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14년 전.
황제의 탄신연이 열린 쌀쌀한 춘분날 밤이었다. 모든 시비들은 연회 준비를 돕기 위해 대궁으로 불려갔고, 태자궁은 고요했다.
몽유를 앓는 태자는 몽중설몽과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침상을 벗어났다. 작은 얼굴에 씌워 둔 도깨비 가면이 사선으로 반쯤 흘러내려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무의식이었다. 활짝 열린 지게문을 넘어 태자는 조용히 풀잎을 밟았다. 하필이면 옥지는 정화수를 새로 뜨러 침전을 비운 상태였고, 화경은 야식을 들러, 둘레를 지키던 위병들은 번 교체를 위하여 집무실로 향한 참이었다.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 나무창을 바닥에 찧은 채 거기에 몸을 지탱하여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 병사의 허리께를 태자의 머리통이 유유히 지나쳐갔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태자는 희미하게 속삭였다. 원숭이는 언제나처럼 앞서 걷다가 가끔 멈춰 서서 태자를 돌아보았는데,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평시처럼 우물로 들어가려던 원숭이가 웬일인지, 후원을 막은 꽃담으로 향했다. 그리고 담장의 밑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번쩍 정신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모든 것이 새카만 암흑이었다. 태자는 깜짝 놀라 턱 언저리에서 흔들거리는 도깨비 가면을 치우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원숭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밤의 어둠 속에 오롯이 태자 혼자뿐이었다. 온몸에 아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태자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원숭이가 섰던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벽에 쥐구멍 같은 것이 조그맣게 나 있었는데, 주변으로 균열이 심했다. 툭툭 건드리자, 와르르 부서졌다. 곧이어 흙먼지가 걷히고 개 한 마리 지나다닐 만큼의 통로가 생겼다. 태자는 지체 없이 그곳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곳은 일찍이 폐궁되어 대부분의 건물을 허문 벽해의 시조 진성 황제의 별채가 있던 곳이었다.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거의 버리다시피 방치한 궁터는 백 년이 넘도록 돌보지 않아 잡풀이 무성하였다. 반쯤 기운 본전만이 그 수풀 속에 덩그마니 놓여 썩은 기둥과 내려앉은 처마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려워진 태자는 이제 그만 발길을 돌려 태자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였다.
‘으으으으. 흐으으으.’
본전 쪽에서 알 수 없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그 울음소리였다.
태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리는 끊어질 듯 말 듯 가늘게, 계속해서 들려왔다.
‘빌어먹을 그만 좀 빽빽거려, 이 병신 꼽추 새끼야!’
돌연히 울리는 걸걸한 사내의 고성에 태자는 기둥을 붙들고 멈추었다. 확실했다. 본전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태자는 이를 악물고 주춤주춤 마루를 밟고 복도에 들어섰다. 어두운 가운데 희미하게 호롱불이 새어 나오는 곳을 내실로 향하니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문짝이 나타났다. 다 낡아 썩은 건물에 비해 그 문만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검은 옻칠이 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렸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여린 몸을 파고들었다.
절그럭절그럭. 쇠사슬로 무언가 잠그는 소리가 났다.
‘이 말 안 듣는 곱등이 새끼, 한 번만 더 흥취를 깼다간 불벼락을 맞을 줄 알아!’
덩치가 크고 말투가 험궂은 옥졸은 덕지덕지 기운 무명옷을 입고 머리칼이 봉두난발했다. 항시 깨끗하고 정갈한 궁인들만 보아 온 태자는 온몸이 얽은 데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를 보고 몹시 놀라 기둥에 몸을 숨겼다.
그는 옥사에 갇힌 누군가를 향하여 침을 뱉고 욕설을 내뱉다가 이내 복도 끝에 놓인 의자에 가서 밑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숨어 있었을까. 억병을 비우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대던 옥졸은 이내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어 버렸다. 드르렁드르렁 코고는 소리도 요란했다.
호기심은 두려움을 이긴다. 태자는 이토록 비밀스러운 지하 옥사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궁금했다. 향선들의 설화집에서 본 것처럼 섬을 쑥대밭으로 만든 바다 괴물을 잡아서 민인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잡아 둔 것은 아닐까? 어찌하여 원숭이는 날더러 이곳으로 가라고 하였을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태자는 깨금발로 살금살금 옥졸을 지나쳐 쇠사슬로 문이 걸어 잠긴 옥사 쪽으로 갔다.
‘…….’
그곳에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은 없었다. 상상속의 어떤 죄수도 아니었다. 작은 침상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아이였다. 다만 희한한 것은 낙타처럼 등이 부풀어 있었다. 화로가 타닥타닥 타올랐다. 훈기에 비친 태자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태자는 저 멀리 옥졸의 상태를 한 번 살핀 다음, 아이를 향해 조용히 입을 떼었다.
‘안녕, 너는 누구야?’
아이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속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음성에 꿈틀거리며 반응한 아이가 천천히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달았다. 아이의 눈을 본 태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 또한 그러했다.
‘…너도 숭한 눈이구나. 그래서 갇혀 있는 거야?’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얼굴도 신세도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옥사 앞에 쪼그려 앉아 아기 새처럼 지저지저 종알대었다.
‘누가 너를 가두었니? 나는 이 나라 태자야. 내가 너를 꺼내 줄 수 있어. 내가 너를 꺼내 주면, 같이 까막잡기와 소꿉놀이와 칠교놀이를 할까? 사실 나도 갇혀 있는 신세와 다름없거든. 그리고 동무도 없고. 어머님이 우애 있게 지내라고 도경 사는 동복형을 자꾸 태자궁으로 보내는데, 그 아이는 나만 보면 무서워서 경기를 한단 말이야. 그 아이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야. 계집애가 아주 못됐어…. 그래서 나는 늘 궁인들과 칠교놀이를 하는데, 그들도 하나 같이 바보라 셈을 못 해서, 같이 하면 항시 내가 이기니 별 재미도 없다.’
‘…….’
“저기, 나는 검둥개를 키워. 앉으라면 앉고 손이라고 하면 손을 준다. 엄청 똘똘하고 귀여워. 다음에 같이 놀까?”
‘…….’
‘있지…… 있잖아. 우리 동무 할래?’
마지막 질문에 가만가만 듣기만 하던 아이의 입이 벙싯이 벌어졌다. 태자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태자 전하, 어디 계시옵니까!’
그때 바깥에서 사라진 태자를 찾는 시비들의 애타는 음성이 울렸다. 그에 졸고 있던 옥졸이 화들짝 헤떠 일어났다. 쪼그려 앉았던 태자도 깜짝 놀라 오뚝 섰다.
‘이 쥐새끼 같은 노옴! 누구냐!’
옥졸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옥사 안에서 기함하다 못해 발라당 뒤로 넘어간 아이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실도랑이 흘렀다. 태자는 자신을 향하여 성큼성큼 다가오는 커다란 야수의 작태에 놀라 뒷걸음을 쳤다.
‘멈추어라.’
카랑카랑 울리는 음성에 흠칫한 옥졸이 뒤를 돌아보았다. 수행인들 없이 무사 한 명을 대동한 황후가 등롱을 직접 비추며 계단참에 서 있었다.
***
낮이 아닌 밤, 칠 일에 딱 하루.
첫닭울이 전까지만 태자는 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황태자가 들락거리는 곳이라 더욱 깨끗이 소제하고 훈훈하게 데운 옥사 안에서 형제는 머리를 부대고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리고 칠교를 맞추거나 좁은 곳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다과를 나누어 먹었다.
‘그것이 어디 그냥 핏줄입니까? 영과 육의 반쪽인 쌍생아들을 태어나자마자 그토록 모지락스레 떼어 두었으니, 가뜩이나 연약한 태자 전하의 몸에 동티가 난 것이겠지요.’
가엾은 형제의 운명을 내내 안타까워했던 윤명은 이것이 정해진 순리라고 했다. 거스르면 더욱 큰 재액이 낄 것이라고. 아니라면 어린 태자가 무슨 재주로 그 깊은 허구렁에 아무도 몰래 가두어 둔 황자를 찾아냈겠는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하였다. 그런 윤명의 말에 일리를 두고 행하니, 놀랍게도 태자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도, 몽유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눈에 띄게 먹성이 좋아지고 창백하던 낯빛에 혈색이 돌고 아이답게 깔깔 웃을 줄도 알게 되었다.
‘아, 쌍, 시끄러워. 애새끼들 오지게도 떠들어 대네.’
쾅! 옥졸이 술병으로 탁상을 쳤다.
‘지미, 그리 놀란 다람쥐처럼 쳐다보면 어쩔 거야? 개 씹, 술맛 떨어지게.’
옥졸이 욕을 하면 아이는 곧바로 의기소침하여 목을 움츠렸다. 처음엔 화들짝 놀랐던 태자는 이내 그의 욕설이 익숙해졌고, 도리어 궁금해졌다.
‘개 씹이 무슨 뜻이야?’
‘아이고, 태자 나리. 개 씹이란 말이지요, 개 불알만도 못하다는 뜻입니다요. 왜요? 황후께 쪼르르 달려가 이르시게?’
귀가 탁 트이는 기분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태자가 이내 나지막이 개 씹, 하였다. 킁, 아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개 씹! 크게 소리치자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간다. 태자도 같이 구르며 웃었다.
‘좋단다, 애새끼들. 아주 지랄을 하세요.’
헛웃음 치던 옥졸은 씨근거리며 다시 술을 받아 왔다.
지하 유궁에서 이뤄지는 아이들의 밀회에 지켜보는 황후의 마음은 마냥 편편할 리 없었다. 황후에게 곱사등이 황자는 붉은 심장 깊숙이 박혀 든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피가 돌 때마다 고통과 괴롬에 몸부림치면서도 감히 두려워 뽑아낼 수 없는 매서운 칼날.
‘아직 날씨가 매우니 화로를 더 든든히 때라.’
‘아이가 잘 먹고 좋아라하는 것을 헤아려 기억했다가 보름마다 적어 올려라.’
‘…아이가 울면, 호통 치지 말고 안아 주어라. 순한 아이라 금방 그칠 게다.’
달에 한 번씩 유궁에 들를 때마다 황후는 옥졸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아이를 본답시고 옥살 가까이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혹여 정이 붙을까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아예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둘 수도 없었다. 죽일 수는… 더더욱 없었다. 황후는 이런 상황에조차 심약한 자기 자신이 치가 떨리게 미웠다. 태자를 보면 황자 생각이 더했고, 가둬 둔 아이에게 미안하여 말짱한 아이에게까지 모질게 굴었다.
꼭뒤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자식을 지하 유궁에 가두어 놓고 그나마 그녀가 말짱히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같잖은 희망 때문이었다. 태후가 쇠하고 정통이 붕괴되고 황제가 밀려나 태자가 황상에 오르는 날, 어쩌면 그날이 온다면 저 불온하고 가련한 아이를 이 사방이 막힌 곳에서 꺼내 줄 수 있다는 희망.
예국이든 어디든 사람 붙여 보내 한평생 낙락히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이 끔찍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나 그 희망도 오래가지 않았다.
금성에는 어린 태자가 도깨비불을 쫓아 밤나들이를 나선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게 시초가 되어 땅 속에 어지러이 얽혀 있던 비밀의 덩굴마저 주렁주렁 끌려 나올 터였다.
늦은 밤이었다. 황급히 태자궁을 찾은 황후는 다시 아이에게 간답시고 소맷부리에 단 것을 잔뜩 쟁이고 있던 태자의 양팔을 잡쥐고, 무섭도록 죄어치기 시작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유궁에 가서는 안 된다. 약조해라. 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약조해!’
‘하, 하오나, 어마마마, 그곳에는… 저와 꼭 닮은 아이가 있어요. 어마마마도 아시잖아요.’
‘너는 그간 꿈을 꾼 것이다. 귀신에 홀린 것이야. 혹 아직도 원숭이 꿈을 꾸느냐?’
‘이제 꾸지 않아요. 그 아이 덕분이에요. 그 아이를 제 궁으로 데려와 함께 동무하며 지내고 싶어요.’
‘…같은 눈깔 병신들끼리 벗하여 지내겠다고? 남들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이나 해 보았느냐? 너희들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