거예요. …저와 나리처럼 말이죠.’

확실히 황후가 옳았다. 그녀의 말대로 세상은 이 같은 기벽을 당연한 풍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색사를 멀리하고 학문과 검법에 정진하면 도덕군자 소리를 듣기보다는 칠푼이 젖먹이 취급을 당했다. 이에 맞서며 원칙을 주장하는 고족(孤族, 세가 적고 한미한 집안)의 자제들은 대부분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알몸으로 비참하게 쫓겨났다. 다향원은 마치 터진 둑에 수몰된 마을처럼 을씨년스럽게, 더욱 깊고 추운 명개의 밑바닥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미함은 자주 비탄하곤 했다.

‘이 나라의 윤리의식과 도덕성은 진창에 묻힌 지 오래다. 이러한 폐단의 꽃을 피운 것은 신통이나, 뿌리를 심은 것은 정통이었으니…. 정통가문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망쳤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도다. 너와 나는 이 나라의 몇 없는 두눈박이다. 그러므로 돌연변이다. 절대로 그들과 섞이지 말고 조용히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라. 현재로서 우리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로구나.’

그래서 홍의는 그들을 향해 엎드리지도, 드레진 성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입을 다물고 살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음전하고 진중하고 아주 가끔 별스럽지만, 어쨌거나 처신에 있어서는 딱히 흠잡을 데가 없고 이도 저도 아닌 맹탕의 삶이었다. 어떨 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문성과 누이동생 소의, 그리고 언제나 부족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무동들을 지켜내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방편은 없었다. 매사 허허롭게 모르쇠를 잡으며 무지렁이를 시늉하고 살기. 성질대로 담차게 나서 옳고 그름을 주장했다간, 소중한 이들에게마저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으니 말이다.

홍의는 어머니를 여의고 달래를 떠나보냈을 때 다짐했다. 더는 눈앞에서 누구도 잃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겁쟁이 비겁자라 손가락질을 당해도 좋다고.

“손.”

“…제가 돌치입니까?”

하지만 인생이란 게 어디 그리 녹록한가. 만사가 계획대로만 흐른다면 불행한 이들이 왜 생겨나겠는가.

“돌치는 말이라도 잘 듣지.”

이제는 홍의의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가장 지키고 싶은 인물 일순위에 등극한 청년이, 홍의의 손등에 입술을 누른 채 꽃처럼 도발적인 눈을 치켜떴다.

“원래 좋은 사람은 없어. 매사 좋은 사람이고자 심력을 다하는 이가 있을 뿐.”

“…난데없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함 현군 말이야.”

그 말에 홍의는 무심코 이미 누를 내려 저 멀리 점처럼 작아진 미함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

“현군과 친히 대담을 하고 보니 저분이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 판단을 내리신 겁니까?”

“네가 나보다는 저치를 더 믿는 것 같아 아니꼽다는 거.”

홍의가 아, 했다. 그리고 딱히 정정하기도 애매하여 먼눈을 팔았다. 본디 연모와 믿음은 별개의 감정이 아니겠는가. 뭐 그런 것이지.

“…미함 공과의 독대는 어떠하셨습니까?”

태자는 미함이 돌아가고 나서도 계속 수심이 짙은 얼굴이었다. 그에 홍의가 눈치를 살피자, 누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나뭇가지의 꽃잎을 툭툭 건드리고 있던 태자가 자연스럽게 턱을 고였다.

“내게 군신의 청을 올리더군.”

홍의의 눈이 회동그래지며 입이 벌어졌다.

“허면 아주 경사가 난 게 아닙니까? 미함 공이라면 정통 가문의 중추이고, 황태후 마마의 막내아드님이시니 이를 전하의 산하에 들이신다면 신통에 관한 견제도 보다 수월하실 것입니다.”

“하여 더 고민인 거야.”

“…어째서요?”

“황태후, 나의 할마마마는 문후조차 거부할 만큼 나를 끔찍이 증오하시거든.”

태자는 대수롭지 않게 운을 떼었지만 홍의의 낯빛은 어지간히 굳고 말았다.

“허나 전하께오서는… 매일을 꼬박 태후 마마께 문후를 가시지 않습니까? 금일 조반 후에도 다녀오셨고요.”

“그게 황실의 법도니까.”

태자는 굳게 잠긴 태후전의 문을 떠올렸다. 언제고 열리는 법이 없는 철벽같은 그 문.

매번 문안을 갈 때마다 대부분 문지기에게 거절당해 문턱에서 돌아서곤 했지만, 가끔은 그도 사람인지라 확 치받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땐 막아드는 시종들을 밀어내고 억지로 입성하여 차가운 섬돌 아래 절을 올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머리맡에 뿌려지는 소금이거나 팥알의 세례, 혹은 태후께서 삼일 간 수라를 끊었다는 전보뿐이었다. 그토록 더럽고 냄새나는 종자가 다녀갔으니, 도랑창을 들이켠 듯 욕지기가 올라와 밥술을 올릴 수가 없다셨던가.

“…전하는 황족의 장손이거늘, 세상에 둘도 없을 귀한 손에게 어찌 그리 매몰하고 박정하게 구신단 말입니까?”

“자식이라고 하여 무조건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친할미라고 해서 모든 손주를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홍의는 새삼 깨달았다. 여태껏 자신은 오롯이 본인의 주관으로만 세상을 봐 왔다는 것을. 언젠가 부모자식간의 끈끈한 핏줄 아래 좋고 싫고를 따지어 무엇 하겠느냐는 홍의의 질문에, 태자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말을 끊기를 택했었다.

‘그래, 이곳은 여염이 아니라 금성이었지.’

검고도 투명한 막. 그 안에서 견주었을 황태자의 세계가 점차 홍의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처럼 어두운 별세상이 처음으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와닿았다.

“…하여 결론은 내리셨습니까?”

홍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 마마의 사람인 미함 공을, 받아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태자는 미함이 두고 간 서신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홍의가 대신 서신을 들고 겉봉을 열어 보려다 멈칫했다.

“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개견이인사(開見二人死), 불개일인사(不開一人死)?”

겉봉에 쓰인 글자를 그대로 소리 내어 읽다 멈칫하는데, 마침 다과를 들려던 태자가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대체 이게 무슨.”

태자가 서신을 받았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겉면을 응시했다. 표정이 범상치 않음을 넘어서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자가 곧바로 겉봉을 뜯으려 하자 홍의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전하!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나 죽는다지 않습니까!”

그 말에 태자는 얼마 전 황가의 서고에서 읽었던 왕들의 설화를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정월보름날, 어느 동양의 왕이 길을 걷다 쥐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쥐가 사람의 말을 구사하며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였고, 왕은 신하를 대신 보냈다. 그러나 신하는 가던 도중에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리고 만다. 그때 연못 한 가운데에서 어느 노인이 나와 봉투를 건넨다. 겉봉에는 이와 마찬가지로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신하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고.”

태자는 눈시울을 좁히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왕은 차라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을 듯하여 열어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를 섬기던 일관이 말했지. 두 사람은 보통의 인간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반드시 열어 보셔야 한다고.”

홍의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보았다. 새하얀 종이에는 예상대로 사금갑(射琴匣)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금갑이란 거문고 갑을 쏘라는 뜻이 아닙니까? 당최 이게 무슨….”

태자는 얼마 전 여름 단장을 한답시고 본전을 갈아엎고 새로이 거문고 갑을 두었다. 가볍고 질 좋은 오동나무로 짠 그것은 의외로 태후전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평생 선물은커녕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던 냉랭한 노인네가 돌연히 온정을 나누려드니, 태자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아서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침전에 들인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자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병사를 소집하여 횃불을 밝혀라.”

수하들이 놀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태자궁을 경계하라.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도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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