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벽룡사에는 아직 우란분재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종이 연꽃들이 줄지어 만개했고, 뜨끈뜨끈한 찰밥을 나누어 먹는 사바 대중들의 이마에는 삶의 온기가 눅어 땀방울로 홀홀 반짝였다. 낮전에 절을 찾은 태자와 홍의는 화락 천궁을 노닐 각자 소중한 이를 떠올리며 어여쁜 연잎에 뜨거운 찰밥을 싸서 승려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벽해의 풍년과 죽은 이들의 극락왕생을 함께 빌었다.
벽룡사를 내려온 두 사내는 유유자적 도경의 밤거리를 여일하였다. 절대 전하께 막옷을 입힐 수는 없다며, 위엄에 걸맞도록 해야 한다고 정색을 하는 옥지 때문에 화려한 풍류 공자의 차림을 고수한 태자는 행여 면사가 나부낄까 내리누르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이토록 많은 인파 속을 걸어 본 것은 처음이라 더욱 그러했다.
“공자님, 공자님! 저것 드셔 보시겠습니까?”
미복을 한 채라 부러 호칭을 달리하였다. 마침 육주비전을 빠져나오자 뜨르르하게 먹자판이 펼쳐지고, 홍의가 태자의 손을 끌며 다가간 곳에서는 철판에 돼지 내장을 굽고 덖어 팔고 있었다. 구순한 냄새에 왈칵 식욕이 동하여 홍의의 입에 침이 절로 고이는데, 태자는 짐짓 이맛살을 꿈틀, 하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어서 이쪽으로 와 보시라니까요? 저게 돼지 내장을 간하여 구워 낸 곱이란 것인데, 씹을수록 잘강잘강 꼬소한 것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랍니다.”
“그래, 너 많이 먹어.”
생김새를 보고 더욱 흠칫한 태자가 한사코 거절하며 돌아서려 했다.
“허, 이 싸내 좀 보게? 도루묵 알은 잘만 자시더니, 참으로 알 수 없는 편식이옵니다!”
“…편식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곱창에 탄력 받은 홍의는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면서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 먹고 다녔다. 태자는 어째 난감한 얼굴로 봐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받아먹고, 아니다 싶은 것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황궁의 음식과 그 재료의 질도 모양새도 너무 차이가 나니 가뜩이나 입 짧은 그로서는 선뜻 구중을 열기가 애매하였던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뜬 홍의가 이것이 백성들의 고혈이요 서민의 맛이다, 하기에 그럼 내 입맛은 사치의 맛이냐, 대꾸를 하였더니 대번에 사치가 맞다고 하여 태자는 살짝 삐쳤다.
‘꽃 공자가 맞다니까.’
삐친 얼굴도 어찌 저리 사랑스럽고 잘났을꼬? 오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언을 실천하며 홍의는 남몰래 실실 웃었다.
“공자님, 동곳 보러 가실래요?”
성가시다며 뻗대는 태자를 끌고, 이번에는 장신구와 비단 등을 파는 상점으로 갔다. 각양각색의 방물이 뜨르르한 가운데 노란 비취잠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홍의가 눈알을 슥 까 올렸다.
“이것 진짜 비취옥이요?”
상인도 눈을 까 올렸다.
“진짜지 그럼?”
“아하.”
홍의는 바로 수긍하고는 좀 더 가판을 둘러보았다. 동곳이 줄지어 놓인 곳에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보석은 아니지만 작고 동그란 곱돌을 여의주처럼 물고 있는 은색 용잠이었다. 어찌 저리 조그맣고 섬세하게 세공하였을까, 감탄하며 한참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했다. 여의주 색깔이 전하의 눈동자와 꼭 같은 연한 하늘색이었다. 무게도 가볍고 길이도 맞춤한 것이 침수 드실 때 쓰시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공자님, 이것 참 곱지 않습니까?”
홍의가 신나서 물으니 태자는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응, 사 줘.”
“…….”
잠깐 머춤했던 홍의는 이내 그간 모은 녹봉과 얼마 전 기예 공연으로 받은 채전까지 두둑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위풍당당 풍류랑 미소를 띤 채 거만하게 장사치를 떠봤다.
“이건 얼마요?”
“은화 두 냥.”
“…….”
홍의는 다시 태자를 돌아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고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신이 돈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은도 아닌 것을 진짜 은을 주고 사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싶어 드리는 말씀인데요, 사실 제가 이것 사 드려 봐야 공자님께서 몇 번이나 착용하시겠습니까? 커다란 옥갑에 손만 넣으시면 은잠 반 금잠 반인 것을…”
“여기, 받게.”
잠자코 듣던 태자가 결국 말을 끊으며 장사치에게 값을 지불했다. 냉큼 돈을 받아 든 장사치는 입성이 아까운 놈이라고 홍의를 향해 혀를 끌었다.
가판을 더 둘러보던 태자는 고운 은실로 삼은 머리끈을 발견하고 그것도 같이 샀다. 그리고 홍의의 안색에 대어 보고는 성기게 묶어 장식해 주었다. 더듬더듬 어설픈 손길과 차가운 손끝이 머리칼 사이를 헤집는 것에 홍의의 양볼에 홍조가 올랐다.
한 손에 닭 꼬치를 든 홍의와, 접선을 든 태자가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잠시 갓길의 청루 홍등을 지나치던 때였다. 허우대며 입성이며 나무랄 데 없이 미끈한 두 사내가 슬렁슬렁 걸어가니,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호구 물주의 재림인가 싶어 눈이 뒤집힌 유녀들이 앗 할 틈도 없이 와락 달려들었다.
“공자님! 이 좋은 밤에 사내들끼리 모여 파흥 들 일 있습니까?”
“공자님! 긴긴 밤 광석에 누워 소녀의 충절을 받아 보심이 어떠할는지요? 맛깔난 옥식과 향주를 한 상 가득 차려 두었답니다!”
홍의는 순식간에 아찔한 사향내를 풍기는 여인들에 갇혀 버렸다. 마찬가지로 여인네들에게 잡아당겨지는 통에 홍의와 떨어지게 된 태자가 당황스러워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조신한 백면 공자님 고운 옥안 좀 열어 주시어요! 어유, 요 쓸데없는 쓰개가 우리 사이에 훼방을 놓네?”
당황의 연속이었다. 겁 없는 어느 여인이 태자의 면사를 들추려 하였고, 태자가 놀라 그 손목을 붙들었고, 여인은 나 붙잡혔다면서 오히려 더 좋아라하였다. 그 와중에 홍의는 흡사 빨판이라도 붙은 듯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여인들의 쥘힘에 놀람을 넘어 감탄할 지경이었다. 하도 힘이 좋기에 ‘자네들 무동이 되어 나라를 지킬 생각이 없나…?’ 했더니 얼굴도 잘생긴 공자님이 유들유들 농까지 잘하신다며 꺄라락 웃음이나 터뜨리는 것이었다.
“어마, 이 공자님은 영 말씀도 없고 수줍음을 타시는데, 아닌 척하면서도 몸은 어찌 이리 실팍하고 탄탄하셔?”
태자에게 손목을 붙잡힌 여인이 되레 태자의 팔을 당겨 제 잘쏙한 허리에 감았다. 그 꼴에 눈이 회까닥 뒤집힌 홍의가 들고 있던 꼬챙이로 위협을 하여 여인들의 홍수에서 태자를 건져 내었다.
거절당한 설움에 토라진 유녀 하나가 팽 소리쳤다.
“주색잡기도 모르는 사내가 어디 사내인가? 뭣도 없는 고자들 아니야?”
태자는 여인들로부터 이토록 열화와 같은 관심과 거친 몸의 공세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 정신적 충격이 여간한 게 아니었다. 홍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허, 하며 혀를 끌었다.
“전하, 신경 두지 마십시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여인이 아닙니까. 고자라니. 전하께서 고자라니.”
아주 그냥 시달려 보지 않은 자는 아예 입을 열지 말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태자와 엎치락뒤치락했던 때가 떠올랐다. 엊그제는 또 세 번을 했는데, 막판에는 직접 위에 올라타 엉덩방아를 신나게 쿵덕쿵덕 찧어 드렸더니 전하께서 나른한 미소와 함께 나지막이 감탄을 내려 주실 정도였다.
‘…너한테 물어뜯기는 것 같아.’
어이쿠, 크험험! 홍의는 시뻘게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왜 또 이런 장면이 떠오르고 그런담! 특히 그 몽롱한 눈빛과 붉게 올라가던 입술을 떠올리려니 아이고, 내가 더워서 살 수가 없네에,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옷깃을 붙들고 한참 부채질을 했다. 태자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아 더욱 민망스러웠다.
“그나저나 전하는 예까지 거둥하시어 제대로 젓수지도 못하고 어쩐답니까?”
“괜찮아. 네가 즐거웠으면 됐어.”
‘전하….’ 감동 받아 턱에 주름을 잡고 울먹울먹하던 홍의가 이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에이, 그래도 기왕 나오신 김에 동동주라도 한 사발 하시면 좋을 듯한… 옳지, 저리로 가요, 전하!”
“…….”
“주모, 여기 국밥에 탁주!”
“예, 나리!”
홍의가 태자를 끌어간 곳은 작은 길갓집을 개조해 봉놋방 하나와 싸리울 놓고 마당에서 장사하는 소박한 주막이었다. 오도카니 서서 요연해 있는 태자를 평상에 밀어 앉히자, 곧이어 젊은 주모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장국을 개다리소반에 받쳐 들고 왔다. 그런데 매콤하고 얼큰한 토장국 외에도 소박한 나물 반찬과 간장 고추장이 곁들어 오른 것이다. 홍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웬 거야? 산나물이 아직도 안 쇠고 씽씽하단 말이야?”
“예 예, 쇤네가 큰비 오기 전에 직접 올라 캐 왔지요.”
주모가 인심 좋게 웃으며 모자라면 말씀하시라고 덧붙였다. 따끈따끈 오르는 훈김에 홍의의 입가도 녹녹한 풀렸다.
“소신은요. 어릴 때부터 원체 식성이 좋았습니다.”
묻지도 않은 옛이야기를 어살버살 늘어놓는 홍의가 귀여웠다. 태자는 상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쌀밥에 고기반찬이든 기장밥에 풀떼기든 짭짤한 장맛만 좋으면 잘도 쓱쓱 비벼 먹곤 했지요. 해서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바쁘셨습니다. 곰취 나물, 방풍나물, 명의 나물, 삽주, 고사리, 삿갓나물, 곤달비가 자생하여 동백산 곳곳에 지천이었어요.”
아직 건강했던 어머니가 호미 들고 베수건 쓰고 골짜기 가득 쑥쑥 돋은 나물을 쑥쑥 캐고 있으면, 홍의는 그 옆에서 칼싸움을 한다느니 나무를 탄다느니 짓까불며 온갖 촐랑이 짓을 다 하였다. 흙이 버슬버슬 묻은 어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고 산을 내려올 때 온 세상을 붉게 흐르던 꽃노을, 동구에서부터 보이는 굴뚝들의 뽀얀 연기와 구수한 밥 짓는 냄새, 젊은 어머니의 새처럼 높고 고운 웃음소리.
홍의는 혼기 꽉 찬 청년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는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어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비옥한 품을 떠올리면 아이처럼 칭얼거리고 싶다. 왜 어리석은 나를 두고 그리 일찍 가셨느냐고 투정하고 싶다. 힘든 일, 아픈 일, 괴로운 일과 직면할 때마다 도움을 달라고 조르고 싶다. 그렇게 홍의에게는 모친이 구원이었고 신이었다. 언제든 당신을 떠올리면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졌다.
하루하루가 뜨거웠다. 어머니를 여의고 첫사랑마저 그토록 허망하게 보낸 소년은 매 순간을 공들여 살았다. 마음 쏟을 곳을 찾지 못해 나라에 집착했다.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하면 선봉으로 달려 나가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향선으로서 하루도 쉬지 않고 활쏘기를 연습하고 말달리기를 수련하고 무예를 연마했다. 그토록 산뜻한 외모에 출중한 몸에 재능까지 겸비한 향선을 모두가 인정하였다. 신통 사람들조차 향선 홍의의 특출함에 있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홍의는 여전히 무력하였다. 의원도 포기한 어머니를 살려 보겠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잡스러운 약까지 만들어 냈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달래를 지켜주지 못했고, 바보같이 떠나보냈다. 그렇게 태자도 지키지 못하고 잃을까봐 두려웠다. 아니, 잃는다는 말도 우습다. 태자는 본래 홍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걸 갖는 사람일 뿐, 감히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왜 그렇게 봐?”
말을 멈추고 빤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영 애틋했던 모양이다. 태자가 의문스레 묻자 홍의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한 번 설레 젓고 수저를 들었다.
“너 오늘따라 이상하네.”
“에이, 아니라니까요, 그저 전하와 이리 밀월을 나서니 기껍고 달떠 그런 겁니다.”
흐응. 태자는 슬슬 고개를 비딱하게 내리며 인상을 굳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떠들치는 마음 줄을 욱죄려 홀로 잔을 치던 홍의는 결국 전낭을 모두 풀겠다면서 큰소리까지 땅땅 쳤다.
“주모! 여기 술 억병으로 내오고, 닭도 서넛 마리 고아 줘!”
마침 주막 앞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도경의 거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홍의가 손짓하자 우물쭈물 다가온다. 하루 온종일 소금엣밥도 얻어먹지 못한 아이들은 팔다리가 삭정이처럼 말라 있었다. 그토록 흉하고 지저분한 꼴에 태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가장 어린 여자아이의 때가 잔뜩 낀 손을 만져 보았다. 조그맣고 얄캉한 손바닥은 너무 여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듯했다. 하지만 온기, 그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느낌만은 선연하였다.
“…이게 무어에요?”
“쉿.”
태자는 아무도 몰래 아이의 손에 묵직한 금지환을 쥐여 주고는 어딘가를 향해 턱 짓을 하였다. 그곳을 돌아본 아이의 눈에, 마침 주모가 커다란 광주리에 음식을 이고 오는 모습이 들었다.
푸짐한 닭백숙이 먹음직스럽게 놓이자 입이 귀까지 째진 아이들은 땟국이 닥지닥지한 손으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맛나냐?”
“맛납니다! 너무너무 맛나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습니다!”
“어! 나는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어도 모르겠는데!”
“어이고, 어디서 내 쌈짓돈 탈탈 털리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바로 요 입이로구나.”
식탐이 심한 사내아이가 본인 앞으로 닭다리를 네 개나 쓸어다 놓고 있기에, 홍의는 얄미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아이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평상마다 사람으로 가득 차고, 장터의 일꾼들도 몰려와 걸립을 하여 술상을 보았다. 갖가지 훈향에 식욕이 동한 말들의 울음이 마방을 울렸다. 봉놋방 군불 때는 연기가 안뜰을 가득 채웠다. 홀짝술 몇 잔에 거나하게 취한 홍의는 민인들의 부추김에 쑥스러워하면서도 평상에 올랐다. 중노미 도끼질 하는 소리 흥겹고 사람들 웃음소리 드높았다. 손끝이 절로 박을 탔다.
간 봄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이 시름하는데
아름다웠던 얼굴에 주름지려 하네
눈 돌이키는 사이에나마
만나 뵙도록 지으리이다
낭이여, 이 그리운 맘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구멍에서
함께 잘 밤 있으리요
크고 맑은 홍의의 노랫소리에 여인들은 양 볼을 붉히고 사내들은 곁들여 춤을 추었다. 까만 밤을 뭉게뭉게 가르는 훈김 사이로 만개한 별꽃이 사람들의 부들부들한 얼굴 위로 쏟아 내릴 듯했다.
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면사를 조금 걷었다. 가만가만 어루더듬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