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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저도 완전히 기함을 했다니까요! 전하께서 용안을 공개하신 것부터가 놀라운 일인데 아니, 대관절, 그리도 흉한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전하께서 그토록 어마어마한 절세의 가랑이셨다니! 눈을 두 번 비비고 세 번 비벼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
“참, 주군은 알고 계셨습니까? 전하의 눈동자가….”
“…벽안이신 것 말이냐?”
“예! 아, 역시 알고 계셨군요! 지금 성불이 끝나는 대로 즉위식을 거행하겠노라고 태자 전하께서 스스로 선포를 하신 상황인데요.”
새옹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 입 냄새. 홍의는 속으로 짜증이 났으나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현재 금성에서 그 이질적인 눈동자의 빛깔 때문에 정당성 논란에 휩싸이셨지 뭡니까. 정통 쪽에서 주도한 모양이에요.”
“…정당성 논란이라니?”
“아우, 차마 입에 담기도 망극합니다. 황후께서, 서역 사내와 간통을 하여 황족으로 속이고 태자로 내세웠다는 억측이, 금성 내에 파다합니다요.”
“허어. 그런 불경하고 불충한…! 혹 미함 공도 이를 알고 계시느냐?”
“현재 미함 공께서는 태자 전하의 곁을 보위 중이십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정통의 중심인 미함 공이 배신을 때렸다며 다향원마저 왈칵 뒤집어졌습니다.”
“…….”
대체 금성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홍의는 갑작스레 너무도 많은 사건을 접해 들어서인지 머릿속이 혼란하여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득득 물어뜯었다. 그때 뜨락 너머의 본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새옹이 그대로 쏙 담벼락 뒤로 사라졌다.
“홍의!”
해운이었다. 담벼락에 붙어 있던 홍의는 서둘러 바지춤을 내렸다.
“…게서 뭐하느냐?”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해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홍의는 최대한 독사처럼 웃었다.
“오줌 눈다. 네놈의 이 가당찮은 집구석에 나름의 보복을 가하는 중이지.”
“오, 개작아.”
“야 임마.”
너희 신통 놈들이 유달리 대물인 것이지, 자신은 평범한 크기라면서 홍의는 냉큼 바지춤에 고추를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해운도 상복을 입고 있다. 요 이틀간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입궐해 있느라 그랬던가 보다.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 게 사실이냐?”
홍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운은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어째 이를 갈았다.
“그래, 이틀 전 이경에 승하하셨지, 빌어먹을.”
이윽고 홍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때 그 무산 선녀가 황태자였더냐?”
“어, 이제 알았느냐?”
“아, 이 새끼가 진짜.”
홍의와 해운은 동시에 다른 마음 다른 뜻으로 마주 웃었다. 하하하. 하하.
현재 다향원이 난리가 난 것도 어쩌면 당연지사한 일이다. 태자의 외모에 감복한 몇몇 향선들은 이미 발닦개를 자처하여 대궁 앞에 모여 한평생 군신의 의를 맺기를 학망하였다. 그마마한 미모였다. 해운은 특히 자신의 입으로 틈만 나면 까 내렸던 태자의 낯짝이 알고 보니 자신보다 훨씬 아름다웠단 사실을 처음엔 인정키 힘들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내 그간 그분의 외모를 비하하고 헐뜯었던 것이 어리석은 과오였음은 인정하지. 허나 이 시국에 용안을 공개하신 것은 크나큰 무리수였어.”
“…그게 무슨 말이냐?”
“이대로라면 전하께서 안온히 옥좌에 오르지 못하실 거란 이야기다. 이에 정통뿐만 아니라 신통들의 견제도 한층 심해졌거든. 뭐 너도 태자가 황제가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오늘내일 버티고 있는 모양이다만, 더 이상 헛된 희망일랑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넌 내 거니까.”
“……?”
진짜 뭐라고 하는 거지? 홍의는 살면서 들어 본 말 중 가장 말도 안 되고 기도 안 차고 엿 같은 말을 들은 듯하여 개가 몸을 털듯 귀를 털었다. 그러기 무섭게 해운이 손을 거꾸로 들어 손톱으로 느리게 홍의의 뺨을 훑어내렸다.
“오늘 밤엔 뒷물 지고 기다려라.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으니 말이야. 이 동역에서 국상 중에도 오입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가 아니냐, 벽해는.”
“…….”
아무래도 요 이틀 새 너무 많은 사건이 동시다발로 터져 더욱이 제정신을 상실한 듯했다. 담벼락에 붙어 선 홍의의 등에 마른땀이 솔솔 돋았다.
***
요즘 검둥개들 짖는 소리가 하늘을 뚫을 듯 요란한 데엔 여러 원인이 있었다.
금성에서 가장 인적 드문 곳에 놓여 한가롭고 고요하던 태자궁에서, 금성의 중심이자 가장 많은 이가 오가는 대궁으로 막사가 옮겨지는 바람에 개들은 심히 예민한 상태였다. 궁인들의 끊임없는 발소리와 말소리, 낯선 공기, 쉴 틈 없이 오가는 낯선 인간들의 냄새는 가뜩이나 예민한 개들의 코와 귀를 연해 자극했다.
“태자 전하의 눈동자가 사금파리 같은 금 알갱이를 머금은 푸른 물빛이라는군.”
“태자 전하의 미모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고 졸도한 자가 있다더군.”
“태자 전하께오서 자신의 아름다움에 현혹된 문무의 백관들이 행여 정사를 게을리할까 염려되어 지금껏 옥안을 감추어 오셨다 하니, 그 인고와 정백의 시간을 일개 필부인 우리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황태자 전하의 미모 한번 구경하겠답시고 문지기들에게 돈까지 지불하고 대궁 앞을 점거한 문무백관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다향원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가 않은 고로, 특히나 사염이 땅을 치며 홍의 그 더펄머리 쌍놈보다 더 빨리 자신이 지밀에 들어갔다면 황송한 신금이 응당 저에게로 향했을 것이라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흐르고, 대궁으로 적을 옮긴 태자는 상복을 벗고 예복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본디 태자의 용안을 아는 자는 수족과도 같은 화경과 옥지, 단둘이었기에 태자의 용포 정제나 식사 시중, 목욕 시중부터 갖은 잡일까지 총괄하며 도맡던 옥지는 이제 사정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명일 용포를 펼쳐 든 것은 언젠가 태자궁 침전에서 홍의를 욕보였던 쫑쫑과 섬섬이었다.
막 머리 손질을 마친 태자는 귀 끝을 스치는 낯선 손길에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짐짓 인상을 썼다.
“전하, 혹 불편하시옵니까?”
눈치 빠른 옥지가 곁에 와 속삭여 물었다. 태자는 여전히 아래를 보며 대꾸했다.
“아냐. 옥지 넌 사저로 가서 며칠 좀 쉬라는데 왜.”
바늘에 실처럼 따라붙으며 갖은 시중을 들던 옥지를 이제는 좀 편편히 쉬게 해 주고픈 상전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계속 닭고집을 부리며 옥지는 재차 간하였다.
“혹여 불편하시오면 이 아이들을 물리고 쇤네가 받잡겠사옵니다. 편히 하명하소서.”
태자는 물러나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한 번 쳤다. 옥지가 망극한 표정으로 뒷걸음쳤다. 그가 양팔을 너르게 펼쳐들자 종종걸음 다가온 쫑쫑이 태자의 손끝에 소매를 걸어 당긴 뒤 요대를 갈무리하러 앞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태자의 눈동자가 아래쪽을 향하여 시선이 딱 마주쳐 버렸다.
“…….”
“…….”
쫑쫑은 감히, 황태자의 면전을 먼저 피하지 아니하고 행여 놓칠세라 빤히 쳐다보기에 이르렀다. 넋이 거의 나간 듯했다. 가뜩이나 면사 벗으면 낯가리는 골샌님이 튀어나오는 성정인데, 한참 아랫것이 대놓고 뚫어져라 바라보니 태자는 당황스러워 멀거니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차츰 짜증스러워,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싸늘한 눈초리로 내리뜨니 쫑쫑의 얼굴이 왈칵 달아올랐다.
“소, 송구하나이다! 전하!”
쫑쫑이 오체투지를 하는 소리가 고요한 내실에 쿵 울려 퍼졌다. 제 무르팍이 더 얼얼한 기분에 지켜보던 화경이 얼굴을 찍 오그렸다.
“일어나라.”
“송구하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죽지 말고 옷이나 입히라고.”
“예, 전하!”
오뚝 일어선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갰다. 옥지는 입을 가린 채 어딘지 오묘하게 눈을 빛내고 섰을 뿐, 딱히 다가들어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불타는 고구마 같은 얼굴의 쫑쫑이 허둥지둥 요대를 매려 했지만, 자꾸만 손이 떨리고 엇나가 그만도 일다경 가까이 허비하였다. 그렇게 간신히 정제를 마치고 후다닥 내실 밖으로 나온 쫑쫑은 거의 다리 힘이 풀려서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섬섬의 몸에 기대었다.
“…보았니?”
“…보았어.”
“사람이 아니야.”
“옥으로 빚은 듯….”
“하…. 그 우아한 눈동자를 깜박깜박하는 것 보았어?”
“보석이 박힌 듯….”
“아이고, 내가 우리 태자 전하께서 이토록 절세의 가랑인 줄 알았다면 미리미리 눈도장 좀 찍어 두는 거였는데!”
망연히 맞장구나 치던 섬섬이 스윽 팔짱을 끼우고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한데 너, 지난번에 태자 전하한테서 개밥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았어?”
“개밥 썩는 내 좋아하네. 향긋한 난향만 나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태자 전하 팔뚝에 벌레집 같은 구멍이 송송 나 있다고 하지 않았니?”
“구멍 같은 소리 하네. 구멍 나게 맞고 싶니?”
마침 태자와 옥지가 침전을 나섰다. 두 시비는 언제 그렇게 괄괄하게 입씨름을 했냐는 듯 새침하게 입을 다물고는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텄다.
낭하를 걷는 내내 말이 없는 태자의 옆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걱정스러워 두고 보던 옥지가 다가들었다.
“전하… 옥체 미령하시거든 상참을 미루고 태의부터 들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태자가 굳은 등허리를 펴고 똑바로 앞을 보았다.
“아니다. 근래 운신과 체련을 게을리하여 기가 좀 쇠한 것뿐이야.”
많은 상황이 바뀌었다. 일이 이리 되어 기쁘다고, 지긋지긋한 면사를 벗어 던지셨으니 보는 내 속이 다 시원하다고 좋아하였던 옥지도, 처음엔 기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차츰 시야에 맺히기 시작하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먹는 것마다 얹혀 아예 물밥을 들이켜면 그조차 쉬이 소화할 수 없는 침불안식불안의 상태, 외로운 고립 무중. 삼자인 자신조차 이토록 매사에 전전반측할진대 태자 전하 당신께선 오죽하시겠는가.
태자궁보다 열 배는 너르고 화려한 대궁을 나서니, 대기 중이던 미함이 읍을 올렸다. 그 뒤로 스무 명이 넘는 황제의 수행인들이 차양을 든 채 중정을 메우고 있었다. 면사 없는 맨 얼굴로 불화살처럼 쏘이는 사람들의 시선 세례에도 태자는 최대한 침착하고 담담한 얼굴을 하려 애썼다. 넓고 큰 소매 안, 식은땀을 쥔 주먹이 한차례 잘게 떨렸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이,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이, 이름 모를 서역 노비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이미 기정사실로 믿어 버린 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벼 대는 이… 반응도 갖가지요 표정도 각색이었다. 태자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지나쳐 선두에 섰다. 옥설처럼 새하얀 얼굴로 차양이 만들어 낸 그늘이 서늘히 드리웠다.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일사불란 따라붙는 수십 개의 발소리가 그의 심신만큼이나 무겁게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