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달하 노피곰 도드샤
도경의 귀족거리 중심부에 자리한 대저택 앞에는 그 집의 가주와 장자가 특별한 손을 위해 친히 마중을 나와 있었다.
홍의는 가마에서 내려 잠시 발밑을 보았다. 물 먹어 질척이는 땅이 꼭 자신의 심정 같았다.
사색을 정돈한 홍의는 이윽고 대윤을 향해 공손히 읍을 올렸다.
“향선 홍의, 군우령을 뵙습니다.”
“지낼 곳을 안내해 주어라.”
냉랭한 시선은 홍의를 향한 채 아들 해운을 향해 일갈한 대윤은 그대로 안채로 사라졌다.
“…….”
“…….”
홍의는 얇게 뜬 뱁새눈으로 가만가만 앞사람을 흘겼다. 아까부터 해운이 문설주에 팔뚝을 기대고는 무언가 굉장히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자세로 야릇하게 이쪽을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쟤는 정말 안 그러게 생겨서 왜 저러는 걸까.’
소름 돋는 팔뚝을 짜증스레 벅벅 긁었다. 여전히 기둥에 들러붙은 해운이 마침 안쪽 대기 중이던 종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어서 와 손님의 짐을 챙기지 않고 뭐 하느냐?”
그에 종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금성에서 건너온 홍의의 단촐한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피곤했다. 홍의는 목덜미를 쥐고 뻐근한 곳을 한차례 돌려 풀어 준 뒤 착잡하게 해운을 바라보았다.
“집 구경을 시켜 주랴?”
“일 없으니 이제 좀 사라져 줘.”
“요 일대가 도경의 금입택 거리라고 할 정도로 호화로운 대저택이 줄지었지만, 실지로 이마마하게 크고 훌륭한 집은 또 없지. 군식구인 네놈의 방에도 장정 넷은 거뜬히 누워 이리저리 뒹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침상을 준비해 두었으니 보고 기절하지나 말라고.”
해운의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 홍의는 내내 정색으로 일관했다. 널따랗고 화려한 응접실을 지나 관상 연못의 둥근 다리를 지나니 다시 뜨락이 나타나고 건물이 드러났다.
“네 방은 내 방 맞은편이다.”
“…….”
“언제고 내가 종을 울리면 냅다 튀어와 내 물건을 빨아야 할 거야.”
축축한 음성으로 은근히 중얼거린 해운이 슬그머니 홍의의 허리께에 팔을 감았다. 그 손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홍의가 인자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또 불알이 쥐여 털리고 싶으냐?”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말꼭지를 돌리며 해운이 으스댔다.
“잘못 알고 있다니? 무얼?”
“나는 네가 아는 바처럼 반쪽 고자 신세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 또한 최근 들어 안 사실인데….”
해운은 듣는 귀는 없는지 주변을 살핀 다음, 이내 홍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와 소곤댔다.
“내 취향이 여인보다는 사내 쪽에 기울어 있어 그간 물건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거였다. 두부같이 말랑말랑한 살성보다는 질깃질깃 옴팡진 엉덩짝이 내 취향이라는 말이지. 홍의, 네놈처럼 말이야.”
해운의 커다란 손이 스윽 미끄러져 홍의의 엉덩이 한 짝을 주물렀다. 그리고는 무척 놀라운 듯 반색했다.
“아니, 칼도 튕겨 내겠는데?”
이내는 아주 바지 속으로 기어들려는 손목을 턱 붙잡은 홍의는 팔꿈치로 해운의 복근을 가격하였다. 고성을 지르는 몸뚱이를 내리 눕히고 팔을 길게 늘려 잡아 가랑이 사이에 끼고 꼼짝도 못 하도록 포박하자 해운이 반대편 손으로 바닥을 탁탁 치며 통곡을 했다. 홍의는 아예 해운의 몸에서 팔을 분리해 낼 기세로 잡아당기면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설레 저었다. 어째 금성에 있을 때보다 더욱 파란만장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탓이었다.
***
초저녁, 어둠의 먹지에 초연하게 흩어진 조각 달빛을 내다보며 황후는 생긋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내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귀숙일이고, 미리 태의에게 일러 용정을 거두어 둔 바도 있으니 혹여 생길 불상사에 대비할 방책도 마련해 둔 터였다.
예국의 왕조오는 태자에게 홀딱 반하여 틈만 나면 사냥을 가자, 도경 나들이를 가자 서신을 보내오고, 매사 칼눈을 뜨고 황후와 태자를 주시하던 태후는 유배되었고, 매양 거슬리던 미함조차 끈 떨어진 연이 되어 곧 원주를 내려놓을 것이고, 홍의까지 태자의 곁에서 치워 제 눈에 닿는 곳에 잘 가두어 놓았다. 평시에는 해운에게 맡겨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요긴하게 써먹을 귀여운 수캉아지 말이다.
무엇보다, 근자에 더욱 악화된 황제의 상태로 짐작컨대, 진실로 태자의 즉위가 얼마 남지 않았다…!
태의는 이토록 힘겹게 경각을 다투시는 일도 이레 중으로 잦아들 것이라 귀띔하였다.
비로소이다. 비로소.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였던가? 이십 년 전부터 철저히 계획하고 짜 둔 이 판에 진정한 승자는 역시나 황후, 자신이었다. 물론 홍의의 등장과 그를 향한 태자의 집착은 예상치 못한 바였지만, 아무려면 어떠한가. 끝마무리는 잘 매듭지었으니 완벽히 벽해를 손아귀에 넣고 입맛대로 잡아 흔들 수 있으리라. 누구도 반항할 수 없고 누구도 도전하지 못할 권력의 정점에서!
황후의 입술이 미끈한 호선을 그리던 그때, 내실 밖에서 번병의 음성이 울렸다.
“마마, 태자 전하 존전에 드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황후는 찻잔을 내려놓고 해사하게 웃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아들을 맞이하였다.
“그래, 석강은 잘 마쳤느냐?”
“예.”
“어서 앉아 자리에 차를 들도록 해라. 머리를 맑게 하여 심신을 안정하는 차란다. 평안한 침수에 도움이 될 게다.”
맞은편에 앉은 태자가 묵묵히 찻종을 잡았다.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태자를 응시하던 황후가 곧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소식은 들었다. 홍의가 해운의 사택으로 향했다지.”
시종이 물러가고 태자는 범상히 면사를 벗었다. 평시와 다름없는 무표정과 차분히 가라앉은 벽안을 들여다보던 황후는 내처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지고지순한 아드님이 이토록 마음고생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그 사특한 아이를 지밀에 들이지 않았을 터인데.”
태자는 찻잔에 입을 대려다 말고 천천히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태자가 눈을 들었다.
“모든 것이 그 아이의 원이었단다.”
“…….”
“네가 아직 젊고 무디어, 사람의 속내란 것이 얼마나 음습하고 가증스러운지 한 치도 모르는 것이지.”
황후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설레 저었다.
“홍의 그 아이가 어찌나 사특하고 맹랑한지, 내 일전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는 애초 나의 휘하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너의 지밀에 든 것이었다. 하지만 네 얼마나 그 아이를 귀애하는지 아는 바에야, 어미로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
“하여 너의 형이자 충직한 신하인 해운을 부추겨 그 아이의 삿된 욕망을 다독이고자 했음이지. 이 어미는 언제나 우리 아들의 편짝이니 말이다.”
태자는 두통을 느끼는 듯 황망히 미간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 어미가 되어서는 가뜩이나 따가운 환부에 소금을 친 셈이로구나.”
태자는 대답 없이 먼눈을 지게문 밖에 던졌다. 아들의 흰 목덜미와 염세적인 표정을 바라보던 황후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어려운 사내로구나.”
“…….”
태자가 무슨 말이냐는 듯 돌아보았다. 황후는 어쩐지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아드님, 고 눈의 색만 아니었다면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야. 나이가 찰수록 낯꽃이 피어 요염하고 기품 있는 자태가 신선에 비하겠는가? 특히 함부로 눈길 주지 않고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냉랭한 면모에 여인들은 녹는 법이지.”
“…….”
“그러니 앞으로는, 이 숭한 눈알을 감추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황후는 음성을 낮췄다.
“이 흉측한 파란 눈알은 너의 결점이자 어미의 약점이 될 터다. 정통계 인사들이 네 눈의 진위를 가리겠답시고 어떤 허언과 흉설을 퍼뜨릴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정녕 그 눈은 너에게 치명적인 비수로서 돌아올 것이야.”
“…예, 어머님.”
고분고분 대답하는 태자가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황후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가 황좌에 오를 때 즈음에는 이까짓 바람 한 번 불면 펄럭이는 면사 따위가 아니라, 아주 멋진 가면을 만들어 주겠노라. 누구도 함부로 벗길 수 없고 감히 그 속을 궁금해할 수도 없는, 그런 고귀한 가면을 말이다.”
“예. 어머님.”
“이제야 우리 태자가 예전의 순한 아들로 돌아온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도다.”
그때였다.
대앵! 대앵! 대앵!
금성의 신전이 대종을 울렸다.
모자는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실 너머 복도에서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주 다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궁인들이 상전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발소리를 낼 리 없었다.
뒤이어 위병들이 고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시종장이 발목을 베인 듯 털썩 무릎 꿇고 외쳤다.
“황후 마마! 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태자의 굳게 다문 입매로 음영이 스쳤다. 촛불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가 정신없이 너울거리며 음험하게 벽을 더듬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바로 선 황후는 시비들을 등지고 태자를 돌아보았다. 태자는 궁인들 앞에 가까스로 참아 누른 웃음을 이제야 풀어놓으며 기묘하게 뒤틀리는 새빨간 입아귀를 보았다.
“자, 때가 되었구나.”
***
대앵- 대앵- 대앵-
팔월의 깊은 밤, 벽해의 십일 대 황제가 붕(崩)했다. 황족이 불사를 돕는 벽룡사에서도 성대한 예불을 올리기에 앞서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타종을 밤새도록 울렸다. 만백성이 금성 앞 광장으로 몰려들어 흙을 홈켜쥐고 통곡하였다. 속히 입궐한 향선들과 문무백관이 박석에 이마를 찧으며 부르짖었다.
황제의 시신이 대궁으로 인도되었다. 신통 귀족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상단 밑에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일렁이는 횃불과 흩날리는 깃발 사이사이 수백, 수천의 울음이 하늘을 뒤덮었다.
눈을 감았다. 어두웠다.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웠다.
면사 속에서는 늘 그랬다. 눈을 감아도 떠도 세상은 꼭 같이 어둡고 캄캄했다.
태자는 수행인의 꼬리를 매단 채 발맘발맘 울음바다를 갈랐다. 판석으로 딛는 태사신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면사에 가린 시야로 망령들이 스치는 듯했다. 울음소리에 귀가 아팠다. 걸음걸음마다 고이는 낯선 이들의 야멸찬 시선이 고스란했다.
“태자 전하!”
그때 발 앞에 재상 하나가 달려와 엎드렸다. 정통 사람이었다.
“황제 폐하의 성불을 기리는 자리에 어찌 하나뿐인 적통인 태자 전하께오서 존용을 가리시나이까!”
정통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달려 나와 태자를 둘러싸고 부복하였다.
“황제 폐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옵니다! 이를 계위할 벽해의 황태자로서 부디 법리에 맞는 모습을 보여 주소서!”
태자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목도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발악이었다. 이백 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동안 벽해의 정점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세상을 호령했던 정통 가문은 이제 지어미를 잃고 지아비마저 잃었다.
태자는 딱히 변명이나 회피 없이 물끄러미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들은 허상을 향해 소리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지금 그들이 원망하는 살아 있는 신, 천신의 자손이라는 황족의 적통 황태자는 여기 있고도, 없다.
귀족들이 황태자의 용포와 태사혜에 지저분한 눈물과 침을 묻혀 가며 매달리기 시작하자, 마침 상단 아래를 지키던 대윤이 병사들을 이끌고 귀족들을 몰아내었다.
“어서 단에 오르십시오.”
바싹 다가온 대윤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면사로 가리시어 성루를 보이지 못하니, 비틀거리는 시늉이라도 하시는 게 좋겠사옵니다.”
“…….”
태자가 대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들의 연기를 하라 권하는 대윤의 표정이 심히 진지하였다. 너무 진지하여 실소가 났다. 대윤이 태자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태자는 팔을 거둬 거부하였다. 멈칫거리는 대윤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자가 석계를 밟아 오르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거셌다.
태자는 묵묵히 죽은 아비 곁에 무릎을 꿇었다. 중량이 만근에 달하는 황금과 황철로 도금한 거대하고도 화려한 관 속, 황제는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죽어서까지 고통스러워 보이면 어쩌나 걱정하였는데, 다행히도 표정이 온화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에 닿은 듯 평온해 보였다.
“황제 폐하, 듣고 계시옵니까!”
그때 나이 지긋한 정통 귀족이 하늘을 우러르며 외쳤다. 내내 시신 곁에 붙어서 지아비를 잃은 정실의 서러움을 슬프게 연기하고 있던 황후가 짧은 순간 입술을 감쳐물고 귀족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정통의 마지막 아버지시여! 금일 저희는 맥없이 신을 잃었고 텅 빈 옥좌에는 만금보다 무거운 하늘의 책무만이 남았나이다! 어찌 폐하께서는 금관과 옥새를 매정히 버려 두고 가셨나이까?”
“폐하가 없는 천하는 어디를 보아도 차디찬 허방이옵니다! 허망하고 허망하여이다! 어찌 눈 가리고 귀 막고 입을 닫아 버린 허깨비에게 저희들을 버리고 가셨사옵니까!”
“돌아오시옵소서, 폐하!”
“돌아오시옵소서!”
어쩌면 그들의 질타는 옳았고, 시기적절하였다. 하지만 어쩐지 광대 패의 연극처럼 모든 것이 과했다. 태자는 이들의 눈에서 슬픔이나 분노보다도 오히려 아주 오랜 시간 벼려 온 침착성을 보았다. 모두가 황태자의 흉허물을 잡아채려 악착같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보위에 오를 황태자는 황통이자 신통, 자신들과 결을 같이할 수 없으니 깎아내리고 보자는 공공의 목적이 그들의 말, 눈짓, 하늘을 향해 뻗친 양손에까지 질척하게 엿보였다.
‘이 벽해의 재앙!’
‘제 어미와 사통할 추악한 망석중!’
‘죽어버려라, 이 괴물아!’
그들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거운 연환 같은 질시가 온몸에 덜컹덜컹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통의 패악이 거세지니 황후가 급히 태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정도면 되었다. 뒷일은 어미에게 맡기고, 서둘러 태자궁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제가 왜 태자궁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황후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썹을 찡그렸다.
“무어라고?”
태자는 곧게 일어서 황제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제는 승하함과 동시에 선황이 되고 그 순간 그의 적통인 황태자가 이 나라의 황제가 됩니다. 이토록 당연한 이치 아래, 황제가 된 소자가 어찌하여 대궁이 아닌 태자궁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내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황후가 당황스러운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으려는데 태자가 단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말대로 자신은 허깨비였다. 하지만 허상인 스스로를 인정하면서도 체념한 적은 없었다. 태자는 ‘황제’가 되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누구도 모를 지독한 미망이 있었다. 그것이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가당찮은 권력욕일지언정, 혹은 하늘 아래 단 한 사람뿐이라는 적통 황태자의 오만함일지언정, 그도 아니라면 세뇌나 망집, 세상만사에 돌진하고 보는 어린 청년의 치기나 오기일지언정, 황위에 올라 만백성을 품겠다는 꿈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고독한 소년은 우물 밖 높은 하늘을 갈망했다. 만백성의 경외를 소원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사랑받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늘 같은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때가 도래하면 만나리라고. 내가 너희들의 왕이며, 하늘의 주인이라고.
태자는 고개를 들고 검은 면사를 벗었다. 사방을 밝힌 횃불이 술렁이듯 일렁이며 벽옥처럼 아름다운 청년을 환하게 비추었다.
모두가 넋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