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8화 (88/111)

#88

태자는 물끄러미 강아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물러섰다. 강아지들은 다가왔다. 태자가 달아났다. 강아지들은 쫓아왔고, 발로 밀면 발을 핥았다. 무심코 내린 손도 핥았다.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쳤고 화를 내면 배를 드러내었다. 주저앉으면 아예 무릎을 타고 올라앉았다.

태자는 까맣고도 순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다 그 툭 불거진 강아지의 눈시울에 집게손가락을 가져갔다. 이들조차 검은 눈동자였다. 이들의 눈을 뽑아 자신의 눈에 넣고 싶었다. 그런데 강아지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그러마하듯 눈을 감고 코를 내밀었다. 태자가 멈칫하였다. 따뜻하고 무른 혓바닥이 손끝을 핥았다. 태자의 맘속에 어렸던 적의와 분노의 가시가 마르고 닳도록 핥아 주었다. 어린 짐승들의 목덜미에서는 비리고도 텁텁한 흙냄새가 났다. 두 눈을 감고 그들의 털에 가만히 코를 묻었다.

“너희들도 이런 기분을 아느냐? 외롭고도 외로워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기분을 아느냐?”

강아지들은 대답이 없었다. 폭 한숨을 내쉰 태자는 풀밭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차츰 태자의 악몽은 사라졌으나, 꼬리를 물 듯 새로운 병이 생겨났다.

몽유병이었다.

태자는 침전까지 검둥개를 들여 한 침상에 잠이 들어도 새벽이면 자리를 헤치고 나와 뜰을 빙빙 돌다가 자꾸만 후원으로, 그 우물을 향하여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린아이가 흐느껴 우는 소리라고 했다. 환청을 들을 만큼 악화된 아들을 지켜보며 황후는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우물을 단단히 봉하고 병사들을 첩첩이 세웠다.

신녀들이 잠든 태자의 얼굴에 흉측한 도깨비 가면을 씌웠다. 잡귀를 쫓는 향을 피우고 액운을 막는 부적을 붙이고 밤새도록 곁을 지키며 염불을 외웠다. 또래의 아이와 어우러지게 하라는 대사의 충고를 받들어 붙임성이 좋고 활달한 해운을 가끔 태자궁에 보내어 한데 놀게끔 하였다. 또한 태자의 외로움을 달래고 신통의 위치도 공고히 하리라는 심산으로 정통의 반대를 무릅쓰고 막내딸 준명을 태자비로 봉했다. 그렇게 황후는 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허황한 바람이었다. 태자는 만인의 사랑을 담뿍 받고 응석받이로 자란 해운이나, 언제나 자신을 낮잡고 발 아래로 두려는 사납고 오만방자한 태자비 준명을 볼 때면 더욱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곤 했으니까.

애초에 서로를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할 관계였다. 그리하여 그들 형제남매는 언제나 서로의 흉금을 할퀴고 악착같이 상처 입혔다. 빛도 들지 않고 바람도 들지 않는, 그저 차갑고 어두운 우물 속 같은 어미의 치마폭 아래서.

***

준명궁 시녀 효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안 그래도 움펑한 두 눈이 한 치는 푹 꺼져 있었다.

“효금아.”

“예, 마마.”

“왜 그렇게 떨어.”

“송구하옵니다, 마마.”

“송구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마.”

“송구… 흡….”

“응? 우느냐?”

“아니옵니다, 마마!”

“아니면 힘들어서 그러느냐?”

“아니옵니다!”

시비들은 내실 바닥에 엎드려뻗친 채로 앙상한 팔을 부들부들 떨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마마, 저언혀 힘들지 않사옵니다!”

“…그래?”

의외라는 듯 커다란 두 눈을 찬찬히 깜빡이던 태자비가 곧 활짝 웃었다.

“하면 뒷짐을 지렴.”

“…예?”

어느덧 태자비의 만면에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지라고. 뒷짐.”

결국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다 같이 일사불란 정수리를 바닥에 처박고 뒷짐을 지는데, 개중 체력이 가장 약한 시비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옆자리의 효금을 밀며 쓰러졌다. 그에 태자비궁의 시비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차례차례 모로 자빠지는 진풍경이 그려진다.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던 태자비가 별안간 드세게 육성으로 외치며 일어섰다.

“이년들이 빠져 가지고!”

아침부터 독이 깨졌다. 연회 때 걸치시게 고이고이 장만한 최신 유행 나래 옷더러 넝마가 따로 없다며 일차 발작을 하시더니, 벽해 최고의 장인이 한 올 한 올 꿰어 붙인 가체더러 방석이냐며 패대기를 치시고,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패물함을 뒤집어엎고 능라를 쫙쫙 찢다가, 아직 자빠진 채 훌쩍이고 있는 시비를 향해 너는 생긴 것이 마음에 안 든다며 누구 맘대로 이렇게 태어났느냐고 마구발방을 하시는데….

‘저 저, 댓바람부터 이리 쑤시고 저리 후비며 용천지랄을 해 대는 꼴이라니, 영락없이 쥐 잡는 날 댑싸리비 들고 설치는 아낙이지 뭐야?’

효금은 소란한 와중 남몰래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눈을 잠시 감았다. 글피쯤이면 태자비 마마께서 월경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오늘로부터 향후 이레간 계속 쥐를 잡으실 거라는 얘기다.

“이 한심한 년들! 물고를 내도 시원찮을 년들! 다 썩어 빠진 허수아비도 하등 밥이나 축내는 네년들보다야 쓸모가 있을 테지! 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지란 말이야!”

우메기가 든 찬합을 효금의 머리통에 명중시키는 것으로 오늘의 발작이 멎었다. 효금은 찬합을 모자처럼 뒤집어쓴 채로 나머지 시녀들을 이끌고 재빨리 내실 문을 나섰다.

“화, 황후 마마!”

“…….”

살쾡이 피해 나섰다가 호랑이 맞닥뜨린 격이었다. 태자비만큼이나, 아니, 태자비보다 곱절은 더 두려운 황후가 서슬 퍼런 안광을 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가뜩이나 찬합에 얻어맞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효금은 결국 오금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태자궁의 시녀들이 자주 바뀐다는 소문은, 태자비궁의 실태가 와전된 것이었다.

이토록 무자비하고 사나운 태자비의 언행은 황족의 체면을 한참이나 실추시키고도 남았다. 그러나 황후에게 있어 태자비는 며느리이기 이전에 하나뿐인 고명딸이었다. 태자비가 부리는 지독한 염세증은 잊어버린 줄 알았던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다. 황후 역시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분풀이를 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시비를 걸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하지 않고서는 삶을 견뎌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딸의 삶을 송두리째 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동정심은 여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주고 싶다는 맹목적인 바람으로 표출되었다.

“이리 화창한데 어찌 내실에만 붙박여 있느냐? 궁원으로 나가 꽃도 가꾸고 새로 들여온 차도 맛보지 않고.”

태자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고양이처럼 안 그래도 마른 몸을 빈틈없이 꼭꼭 옹송그린 채 지게문 앞에 앉아 있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태자와 태자비는 성정은 극과 극인데, 일상적인 몸짓이나 자세가 무척 닮아 있었다. 딸을 가만히 응시하던 황후가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거운 가체를 벗었다.

“아가. 이리 와 보련.”

물끄러미 그런 어미를 바라보던 태자비는, 무표정한 채 다가와 황후의 옆에 걸터앉았다. 황후는 짐짓 다정스럽게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다 각종 장신구가 든 패물함을 열어 놓고 촘촘한 옥 빗을 꺼내들었다.

“우리 딸따니가 벗이 고파 그런 것이지?”

숱이 많고 결이 좋아 버드나무처럼 풍성하게 흐드러져 내리는 딸의 머리카락을 보려니 제 손으로 빚어 낸 작품인 양 흡족하기만 하다. 황후는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드리운 채 부드럽게 딸의 머리칼을 쥐고 끄트머리부터 촘촘하게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서로와 이로가 내일 중으로 들를 예정이란다. 또, 올 여름부터는 주기적으로 신통의 규수들을 궁으로 불러 예악을 가르칠 것이다. 네 또래의 계집아이들도 두엇 있으니 함께 궁원의 꽃을 가꾸며 우애를 도모하기에도 아주 맞춤할 게다.”

“…….”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어미의 잃어버린 세월과도 같단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야.”

그 말에 태자비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청유를 가고 싶어요.”

그러나 태자비의 대답은 황후가 원하던 바와 영 동떨어져 있었다. 일순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이 어미가 거듭 말하지 않았느냐? 청유는 태자와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고.”

태자비는 울컥하여 잠시 숨을 멈췄다. 배꼽노리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화증을 내리누르려는 듯 눈을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싫습니다.”

“…….”

“싫습니다….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다고요!”

“…….”

“전하도 저도 서로 벌레 보듯 싫어하고 피하는데 어찌 함께 나들이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정녕 즐거운 동행이겠습니까? 또한, 사내 따위와 붙어먹느라 정비는 안중에도 없는 그 자와, 대체 제가 어찌…!”

황후의 검은 눈동자에 선뜩한 살기가 스쳤다.

“허면 관을 내려놓고 유궁에 갇히겠느냐?”

“…어머니.”

“너를 폐하려면 그에 준하는 명분을 만들어야 하고, 명분에 의거한다면 폐위된 비는 유궁에 갇히거나 유배지로 쫓기거나 둘 중 하나를 행해야만 한다. 국모의 위라는 것이 쥐새끼 쏠라닥질하듯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자리인 줄 알았더냐?”

태자비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공포에 사로잡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딸을 보면서도 황후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새빨간 입귀에 잔혹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넌짓 들어 겁먹은 딸의 뺨을 쓸어내리기까지 하였다.

“네가 아직 어려 지금은 그저 지기 싫은 마음에 태자를 업신여기고 멀리하는 것이지만, 너덧 살만 나이 들어 보면 굳이 너희 둘을 짝지은 이 어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래, 태자의 괴이한 행실에 마음고생하는 너를 왜 모르겠느냐마는, 어찌하겠느냐? 본디 부부 싸움이란 칼로 물 베기인 것을.”

말을 마친 황후는 내내 문설주 앞에 서 있던 수하를 향해 눈짓하였다. 수하는 곧바로 값비싼 향분과 사내를 사로잡는 미태술과 감창법 등이 적힌 방중비록을 내려놓았다.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 시선을 돌려 버린 태자비의 뺨으로 분노와 서러움이 뒤엉킨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여염의 여인이 아닌 일국의 태자비로서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하루 빨리 후사를 잇도록 하라. 그리하면 이 어미가 가진 복록이 모두 너의 것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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