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7화 (87/111)

#87

천지의 아우성과 함께 장마가 시작되었다. 격변하는 세상에선 야릇한 비린내가 흘러넘쳤다. 향긋했던 금성의 공기마저 물을 먹은 것처럼 갈수록 무겁고 습하게 가라앉았다.

수모인 태후뿐 아니라 향선을 둘씩이나 잃게 된 정통 사람들은 그제야 수세에 몰렸음을 인지하였다. 대궁 앞에는 병상에 누우신 황제를 알현하려는 정통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또한 황실을 향한 정통의 견제가 심해졌듯, 신통의 독선도 날로 박차를 가했다. 특히 다향원은 정치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체임과 동시에 잘난 부모의 전횡을 철저히 답습하려는 집단이었다. 이에 뜻있고 혈기 넘치는 무동들이 들고 일어나 신통의 악행을 고발하는 시위를 열거나 벽해의 제도를 비판하고 황족의 독단적 이면을 지적하는 벽서를 붙였고, 신통 향선들은 멋모르고 들까부는 이에겐 매가 약이라는 말을 들먹이면서 포획하듯 그들을 잡아들였다. 벽선각 뒤뜰에는 알몸으로 둥치에 묶여 굳은돌이나 말채찍에 얻어맞거나 끈끈한 가래침 세례를 맞는 사내들의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나비의 날갯짓 한번이 일으킨 아비규환의 파도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여론이 시나브로 기울었다. 황태자를 시해하려 했던 황태후와 그녀의 명을 이행하려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나함과 초탁의 역모는 차츰 동정론을 얻기 시작했다.

ㅡ어쩌면 황후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란, 어리석은 황태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아니었겠는가?

ㅡ그 허구한 날 타국의 사신과 의기투합하여 주색잡기에 빠진 파락호를 이르는가? 태후께오서 오죽 나라를 걱정하였으면 그토록 모질게 친손자를 시해하려 하셨을꼬!

그들은 한결같았다. 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 대어 자기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억지로 혀를 놀렸고 그를 정답이라 믿었다. 그토록 끊임없는 견강부회가 갈수록 태자를 고립시켰고, 가뜩이나 드물게 열리던 말문이 더욱 사로잠기고 식사량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현재 그는 죽음과 생존의 경계에 서 있다. 기미 시녀를 둘씩이나 두고도 쉬이 어선(御膳, 임금의 음식) 들기를 꺼렸고, 황후는 아들의 주변에 보다 많은 병사를 연환처럼 줄줄이 붙였다. 가벼운 운신에도 수행인이 전후좌우를 막고 따라붙었으며 매순간 낯선 자들의 송곳 같은 시선이 공기 대신 꾸역꾸역 숫구멍을 파고들었다.

‘삼라만상을 발아래 두어 막비왕신에 만인지상이라 하였나. 허나 죽이지 않으면 죽고 만다는 이치가 전장의 삶과 다를 바 무엇인가.’

냉골처럼 시린 그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겪으며, 홍의도 점차 알 수 없는 자괴와 무력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음울한 고립이었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흠뜯고 꼬집었는데, 개중 가장 많은 사람이 들먹이고 집요히 파고드는 건수는 아무래도 태자가 남색을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홍의는 이러한 파란의 와중에도 태자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짐만 지우고 있는 제 처지가 몹시 군색하고 한스럽게 느껴졌다.

오히려 태자는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가끔은 지나가는 잔바람을 대하듯 무심히 읊조리기도 했다.

“노여워 말아. 모두가 삶이 힘겨워 그러는 거니까. 짧거나 길거나 풍족하거나 빈곤한 삶이 언제나 하나의 모양으로 아쉽고 서럽듯, 자신의 고달픈 운명을 잠시라도 잊고자 필사적으로 남의 운명을 헐뜯는 것이지. 삼계(三界)에서 말하는 분단생사, 누구나 업보에 따라 목숨의 길고 짧음과 삶의 길흉화복이 미리 내정되어 있다는… 그토록 잔인하고 모진 생의 속성을.”

불볕에 시달린 땅이 절절 끓었다. 궁원 곳곳에 새하얗게 흐드러졌던 팥배나무 꽃도 모두 졌다. 두 사람은 잠시 더위를 잊고자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가 실개울 같은 운하 앞을 서성였다. 차양을 들고 따라붙는 수행인들의 눈이 거북스러워 차마 내밀지 못한 홍의의 손을, 태자는 가만히 맞쥐었다.

“전하께오선 이토록 신금이 복잡할 때면 무엇으로 쓴 속을 달래셨습니까? 예부터 전하를 가장 위로하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홍의의 질문에 태자는 담담히 답한다.

“우물 속.”

“우물… 속이요?”

우물 속에는 바람이 못 든다. 어둠도 햇살도 나뭇잎도 빨아들여 그저 조용히 머금고 있을 뿐이다. 하여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태자는 걸음을 옮기어 후원을 막은 담장 아래로 향했다. 동행하던 홍의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다. 검둥개 막사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자투리 공간, 지금은 뚜껑을 닫아두고 사용하지 않는 작고 오래된 우물이 놓여 있었다.

삼나무로 지붕을 삼은 우물을 천천히 겨눠보던 홍의가 아, 하고 단말마의 소리를 내었다.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우물이었다.

***

십오 년 전.

여섯 살의 태자는 우물 앞에 멈추어 까치발을 들고 그 깊고 어두운 우물 속을 내려다보았다.

우물 속에는 커다란 원숭이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죽어 있었다. 하릴없이 우물 속을 내려다보는 여린 뺨에 피가 흘렀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풀밭으로 똑똑 곤두박질쳤다. 예국에서 조공으로 보내온 저 원숭이는 사납기가 이를 데 없어, 아무러한 보살핌에도 궁사람 모두에게 이를 드러내거나 손톱을 세우곤 하였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그때 아직 소녀였던 옥지가 달려와 태자의 옥체를 살폈다. 태자는 짧고 새하얀 손가락을 들어 우물 속을 가리켰다. 보얀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빠져 죽었어.’

‘예?’

‘문을 열어 주었더니… 나를 할퀴고… 달아났단 말이야.’

궁인들이 헐레벌떡 횃불을 들고 달려와 우물 속을 비추어 보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옥지는 서둘러 태자를 끌어안고 놀랐을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리고 얄캉한 몸이 오르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전하, 많이 놀라셨지요.’ 쿵쿵 뛰는 옥지의 심장이 태자의 머리맡을 울렸다. 이후 침전으로 돌아온 태자는 그날로부터 앓아누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원숭이의 모습은 계속해서 악몽으로 나타났다.

‘아니야.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너를 해하려던 게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태자는 감긴 눈으로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읊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꿈속에서도 원숭이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태자의 몸과 마음을 할퀴었다. 외로워서 그리하였다. 친구가 되고 싶어 철창문을 열어 주었다. 그게 다였다.

‘너도 내 눈이 무섭고 싫었던 거니?’

태자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면경 속 자신에게 맞춘 채 슬피 물었다. 면경 속에 들어앉은 원숭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태자는 먹어도 먹어도 살이 붙지 않은 체질이었다. 깡마른 몸피는 희다 못해 창백했으며, 절기가 바뀔 때마다 당연한 치레처럼 갖가지 질병을 앓았다. 본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음식과 옷과 집뿐만이 아니다. 더위와 추위와 햇살과 비와 바람과 구름이 산천초목을 어르고 짐승을 기르니,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그늘에 가둬 기르는 짐승은 연약하고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바깥이 그리웠다. 사람이 궁금했다. 치덕거리는 면사 없이 햇빛을 맞고 바람을 쐬고 풀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느 쨍한 한낮, 태자는 침전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옥지가 놀라 쫓았다. 작고 뽀얀 맨발로 뜰을 밟자 이곳저곳에서 궁인들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궁인들의 손아귀를 피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무를 기어올랐다.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에 여린 발바닥이 까지고 손바닥도 사정없이 긁혔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그나마 굵고 단단해 보이는 가지를 디뎠다. 이제는 아래에서 곡소리가 나고 있었다.

다섯 살배기 철모르쟁이가 자살을 꾀했다는 사실을 세상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황위에 오르도록 내정되었다던 존귀한 황태자 전하께서, 만인의 보살핌과 축복 속에 자라난 고귀한 분께서, 이토록 어린 삶에 차라리 죽고파 하는 염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하려는가? 아무도 이 외돌토리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알게 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담장 밖의 세상은 너르고도 아름다웠다. 바깥세상을 향해 선 보드라운 목덜미가 가쁜 숨으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하지만 이내 다시 슬퍼진다. 작고 여린 가슴속이 아프도록 옥아 든다. 저 너머에 자리한 세상조차 지금 여기 조금 더 넓은 또 하나의 옥사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담장 너머, 또 너머, 어딘지 모를 탁 트인 곳에 태자 또래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칼싸움을 하고 땅따먹기를 하고 비사치기를 하며 즐거이 놀고 있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태자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미웠다. 모두가 미웠다. 태자가 씨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가지를 붙들고 있던 태자의 손등으로 작은 도롱뇽 한 마리가 타고 올랐다. 태자가 깜짝 놀라 휘청거렸고, 다음 순간 몸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침 아래에 병사들이 모여 이불보를 펴들고 대기 중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로 죽을 뻔한 것이다.

화가 난 태자는 부축하는 시비들을 밀어내고 바닥에 나뒹구는 도롱뇽을 붙잡았다. 까만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는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 찧어 버렸다.

태자가 원숭이 사건 이후로 자꾸만 악몽을 꾸고 기행을 일삼는다는 말을 전해 들은 황후는 깊은 수심에 잠겼다. 고심 끝에 혈통 있는 검둥개 새끼 두 마리를 구해 와 태자의 품에 안겨 주었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있듯, 원숭이는 개를 두려워하고 싫어하여 알아서 피하는 법이란다. 이제는 꿈에 무서운 원숭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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