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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돌아간 후, 태자비는 아끼던 화병을 바닥에 던져 깨트리고는 그 조각을 주워 자신의 여린 목을 찌르려 하였다.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시비들이 기함을 하며 달려와 양팔에 매달렸다. 화병 조각을 쥔 여린 손아귀에서 새빨간 핏물이 뚝뚝 흘렀다. 시비들이 마구발방하며 말려 보아도 태자비의 악다구니는 더해만 갔다.
“이거 놔라! 당장 놓지 않으면 네년들의 목부터 부러뜨려 줄 것이야!”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마마, 이러다 정말 경치십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소서!”
시비들은 혼비백산하여 악을 쓰며 울었다. 효금은 제 발바닥에 유리가 박혀 드는 줄도 모르고 상전을 말리느라 젖 먹던 힘까지 쓰고 있었다. 태자비는 아름다운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린 채 쓰디쓴 헛웃음을 흘렸다.
“효금아, 경을 친다고…? 경을 친다 하였느냐?”
“마마….”
“이미 내 인생 자체가 경을 쳤으니 새삼 두려울 것도 없구나. 태자비이면 무얼 하느냐? 괴물의 아내가 되어 구중 담장에 갇힌 처지가 호화스런 옥살이와 다를 게 무엇이더냐?”
폐방이 되다시피 한 준명궁에 파묻혀 변변찮은 벗조차 없이 십수 년을 살았다. 가끔 해운과 잉첩들이 찾아와 담 밖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드문드문 전달해 주지만 그조차 한계가 있었다. 태자비는 세상만사 모든 게 싫기만 하다는 깊은 염세증을 앓고 있었다.
‘네 낭군이 될 태자는 말이야…. 사실 무시무시한 도깨비야!’
어릴 적 가례를 올리기 직전에 오라비 해운에게 무척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태자비가 울음을 터뜨렸고, 해운은 말꾸러기 짓을 했다며 대윤과 황후에게 크게 혼쭐이 났지만 그렇다고 이미 내정된 가례가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가례는 성대했다. 아리땁고 깜찍한 꼬마 부부의 소꿉을 구경하듯 관민의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단풍잎 같은 손바닥을 꼭꼭 맞쥐고 금성을 총총 가로지르면 덕담과 찬양이 끊이지 않고 따라붙었다. 무거운 큰머리에 여린 모가지가 휘청거리고 머리 거죽이 다 얼얼한 채로 어린 태자비는 억지로 씽글씽글 웃었다. 앞도 잘 안 보이는 면사에 면류관에 사모관대를 주렁주렁 매단 채 태자는 자신의 아내가 된 여동생을 묵묵히 이끌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황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닌 후, 처음으로 태자비궁에서 태자와 태자비가 단둘이 겸상을 하던 날이었다.
어린 태자는 시비의 도움으로 더듬더듬 어설픈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태자비는 가쁜 숨소리를 감추며 입을 꼭 다물었다. 태자가 깨 입힌 닭 강정을 하나 집어서 태자비의 소보록한 밥 위에 수줍게 얹어 주었다. 곁을 지키던 시비들이 그 깜찍한 일별이 놀랍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여 마주 웃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태자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태자비는 제 앞에 놓인 밥그릇을 거칠게 쳐 내 버렸다.
‘더러워!’
새처럼 높은 음성이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 놓았다. 금색 유기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닭 강정과 밥알들이 태자의 폐슬 위로 굴러 떨어졌다.
‘더러워! 더러워! 너는 징그럽단 말이야!!’
태자비는 목이 다 새도록 바락바락 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밖을 지키던 시비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우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인 태자비를 안아 올렸다. 무릎 가리개에 놓인 태자의 작은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쥐였다 펴졌다.
‘쟤 얼굴에, 구더기가 잔뜩 있댔어!’
태자비는 새빨개진 얼굴로 악을 질렀다. 울음과 뒤섞여 발음이 뭉개졌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황한 시비 하나가 태자의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눌러 막았다. 면사 안쪽의 태자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끈뜨끈하였다. 면사가 제멋대로 펄럭이는 것이 호흡도 가쁜 것 같았다.
‘해운 오라버니랑 사염 오라버니가 그랬단 말이야! 저 애 뺨이랑 이마에, 연근 뿌리 같은 구멍이 바글바글한데, 거기에서 벌레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오면, 그러면 그걸 잡아먹는다고! 아아아악… 꺄아아악!’
비명처럼 소리치던 태자비는 결국 혼절하였다. 그때 태자비가 여섯 살, 태자는 일곱 살이었다.
***
몇 날 며칠 목숨을 걸고 외줄을 타듯 준명궁 주변을 얼씬거리면서 이 같은 사실을 알아낸 새옹은, 나뭇가지에 얼굴을 가린 채로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가엾은 분이다.’
태자비는 수라를 들거나 서책을 보거나 할 때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 기둥에 기대어 지게문 밖 후원을 내다보며 보냈다. 여름이 성큼 여물어 무성한 초록에 가린 꽃조차 뜸한 곳을, 그토록 하염없이 말이다. 멀리서 그녀를 응시하는 새옹의 표정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찢어진 손바닥을 시비들이 천을 감싸 지혈해 주었지만 겅더리된 마음마저 시료해 줄 수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가끔씩 너무 답답해 숨을 쉴 수 없다는 듯 가슴을 줴뜯었다. 미친년 널뛰듯 발광을 할 때도 있었고, 소리를 지를 때도 있었다. 마치 좁은 관속에 갇힌 사람 같았다. 지켜보는 새옹조차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얼마 전에는 치마를 엮어 목을 매려고도 하였다. 못 속에 몸을 던져 버리려고도 하였다. 지켜보던 새옹은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가 모든 일을 들키고 허사로 만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구슬꿰미처럼 시비들이 달라붙어 전후좌우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녀는 임의대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신세였다.
그것이 정녕, 이 나라의 태자비였다.
“…….”
“…….”
설명을 마친 새옹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올렸다.
듣고 있다는 뜻으로 이따금 고개만을 한 번씩 까딱일 뿐, 홍의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등진 채 묵묵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비 마마는 외로운 여인입니다. 너른 금성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태자 전하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까운 목란골이나 남천가로 나들이를 가는 것조차 허락지 않으시니까요. 앓느니 죽으리라고, 눈 딱 감고 태자를 찾아가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려 했다는군요. 용서를 빌고 애정을 구걸하여 소박한 바깥구경이나마 함께할 수 있도록 조르려고 했다고요.”
하지만 태자비는 여전히 태자를 만나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태자의 거무튀튀한 면사를 보면 울꺽 욕지기부터 올라왔고, 음울한 음성을 들으면 가슴속부터 불같은 짜증이 솟구친다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태자비는 태자를 사랑하지 않고, 태자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의 인생을 망친 증오스러운 사내여도, 그래도 남편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전하의 물건이 신통치 않아 지밀간이 원활치 않다고 변명을 댈 수 있었지만, 전하께서 주군과 합일에 성공한 지금, 더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셨겠지요. 그러하니 주군께도 그토록 사납게 으름장을 놓으신 터고요.”
높은 궁벽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던 곳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태자와 홍의가 자유로이 말을 달리고 검무를 익히고 사부랑삽작 세상 구경을 다닐 때, 여인은 투명한 눈물을 머금은 채 너털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태자와 홍의가 서로 은애의 말을 속달거릴 때, 지게문 안에 갇혀 늘 같은 모양과 같은 냄새를 한 지겨운 뜨락을 내다보며 오늘도 걸음하지 않는 그 사내를 막연히 원망했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워 더욱 슬펐을 터였다.
새옹이 묵묵히 덧붙였다.
“어쨌거나 선택은 주군의 몫입니다. 본디 천자와 통하는 일에는 어지간한 희비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다만 더는 사리에 맞지 않는 행보로 뭇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만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 저 주군 욕먹는 거 싫습니다. 제가 못 견디겠다고요.”
홍의는 그저 물끄러미 연못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이 뒤엉킨 머릿속처럼 휘몰아 드는 살여울이 아찔하였다.
***
공작재(孔雀齋)가 열렸다. 불교의 밀교에서 공작명왕을 본존으로 삼아 재앙을 눅이고 병마를 덜고 목숨을 오래 살게 하도록 기원하는 재였다. 하지만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정성에도 황제의 병환은 깊어졌고, 백성들의 근심도 날로 더해만 갔다.
황후는 문무백관이 모인 재소(齋所)에 도장을 찍듯 의례적으로 존모를 비추고 나면 수순처럼 황후궁 뒤편으로 건너가곤 했다. 그곳엔 황후의 어미인 순명의 신주를 모셔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음식과 술로 다정히 축물을 하고 정성스레 향을 피우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 재잘재잘 살갑게 수다를 놓았다.
“어머니,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우리 신통은 어떤 가문도 견줄 수 없는 세도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였답니다. 더는 누구에게도 씨받이가문이라 멸시당하지 않아요.”
사당의 벽면에는 버들가지를 쥔 순명이 연꽃 모양의 대좌 위 커다란 광배를 찬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버들가지로 바람을 일으켜 중생들의 소원을 이뤄준다는 양류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었는데, 명계에 닿은 어머니가 안식을 찾고 열반에 이르길 바라는 딸의 간절한 바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공작재는 잘 마쳤느냐.”
막 배례의식을 마쳤을 무렵, 문득 울리는 인기척에 황후는 살짝 고개를 틀고 읊조렸다. 면사를 드리운 태자가 사당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찌 이곳에 명하셨습니까.”
태자는 요즘 공작재가 열릴 때마다 이 신당을 찾는 황후를 알고 있었다. 만백성이 황제의 쾌차를 기원할 때 황후는 홀로 이곳에서 무엇을 비손하고 있었을까. 향냄새가 자못 역겨워 태자는 조용히 어금니를 물었다.
“네 여직 외할머니를 제대로 뵌 적이 없지 않으냐. 자, 인사를 올려라.”
태자는 잠자코 초상화를 향해 읍을 올리고 수조에 떠 있던 작은 연꽃을 건져 바쳤다.
“살아계셨다면.”
황후가 운을 떼며 머리를 젖혀 자신의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너를 참 귀애하고 아껴주셨을 게다. 몹시 정 많고 무른 양반이었거든.”
태자는 문득 황후가 들고 있는 염주를 보았다. 까만 흑요석으로 짠 그것은 외할머니 순명의 유품으로, 황후가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고 지니고 다니며 마음의 파문이 일 때마다 굴리는 버릇이 있었다.
“…살아계셨다면요.”
태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전제군요.”
“그래, 슬프고도 애석한 전제지.”
모자는 잠시 말을 끊고 묵묵히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태자가 금관을 벗어 면사를 내렸다. 상아처럼 흰 얼굴과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황후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면사를 벗은 작태가 거슬려 살짝 혀를 끌었다.
이 눈을 보았어도 외할미는 손자를 귀애하였을까. 태자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슬프지도 애석하지도 않았다. 슬슬 향을 끄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 황후를 향해, 태자가 불쑥 물었다.
“왜 그 사람을 살해했습니까?”
“…….”
태자는 진정 궁금했다. 죽은 어미를 그리워하여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침수에 들 때마다 염주를 손에 꼭 쥐고 잠드는 당신이, 어찌하여 자기 자식들에게는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딸그락. 황후가 들고 있던 단지 뚜껑을 떨어트렸다.
모자의 시선이 짙게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