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91화 (91/111)

#91

황후는 지쳐 있었다. 한 아이는 가두고 나머지 아이는 면사를 씌워 자리를 지켰으나, 여전히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시시각각 황후를 죄어 왔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뜨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황가에서 불운의 징조로 여기는 쌍둥이를, 게다가 장애아를 낳았다는 사실을 태후에게 들킨다면 지금껏 힘들게 쌓은 입지가 단숨에 나락으로 허물 것임을 황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아예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삶의 이치가 새삼 사무치는 밤이었다.

어둠이 마땅할 깊은 밤, 희한하게 세상이 붉었다. 태자궁을 나서는 어린 태자의 소맷부리에는 황자가 좋아하는 곶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별궁에 불이 났다!’

‘물을 퍼 날라라! 태자궁까지 불이 번진다!’

태자궁의 후원을 막은 꽃담 뒤편,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산을 바라보던 태자의 힘없이 떨어진 소맷자락 사이에서 곶감들이 굴러떨어졌다.

‘전하! 전하, 별궁은 위험하옵니다,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저기 있어. 구해야 해.’

‘전하, 일단 피신하신 연후에….’

태자는 울지 않고 말했다.

‘약조를 했어. 언젠가 그곳에서 꺼내 주겠다고. 함께 담장 밖을 나가 말도 타고 화전놀이도 가고 물장구도 치기로…. 어마마마가 ‘너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지. 그 아이는 내 반쪽이야. 형제라구.’

불의 아수라는 별궁을 감싼 숲마저 탐욕스레 집어 삼켰다. 태자가 무른 손으로 정신없이 꽃담 아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어린 몸을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옥지가 울음을 터뜨린, 그때였다.

불길을 뚫고 새카맣게 탄 옥졸이 왜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화경이 황급히 달려가자 옥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무젖은 이불을 돌돌 말아 필사적으로 품고 있었다.

‘이 나라 태자라고 했지요? 내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시오.’

까맣게 그을린 옥졸의 뺨이 말할 때마다 쩍쩍 갈라져 검은 재를 날리며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그는 이불귀를 열어 품에 든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린 황자는 살 한 점 데이지 않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본래 망나니였소. 어릴 적부터 지랄맞게 나를 패던 아비를 돌로 쳐 죽였다가 사형수가 되었는데, 차라리 사람 죽이는 망나니가 되라며 도로 풀어 줍디다. 그렇게 수백의 목숨을 베어 내 목숨 연명했는데, 뭔 염병을 했다고 술 없이는 통 잠을 못 잤어.’

매운 연기를 너무 들이켜 목청이 아예 상한 듯, 탁한 쇳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내 여기로 적을 옮겨, 이제는 참말 사람 모가지 베는 일 안 해도 된다고 좋아했는데…. 그놈의 술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 게야. 하여 내 매일 술 처먹고 이 아이한테 사납게 굴었소. 매양 욕질하고, 호랑이한테나 물려 가라고 겁을 주었소.’

옥졸의 뺨으로 뜨거운 회한의 검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는 품의 황자를 화경에게 넘기고는 어린 태자를 향해 엎드렸다.

‘그 아이 좀 살려 주쇼. 그놈 병신 꼽추지만, 착한 아이요. 가여운 아이요. 풍광 좋은 청산으로 데려가 마음껏 뛰어놀게 해 주시오. 나를 그 곁에 묻어 주시오.’

옥졸은 모로 누워 한참을 헐떡이다 이내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그의 눈길은 죽어서도 아이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 사내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태자는, 그 순간 문득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원숭이의 두 눈을 떠올렸다.

화경이 뒷산에 묻어 두었던 원숭이의 백골을 찾아왔다.

‘꼬리와 손발을 잘라 별궁의 불길 속에 던져 넣어라.’

화경이 태자의 명에 따라 뼈마디를 나누니 과연 사람 아이의 백골 사체와 유사하였다. 그렇게 눈속임을 마치고 화경을 따르는 충직한 병사들로 하여금 아이를 남산 가장 깊숙한 곳에 숨기고 옥졸의 시체를 그 근처에 묻도록 하였다.

불길을 잡은 것은 오경이 다 되어서였다. 벽해의 시조인 대 진성 황제가 휴양을 즐겼다는 별궁은 황폐한 터만을 남긴 채 모든 것이 불타 깨끗이 사라졌다. 아침나절 소제를 위해 투입된 궁인 몇몇이 살피기에 웬 예닐곱쯤 되는 어린아이의 백골이 사방에 흩어져 나왔다고 하여, 이를 전해 들은 화소 태후는 불경스럽다며 나무를 새로 심어 터 자체를 가리라 하였다. 옥명 황후는 별궁의 터와 이어지는 오래된 태자궁의 꽃담을 부수고 더 높고 견고한 담장을 새로이 쌓았다. 그 뒤로 죽은 황자의 생각일랑 단 한순간도 하지 아니하였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황후는 면사가 달린 금관을 들고 어린 아들의 머리에 씌웠다. 씌울 때마다 아이의 머리는 자라, 어느덧 황후가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가 되었다.

“쓸데없는 죽음들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라.”

“…….”

너는 이 나라의 황태자고, 곧 황위에 올라 세상을 호령할 것이야.

허물을 덮듯 황후는 말했다. 태자는 어머니가 미웠다. 이리 악독한 어머니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 자신은 더더욱 미웠다. 죽어간 이들을 생각했다. 어디에도 마땅한 죽음은 없었다. 각자의 욕심, 이기심,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죽거나 죽여야만 하는 생리가 진절머리 났다.

“저는 살아 있는 것입니까?”

황후가 면사를 구기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금관을 바닥에 내던졌다. 거친 동작으로 인해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태자의 뺨에 생채기가 났다. 황후는 아들의 피를 손끝에 담았다.

“살아 있지. 그들의 죽음 덕에.”

태자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황후는 그런 아들의 얼굴이 싫었다. 갇혀 자란 짐승처럼 매양 옹송그리고 앉는 자세도, 비스듬히 처진 어깨도, 맞추지 않고 돌려 버리는 시선도, 불벼락에 쓸린 듯 황폐한 표정도, 하나부터 열까지 성에 차지 않았다. 한심한 아들은 용서할 수 없다. 유약한 황태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못난 것은 무시당한다. 약한 것은 짓밟힌다!

“…똑바로 서.”

황후는 태자의 양팔을 잡았다.

“어깨 펴. 고개 들고.”

돌리려는 턱을 억지로 잡아 고정했다.

“웃어.”

“…….”

“웃어 보렴, 아들아. 그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단다. 모든 나쁜 일이 없었던 것으로 사라지고 지금 웃고 있는 나만 남아.”

황후는 태자의 팔을 당겨 너른 품을 파고들었다. 태자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밀어내었다. 젊고 아름다운 아들의 허리를 끈질기게 잡죄는 악력에 용포가 구겨졌다.

“내가 어찌하여 근 이십 해가 넘도록 너에게 면사를 씌웠을까?”

태자가 멈칫했다.

“고작 고 숭한 눈알 때문에 이십 해가 넘는 긴 시간 동안 너의 얼굴을 가려 두었다 생각하느냐?”

황후가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혀 아들의 이마부터 콧대까지 손끝으로 쓸었다.

“만일 내 너의 면사를 장안의 광대에게 씌운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

태자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명심해라. 이 벽해에 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를 증명해 줄 사람은 오롯이 이 어미뿐이다.”

네놈은 아무것도 아니야.

***

사당을 나서자 홍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표정이 무거웠다. 태자는 어쩐지 안색이 푸르뎅뎅하게 질려서 꼭 화가 난 듯한 홍의를 보며 처음에는 저 아이가 왜 화가 났을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태자가 문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혔다.

홍의는 천천히 양팔을 열었다. 곁에 서 있던 궁인들이 모두 뒤돌아섰다. 태자가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홍의가 태자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태자 역시 그의 품에 몸을 밀었다. 한껏 고개 숙인 태자의 이마가 홍의의 어깨에 닿아 눌렸다. 태자는 깊게 숨을 쉬었다. 깊고도 뜨거운 한숨이 자꾸만 쏟아졌다.

그날 밤, 어두운 침전에 화촉 하나 밝혀 놓고 두 사내는 몸을 섞었다. 태자는 젖은 몸으로 끊임없이 홍의에게 파고들었다. 홍의는 어떠한 위로의 말이나 염려의 말도 건네지 않고 그저 뭉근히 그를 품었다. 태자는 아픈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홍의의 위에 스러졌다. 너른 어깨에 몸이 갇히어 홍의가 신음했다.

태자가 귓가에 속삭였다.

“…어두워.”

세상이 칠흑 같아.

너는 언제나 밝은 빛 아래 살았지. 너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사내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검은 어둠 속에서만 보아 왔거든. 그래서 널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눈이 부셨는지….

아, 저렇게 촛불이 흔들리는 걸 보면 위태위태해서 슬퍼. 꼭 내 신세 같잖아. 어머니가 변덕을 부리면 나는 곧이라도 세상에 없던 존재가 될 테니까. 사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 생각하면 아프니까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 누구든 그렇잖아. 다들 그렇게 아픈 것은 외면하며 살아가는 거야.

내게 무어가 가장 위로가 되느냐고 물었었지. 그건 네 눈이야. 네 눈동자는 우물물처럼 검고 깊어서 보고 있자면 언제고 마음이 놓여. 저기,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널 알아본 걸까? 넌 오롯한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지. 사랑이 없는 삶을 무시하고 사랑 없는 색사를 경멸하는 사내지. 그래서 우리는 꼭 같은 사람들이야.

그래, 난 네가 좋아. 네가 아니라면 누구도 싫어. 하지만 어머님은 내게 대를 이을 자식을 낳으라고, 수많은 여자를 품으라고 떠밀겠지. 그래야 자신의 자리가 더욱 확고해질 테니까.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면 나는 그 아이처럼 버려져서 유궁에 갇힐지도 몰라. 사실은 늘 두려웠어. 태어날 때부터 나는 무소불위라는 말과는 동떨어진 사람이었으니.

홍의야, 제발 내 손을 놓지 마.

너만은 날 가두려거나 감추려 하지 마. 그리고 언젠가 네가 말한 그곳…. 여기보다 너르고 높다는 그곳으로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여명의 푸른 동이 터왔다.

어둠이 걷히고 시리게 드러난 물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홍의는 묵묵히 그의 손을 끌어다가 가슴께에 꼭 쥐어 보았다.

홍의의 따스한 박동이 태자의 차가운 손등을 울렸다. 하릴없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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