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97화 (97/111)

#97

폭풍 전야처럼 불안한 침묵이 사위를 짓눌렀다.

홍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손 안의 돌을 바투 쥐었다. 가죽신 바닥에 흙을 문질러 몸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였다. 장딴지에 단단히 힘을 주고 한쪽 발로 바닥을 짚고 선 그는 나머지 다리를 들어 올린 뒤, 만중을 가한 팔놀림으로 돌을 던졌다.

따악!

“명중이오!”

“따흑!”

“으아아아아아!”

담벼락 앞 돌무더기의 중심을 받치고 있던 가장 큰 돌이 정확히 튕겨 나가며 순식간에 공든 돌무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열 살배기 까까머리 동자가 와앙 울음을 터뜨리고, 지켜보던 가신들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다. 홍의는 작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우고 오만하게 콧대를 드높였다.

“그러게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지.”

“우와앙, 이건 애초에 수지가 안 맞는 내기였다고. 저 인간이 나보다 힘이 세잖아. 툭 던지기만 해도 깡 맞는 것을, 아이고오! 불공평해!”

사택의 아이종 삼덕은 육자배기로 자빠져서 사지를 파닥거렸다. 으이구, 애 이기고 좋단다. 삼덕의 울음소리가 높아지자 가신들이 혀를 끌며 홍의를 향해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그에 머쓱해진 홍의가 코 옆을 슬슬 긁었다. 우는 와중에 그 장면을 포착한 삼덕은 아, 여기서 조금만 더 울면 봐주겠구나, 싶어 겉으론 울며 속으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이보, 거 향선씩이나 되신다는 분이 아이종 코 묻은 돈 뺏어서 뭣에 쓰게요?”

보다 못한 집사가 거들었다. …역시 그런가. 목덜미를 긁던 홍의가 결국은 자빠진 삼덕이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주려는 모양새였다. 삼덕이 울음을 그치고 눈물 젖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홍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놔.”

돈 내놓으란 소리였다.

“내놔.”

“…끄흐으읍. 으으어어엉.”

“울어도 개평 없다, 이 새끼야.”

“우아아앙!”

“갖고 와이씨.”

본디 인생의 쓴맛을 봬 주는 데엔 신분의 높고 낮음과 노소도 중요치 않은 법이다. 홍의와의 비사치기에서 그간 몰래 모은 쌈짓돈을 탈탈 털리고, 낮에 장거리 나루터에 나가 엿 사 먹으려고 쟁여 두었던 철정 한 냥까지 죄다 뺏긴 삼덕의 방울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떨어졌다.

그 꼴을 지켜보던 홍의는 기도 안 찬다며 헛웃음을 쳤다.

조용히 마루에 앉아 꽃가지를 꺾노라면 살금살금 다가와 뒤통수를 후리고 달아난 게 누구였더라? 밥벌이라며 춘화를 그리는 척하다 이제는 손에 익어 버린 태자 전하의 용안을 한 붓 한 붓 놓으며 그리움에 울먹이고 있노라면 지게문 밖에서 알궁둥이를 짝짝 내려치며 엉덩이로 장사하는 홍의가 어쩌고저쩌고 노래를 불러 사람 심기를 박박 긁은 것은 또 누구고?

해운의 입김이었다. 사택의 종들은 누구 하나 홍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갇혀 지내는 처지에 뜨락이라도 걸어 볼까 치면 본디도 잔자갈 하나 없이 깨끗하던 마당을 갑자기 소제하겠다면서 단체로 일렬종대로 헤쳐 모여 일사불란 댑싸리비질로 먼지의 파도를 일으키질 않나, 우물에서 물 긷던 무자리 아이마저 소세하던 홍의의 머리에 물 한 됫박을 왁살스레 끼얹고 달아나질 않나, 밥에서는 돌이 까득까득 씹히질 않나, 뒷간이라도 다녀올라 치면 문을 벌컥 열고 달아나질 않나, 한마디로 그냥 죽을 맛이었다.

개중에도 저 삼덕이 놈이 가장 말썽이었는데, 어제는 치우던 말똥을 뒤통수에 냅다 집어던지고 튀더라.

바싹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던 홍의가 비사치기 내기를 제안하였고, 놈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으어어엉. 끄어억. 끅. 콜록… 뜨어어엉. 느어어엉.”

삼덕은 뜨락에 주저앉아 한 식경째 목 놓아 우는 중이었다. 마주 앉아 턱 괴고 심드렁히 구경하던 홍의도 결국 고개를 설레 젓고 말았다.

“좋다, 이렇게 하자.”

아이종 처지에 철정 열 냥을 털렸으니 나라 잃은 것과 같겠다. 홍의가 휴전의 의사를 비치자, 아이가 슬슬 울음을 그치며 뱁새눈을 떴다. 여차하면 다시 울 기세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쳐다본다.

“내 네게 빼앗은 돈을 도로 돌려주고, 이것도 얹어 주마.”

홍의는 지난번 야시장에서 심심할 때마다 군입 다시려 사 두고 여태 아껴 놓은 쇠고기 육포를 정갈히 찬합에 담아 내밀었다. 아이의 눈이 회동그래졌다.

“대신.”

홍의가 찬합을 슬쩍 뒤로 빼자 아이가 침을 꼴깍인다.

“앞으로 뒷간 문 좀 벌컥벌컥 열지 마라. 응?”

한숨과 뺨을 잡아당기자, 삼덕이 히쭉히쭉 웃는 낯을 해 보였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더니, 옛말은 실로 경전 못지 않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는 바였다.

아무튼 그 일로 하여금 삼덕과 둘도 없이 친해지고, 이 낯선 향선의 됨됨이를 알아본 종들도 적이 누그러져 더는 텃세를 부리지 않았다. 물론 밤이면 밤마다 쳐들어와 수작을 붙이려는 해운을 갖은 방법으로 떼어 내는 것은 못지않게 번다한 일이었으나, 특유의 방식으로 고된 유폐 생활을 이겨 내며 나름 잘 적응 중인 홍의였다.

비질을 마친 삼덕이가 놀아 달라 조르기에, 귀찮은 척 안 내킨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마루로 나섰다. 어쨌거나 남는 게 시간이었다. 홍의는 아이를 위해 손수 연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연 종이에 미립난 그림 솜씨로 매를 그려 주자 삼덕이가 입을 헤벌렸다.

“나도 그림 잘 그리면 좋겠다! 아재처럼 향선 돼서 말도 타고 구름도 타면 좋겠구!”

“하면 되지.”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호비며 시큰둥이 대꾸했다. 아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에에에이, 한다.

“종놈이 어찌 향선이 되나?”

“네놈은 종놈이라서가 아니라 그 싸가지 없는 말본새와 생마 같은 성질머리 때문에 못 되는 게야.”

“에에에이. 재미없다.”

“재밌으라고 한 말 같니?”

“나 울 아부지가 병으로 죽으면서 이 집에 맡겼는데. 흐음. 나더러는 꼭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세상 구경 다니면서 살랬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나도 내 신세 알지만 그냥. 향선은 자유롭고 멋지니까….”

매의 눈동자를 파랗게 칠하며 홍의가 흠, 웃었다.

“그래, 향선의 도는 주유천하에도 미치지. 나라를 지키고 학문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산천을 유람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도 향선의 도리니 말이야.”

“와아아.”

“말 타고 남산 정상에 오르면 그것이 구름 타는 것과 진배없지. 발아래 깔린 구름을 보면서 일출을 보면 그게 또 어지간한 장관이지.”

“화아아.”

홍의는 피식거리면서 매의 눈에 동공을 찍었다.

“지금부터라도 검법을 연마하고 한자를 익히거라.”

“에엑? 한자가 고구마냐, 익히게? 나는 온종일 담벼락에 붙어서 말똥 치우느라 바쁜걸?”

“알을 깨고 나선다는 건 본디 약간의 성가심과 용기를 동시에 요하는 일이지.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무엇도 될 수가 없어. 이대로 우물 속 개구리가 되려느냐, 아니면 날개를 펼쳐보겠느냐? 자, 하늘 높이 띄워 봐라.”

연을 건넨 홍의는 휘파람을 불면서 선선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우물 속에 갇힌 용 한 마리를 알고 있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우물 속의 아이는 몸을 아주 옹송그린 채였다. 그토록 서러이 웅크린 모습이 안타까워, 재가 날리는 눈구멍이 가여워, 사방을 시시각각 조여 오는 벽이 한스러워, 차라리 우물 속에 함께 있어 주기를 택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을까.

“주군! 주구우운!”

그때였다. 어디선가 쇳소리 비슷한 음성이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홍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벼락 위로 어째 익숙한 꽁지머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홍의는 슬그머니 눈을 굴려 연을 띄우고 노느라 정신이 없는 삼덕을 살핀 후, 어색한 군기침을 두며 슬금글금 담벼락에 붙었다.

담장 위로 새옹의 얼굴이 쏙 올라왔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라 머리통이 방정맞게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홍의는 시큰둥이 팔짱을 끼웠다.

“주군! 주구운!”

“…지나가던 개미 똥구멍을 봤나. 아주 용천지랄을 하는구만. 어인 일이야.”

사택에 지낸 이후 매사에 별스러울 만큼 무디던 성격으로 돌아왔다. 홍의의 반응이 영 설미지근하자 새옹은 되레 더 놀랍다는 듯 침을 튀겼다.

“와, 이 사람 참말로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아. 뭣이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뭐?”

비스듬히 서있던 홍의가 순간적으로 몸을 바로 세우며 표정을 굳혔다.

“그게 참말이냐?”

“참이지요, 그럼! 지금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고요! 게다가 태자 전하께서, 태자 전하께서!”

새옹의 입에서 ‘태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홍의는 담벼락에 확 붙어 섰다.

“태자께서 왜?”

“태자 전하께서! 용안을 공개하셨습니다!”

“무어어어어어억?!”

홍의가 경악을 하다 못해 허공으로 확 솟구치는데 담벼락을 넘고도 남을 높이로 떠오르는 바람에 멀찌감치 지켜보던 삼덕은 연을 툭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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