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92화 (92/111)

#92

이튿날, 홍의는 황후의 부름에 답하여 황후궁에 당도하였다.

누에 오르자 다담상을 두고 황후와 앞서 차를 들고 있던 객이 있었다. 홍의는 옆자리에 앉은 해운의 검은 정복 깃을 흘깃거렸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직후 미함을 물리고 해운의 원주 취임을 거행할 예정이란다. 물론… 우리 홍의가 부제 향선을 맡아야겠지?”

홍의가 멈칫하여 황후를 응시하였다.

“또한 남부의 알토란 같은 땅 백 경, 각종 비단 단자와 은자 등을 문성 공에게 하사하기로 하였다. 그와 더불어 너를 내 휘하로 들여 훗날 원주뿐만 아니라 신통 가문의 작위를 내주려고 한다. 이를 어찌 생각하느냐?”

‘…황후의 휘하라.’

홍의는 실소할 뻔했다. 금성에서는 이러한 제안이 무엇을 뜻하던가? 결국은 그녀의 색신이 되어 몸으로서 봉사하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홍의의 안색이 나빠졌다. 탁상 밑으로 감춘 양 주먹에도 슬슬 핏기가 가셨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대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이를 잊은 미모로 세상을 호령할 뿐만 아니라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인이기 이전에 그녀는 태자의 어머니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울컥 거위침이 돌며 욕지기가 올라왔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혹 서운한 부분이 있는 것이냐?”

황후가 넌지시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옆자리에 앉은 해운에게서 흠, 하고 아주 작은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홍의는 일순 휘청 흐너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윽고 검고 깊은 홍의의 눈동자가 똑바로 황후를 마주 보았다.

“좋아서 한 일에 논공행상을 바라겠사옵니까. 다만 황후 마마께서 사랑으로 내리시는 마음의 선물을 거부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하사하신 품목들은 저희 무동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소인은 본디 권력에 탐심이 없으니, 황후 마마의 은혜를 입어 원주에 오르리라는 하교는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황후가 문득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그리 답할 줄 알았느니라. 듣자하니 홍의 너는 여인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고 오롯이 사내만 좋아하여 흥분하는 취향을 지녔다지?”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까. 짚이는 곳이 바로 옆에 있어서 홍의는 해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해운은 입 모양만으로 뭐, 하였다. 앞에 황후만 없었어도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것이다. 백 번 갈겼을 것이다.

“본디 사람의 취향이란 광범위하고 존중해야 마땅한 법. 내가 그 정도도 염두에 두지 않고 휘하를 청했겠느냐? 네 취향이 그러하여 도저히 우리 가문과 혈맥으로서 이어질 수 없다면, 다른 매개를 두면 될 일이다. 앞으로는 내 아들 해운과 새로이 색신의 의를 맺도록 하라.”

순간 홍의의 낯빛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뎅뎅해졌다. 입을 쩍 벌린 채로 천천히 옆을 돌아보자 해운은 시치미 뚝 뗀 표정으로 한갓지게 차나 들이켜고 있었다.

연꽃 모양으로 만든 백옥 잔에 담긴 어여쁜 주홍색 귤피차가 차갑게 식었다. 홍의의 가슴속도 얼어붙었다.

“해운은 나의 장자이자 가장 아끼는 자식이니라. 네가 해운과 합하여 일체가 된다면 너 또한 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느니.”

홍의는 차가운 눈을 들어 말했다.

“송구하오나 마마, 해운은 제 취향이 아니옵니다.”

째릿. 해운의 노기 서린 눈빛이 옆얼굴로 꽂혀 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 않고 덧말을 붙였다.

“또한 망극하게도 하시는 말씀에 어폐가 있어 미욱한 소인은 용인하기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논리대로라면 태자 전하 또한 황후 마마의 아들이자 아끼는 자식인 바, 소신은 일전에 태자 전하와 합하였으니 이미 황후 마마의 아들과 같지 않사옵니까?”

“…오냐오냐하였더니 방자함이 지나치구나.”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가 싶더니 일순 황후의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가 어렸다.

“네가 진정 벽해의 혈통 제도를, 지엄한 신성을 모독할 셈이냐?”

“…….”

“황통이 어찌 황통인가. 누구와도 같지 않기에 황통인 게다. 현재 벽해의 황실에 진정한 황통은 단 두 사람, 병상에 계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뿐이다. 황제께서 승하하시면 온 누리에 단 하나뿐인 신이 될 자가 바로 태자란 말이다. 헌데 신통도 아닌 네가 그를 모신다는 것이 언감생심 말이나 되느냐?”

홍의는 순간 황후가 은밀히 꿈꾸는 세상을 엿본 듯 등골이 스산하였다. 그녀가 설계한 벽해는 철저하게 네 분류로 나뉘어 있었다. 황통이라는 이름의 신, 그를 곁에서 받들 선택된 집단인 신통 가문, 백성이라는 굴레를 씌워 착취할 대상자들, 그리고 그 모두를 줄에 달아 부리는 황후 자신이었다.

“그간 너는 태자의 양기를 보하여 용정을 내라는 전교를 아주 잘 수행하여 주었다. 그러니 이제 더는 상전의 무릎 위에 앉아 총기를 흐리거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라.”

“…애초에 거부하는 소인을 색신에 앉힌 건 황후 마마이시지 않습니까.”

홍의가 감히 대거리를 하고 나서자 황후는 잠시간 홍의를 응시하다 한숨을 푹 쉬었다.

“태자 내외가 후사는 보아야 할 것 아닌가.”

“…….”

“네가 있으니 태자가 태자비를 더욱 멀리하는 듯하다. 마주치기만 하면 상스럽게 물건을 집어던지고 서로 오만 쌍욕을… 흐흠. 좌우지간 양궁의 불화가 그토록 격렬하니 황통을 잇기 전에 심히 망극한 일이다. 허니 네가 나를 좀 도와줄 수는 없겠느냐?”

홍의는 황망하여 황후를 바라보았다. 생생한 실상이 거듭 어리숙한 자신을 덮쳐 오는 듯했다. 어찌 자신더러 태자와 태자비가 화합하도록 도우라는 것일까? 사내들끼리 관계라 희떠운 감상 따위로 치부하는 것인가? 아무리 지엄한 황후일지언정 마음의 경중까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홍의의 안색이 더욱 굳어 가자 황후 웃음 섞인 눈동자를 들었다. 홍의는 별안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춘화를 그려 팔았다지?”

“…….”

“이 다음 말은 너무도 흔할 듯하여 구태여 덧붙이진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 두어라. 너의 선택에 너와 네 무동들의 향방뿐 아니라, 네 아비, 문성 공의 연명도 달려 있음을 말이다.”

말을 마친 황후는 뻣뻣한 목을 쳐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운아.”

“예, 어머님.”

“너의 내자가 난데없는 하교에 심기가 상하여 토라진 듯하니, 모쪼록 잘 달래 주려무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따라 일어선 해운은 읍을 올렸지만 홍의는 그녀가 누를 내려 사라질 때까지 앉은 자세를 공수하였다. 황후가 떠나자 해운이 기다렸다는 듯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도로 앉는다.

‘아버지의 연명?’

‘너의 내자?’

홍의는 허공을 노려보며 굳어 있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소름이 끼쳤다. 그런 홍의를 넌지시 관찰하던 해운이 손끝으로 탁탁 탁자 위를 두드렸다.

“지난 번 서고 앞에서 이 말을 전하려 했던 건데, 별안간 웬 놈들이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이제야 전하게 되었군.”

“…너의 색첩이 되리라는 전교 말이냐?”

지랄도 가지가지였다. 홍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쏘아붙이자, 해운은 앞에 놓인 백설고를 집어 먹으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파정에 성공하였으니 이제 태자 전하는 후사를 보아야 해. 어머님 등살에 앞으로 너 따위와 뒹굴 시간조차 없어질 거다. 날 봐. 제법 괜찮잖아. 정 씹질이 고프고 외로워지면 내게로 오라는 말이야.”

“…너 나 좋아하냐?”

“어머님의 명이다. 너와 태자를 갈라 놓으라는.”

“…….”

“왕조오도 와 있는 마당에 안팎으로 시끄럽게 만들고 싶진 않으신 게지. 태자가 황상에 오르기 전까지, 큰 사건 사고 없이 잔잔히 일을 처리하라고 하셨어.”

대답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홍의는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황후는 태자와 홍의를 떼어 놓기 위한 나름대로 명분이 필요하기에 휘하를 청하고 춘화를 들먹이며 구석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그 방식이 치가 떨리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땅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다. 빌어먹을 격식과 법도에 한 치에 어긋남도 없었다. 참으로 약삭빠른 여인이었다. 끝까지 옳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같잖은 자기애가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전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으니 나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게지.’

옥토와 비단 패물, 그리고 원주의 위, 새로운 작위까지 하사하리라 하셨다. 세인에게 내리는 상치고 과한 몸값이었다. 이런 식으로 귀결될 줄 아예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괴롬과 분노에 휩싸여 위태롭던 그 물빛의 눈동자를, 서툴게 품을 파고들던 너른 어깨를, 끝끝내 충만하지 못한 결핍된 미소를. 만일 태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이게 웬 떡인가 싶었을 수도 있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 홍의를 가장 괴롭고 힘들게하는 전제였다.

***

물기 어린 새벽녘이었다. 홍의는 포단 대신 걸치고 있던 태자의 긴 팔을 거두고 일어나 장명등을 켰다. 활짝 열어 놓은 지게문 밖에서 쌉싸름한 아침 공기와 풋내, 꽃향기가 나물거리며 흘러들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홍의는 아직 베갯잇에 얼굴을 비비며 잠기운에 노그라진 태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세숫물을 뜨러 앞뜰의 커다란 우물가로 갔다. 무자리 아이가 놀라 몸을 사리는 것에 싱긋 웃으며 당과를 쥐어 주고, 어젯밤 자기 전 직접 두레박질을 하여 미리 떠다 둔 물동이를 열어 슬쩍 맛을 보았다. 밤사이 비린내가 싹 가셔 있었다. 깨끗하고 맑은 청정수를 대야에 가득 붓고, 명주 수건과 죽염과 박하 즙을 챙겨서 다시 침전에 들었다. 막 빳빳하게 푸새한 용포를 옥지에게서 건네받아 잘 갈무리한 뒤 태자를 깨워 씻겼다.

옥지는 갑자기 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고 드는 홍의 덕분에 난데없는 휴무를 맞았다. 영 할 일이 없고 몸이 편하여 살짝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태자가 소세를 마치고 문후를 다녀오자, 주간에서 태자가 좋아하는 찬만을 쏙쏙 골라다가 상차림을 돕던 홍의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날도 좋은데 정자에서 밥을 먹자고 청했다. 갑자기 나긋나긋 연삭삭해진 홍의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태자는 밥보다 홍의 입술이 먹고 싶어져서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고행하는 자들은 또 시작이라며 뒤돌아섰다.

“전하, 금일은 조강과 석강 모두 비워 두십시오.”

“…어?”

태자의 수저 위에 짭조름하게 간한 도루묵 알을 한가득 올려 주며 홍의가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태자는 먹던 것을 멈추었다.

“그간 공사다망하여 민인들 축제인 우란분재도 즐기지 못하고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저와 금성을 나서 부처님께 공양도 드리고, 장거리로 가서 사람구경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홍의는 말하는 내내 생긋생긋 웃으면서 태자의 손을 조물락, 뺨을 살살, 허벅지에 허벅지를 붙이고 계속해서 치대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냥 침전 갈래?”

태자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대로 자빠트릴 기세라 홍의가 슬쩍 몸을 빼니, 아예 상체를 기울이며 홍의의 허리끈을 스르륵 당겨 입술에 물고 보았다.

“오늘은 우리 나가 놀아요, 전하.”

홍의는 노련하게 웃으며 태자의 입에서 끈을 빼내고, 도루묵 알을 물렸다. 오오, 말짱 도루묵. 어째 맹수 조련을 지켜보는 듯하여 화경은 손끝으로 살살 박수를 쳤다. 와중에 눈치 빠른 옥지만이 살며시 고개를 갸웃하였다.

‘오늘따라 홍의님이 영 답지 않은걸.’

…그나저나 문제는 이게 아니지. 옥지는 고개를 털고는 태자를 향하여 조심스레 아뢰었다.

“전하, 조강이야 어찌어찌 물릴 수 있다 치더라도 금일 석강은 재상들을 시험관으로 두고 문관들과 경연하는 자리인지라 빠지시기 난감하옵니다. 또한 얼마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전하의 주변을 엄히 경계하라는 황후님의 명이 떨어진 터라….”

태자는 흘끔 홍의를 보았다. 나라 잃은 표정이었다.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정인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태자는 이내 손을 내어 상대의 귓불을 만지작대었다.

“흐음…. 그리 가고 싶어?”

“예, 가고 싶습니다. 정말 몹시 가고 싶습니다. 엽렵한 호위 무관들 추려내 곳곳에 미복시켜 둔다면야 딱히 무슨 변고야 생기겠습니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겨도 신이 나서 무찌르면 되는 것을요.”

“응? 네가…?”

“아, 참, 이게 제가 말을 안 하니 모르셨겠구나…. 전하, 소신이 무예 실력으로만 따지면 다향원 향선 중 으뜸인 데다 십칠 대 일로 붙어 이긴 적도 있사온데, 거 참, 하.”

“…….”

“아무튼 다 괜찮습니다. 면사 하나 두르시고 미복하시어 소신이랑 즐겁게 놀다 오시게요. 네?”

“…흐음.”

평소에 없던 고집을 부리는 홍의의 모습에 곤란함을 느낀 태자는 입에 문 걸 씹었다. 톡, 쫄깃한 도루묵 알이 타지며 고소한 맛이 가득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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