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99화 (99/111)

#99

“태자 전하 납시오!”

편전에 양 갈래로 갈라져 서 있던 문무관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읍을 올렸다. 와중에도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태자의 얼굴을 보려고 있는 힘껏 들창눈을 치켜뜨는 이도 있고, 다른 곳을 보는 척 어섯눈을 돌리는 이도 있었다. 태자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표정을 고수하며 빠른 걸음으로 편전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황금 옥좌에는 황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편전의 중앙으로 거침없이 걸어 드는 태자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

“…….”

싸늘한 침묵이 좌중을 압도하였다. 어느덧 계단을 올라 지척에 다가든 태자의 기다란 인영이 황후의 이마에 그늘을 씌웠다. 황후가 고개를 든다. 옥좌의 팔걸이에 편안히 걸친 섬섬옥수 안에서 새까만 염주가 절그럭절그럭 굴렀다.

“어마마마.”

과공은 비례일지니 황후를 향한 태자의 읍은 고개만 살짝 까닥임이 다였다. 황후는 눈앞으로 표표히 펼쳐지는 속눈썹과 시원시원하게 일자로 뻗은 눈썹을 보았다.

…분명히 오는 상참에는 당분간 참석지 말라, 태자에게 미리 하교를 내린 바였다.

황후의 입매가 경련하듯 비틀렸다. 아아, 기어이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저 흉측한 벽안이 우세스러워, 가만히 보고 배겨 낼 수가 없는 것이다.

태자는 똑바로 서 어깨를 편 채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기민하게 알아챈 황후가 염주 굴리기를 멈추었다.

“…….”

이윽고 황후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화답하고, 스르르 일어섰다. 그리고 옥좌를 향하여 몸을 틀고 오른손을 펼쳐 들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몸짓이었다. 태자는 대꾸 없이 옥좌에 앉았다. 황후가 물러나 왼쪽에 자리한 좌석에 자리를 잡자, 신료들에게서 숨을 길게 풀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위병들과 섞여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던 화경은, 문득 땀에 젖은 손 때문에 쥐고 있던 창대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힐끗힐끗 모두의 눈치를 보다가 바지에 손바닥을 슥 닦아 내었다. 옥지의 콧잔등에서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대윤 공, 북부 국경에서 큰 접전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예, 태자 전하. 야인들을 통합한 야만인들이 나라가 뒤숭숭한 틈을 노려 진격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북부 국경에서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재작년의 해충 피해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 싸워 보지도 못하고 굶어 죽는 병사가 부지기수라 하옵니다.”

“당장 병사들을 위한 진제소를 설치하여 곡물을 지급하고, 각궁의 재료인 물소 뿔을 보급하도록 하세요.”

“명 받잡겠사옵니다.”

“태숙 공, 남부 지방 토호들의 농지 은결(隱結, 탈세를 위해 숨긴 땅)로 인한 세수의 안건은 어찌 처리되었습니까?”

“명하신 바대로 현재 남부의 누락된 경작지 오십만 결을 찾아내 조세 대상에 포함한 상태이며, 이에 대한 착수로는….”

태자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너르디너른 편전 끝까지 시원시원하게 울렸다. 선황제의 승하 후 첫 정무 회의가 별고 없이 진행되자 지켜보던 옥지와 화경은 그제야 안심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

짜악-!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태자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씨근거리며 알알한 손바닥을 붙든 황후가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태자는 얻어맞은 볼의 안쪽을 혀로 밀어내며 천천히 황후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한기가 공기를 눌렀다.

“배은망덕한 놈.”

“…….”

“당최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게야? 면사를 벗다니, 저 능구렁이들 앞에 고 숭한 눈알을 스스로 드러내다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통을 처박아도 유분수지, 네가 진정 제정신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편전 건너의 집무실이었다. 신료들이 모두 물러나자 그제야 윽박아 둔 심정을 마구발방 토로하는 황후의 질끈 문 잇새로 붉은 독기가 철철 흐르는 듯했다.

“감히 이 어미의 명을 거슬러? 네가, 네가!”

분노를 이기지 못한 황후가 악다구니를 쓰며 주변의 잡기를 집어던졌다. 태자는 발악하는 어미의 팔목을 침착하게 붙들었다. 황후는 아찔한 어질증을 느끼며 아들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즉위식을 거행하겠다고…?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고? 여운아, 네 어찌 어린 날 소꿉을 놀듯 세상을 대한단 말이냐…!”

뜨거운 눈물이 빠르게 황후의 커다란 눈시울을 휘적셨다.

“세상을 몰라도 어찌 이리 모르느냐? 지금 여론이 어떠한지 진정 모르는 것이냐? 면사 벗어 밝아진 눈으로 똑똑히 보라지! 정통 놈들이 입을 모아 떠들기를, 내가 서역의 오랑캐와 눈이 맞아 네놈을 싸지르고, 그를 숨기려 스무 해가 넘도록 면사를 씌웠다는구나! 그러한가? 정녕 그러해? 내 어찌 너의 정통성을 지켜 왔는데, 내 피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내 꽃 같은 젊은 시절 다 바쳐 가며 너를 만들었다!”

“…….”

“어찌어찌 즉위식을 치른다 하여도, 그 지긋지긋한 정통의 개들이 틈만 나면 이를 드러내고 사사건건 너의 혈통을 문제 삼아 트집할 것이다. 평탄대로였던 앞길에 네놈 스스로 더러운 진흙 무더기를 끼얹은 것이야!”

바락바락 고성을 내지르던 황후가 이내 머리를 부여잡고 이를 갈았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진흙에 발목이 잠기겠지. 옷깃에는 더러운 흙탕물이 번질 테고 기어이 그 늪 같은 진흙물에 온몸이 잠겨 숨도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르겠지. 아아, 이것이 그저 어미의 분풀이 같으냐? 두고 봐라. 치기 어린 너의 오만이 어떤 처참한 지경을 불러일으킬지, 내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 …금수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갈근갈근 내쏘는 거센 탐욕의 기운이 잔상처럼 눈앞에 흔들렸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도렷했다. 아들의 앞에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을 뿌려 놓고는 일말의 미련 없이 돌아서는 황후의 치맛바람이 태자의 사무친 가슴에 삭풍처럼 에였다.

“…….”

문득 태자는 명징한 햇살이 옆얼굴을 어루더듬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활짝 열어 둔 지게문 밖, 끈 떨어진 연 하나가 팽팽한 하늘을 하릴없이 날고 있었다.

***

몸이 절로 거풋하다. 웬일로 홀로 걷고 있던 옥지가 입꼬리를 당겨 뱅그레 웃었다. 항상 태자를 지척에서 섬기며 갖은 잡일을 도맡느라 피로에 찌든 눈 밑의 시커먼 기미도 거의 사라졌다. 태자께서 존용을 드러낸 후, 시비들이 앞다투어 태자를 섬기겠노라 진을 치는 바람에 요즘은 영 할 일이 없었다.

‘아아, 날씨 좋다.’

장옷을 내리고 하늘을 가늠하던 그녀는 이내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성 샛문을 빠져나갔다.

도경의 색주거리를 지나, 초가와 옥저가 드문드문 모인 아랫대에 들어섰다. 주변에 보는 눈은 없는지 홱홱 고개를 돌려 살피고는, 한 아담한 기와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엄니, 안에서 쉬시라니까는 뭐던다고 예까지 기어 나와 손을 벌리오? 그만 되었으니 약이나 자시고 낮잠이나 한숨 주무시오, 응?”

“아이고, 죽으면 백날 잠만 잘 것을 왜 이리 성화냐? 인 줘라, 내가 다리 부종을 앓는 것이지 눈까지 병신된 것은 아니다.”

“엄니가 손대면 다시 내가 도로 해야 돼. 괜히 나서서 일 만들지 말고 디비져 주무시라고, 그냥.”

대청에서 드문드문 새는 익숙한 음성에 옥지는 쓰고 있던 장옷을 내렸다. 마루 끝에 요강을 밀어 놓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책 더미에 싸여 있던 녹빈이 옥지를 발견하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고, 옥지 왔니?”

“반말하지 마시오.”

이제나저제나 냉정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녹빈은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거 동갑내기 처지에 반말하며 살갑게 지내면 좀 좋은가 말이다. 마침 부엌의 시렁에서 가마솥을 돌보고 있던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와서는 옥지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일전에 황제의 탕약을 담당했던 시녀 근심이었다.

“옥지님 오셨습니까?”

“그래. 별고 없었느냐?”

“히히, 별고가 있기는요. 이 집 주인장이 말본새는 좀 험악스러워도 인심이 넉넉하시어 궁기가 남아돌질 않습니다. 쇤네 살 오른 것 좀 보셔요.”

근심은 확실히 대궁에 있을 때보다 해말쑥한 낯짝을 들어 올리며 토끼 이빨을 드러내고 순하게 웃었다. 옥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미소 짓는데, 마침 책의를 씌운 서책을 명주실로 엮고 있던 녹빈이 커다란 목소리로 퉁을 질렀다.

“근심이 너는 살림 돕는다고 나대지 말고 그 징그러운 손톱이나 어찌하거라. 어휴, 시커멓게 썩은 것이 꼭 죽은 사람 손발톱을 보는 것 같다니까.”

그러자 금세 풀이 죽은 근심이 얼른 행주치마 아래로 흉한 손을 감추었다. 찌릿한 눈길로 녹빈을 흘기던 옥지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주간으로 가 그릇 부실 때 쓰려고 모아 둔 쌀뜨물을 바가지로 퍼서 내왔다. 근심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여기에 손을 담가 보아라.”

“예? 쌀뜨물은 난데없이 왜요? 혹 여기에 손을 담그면 손톱 색이 고와지기라도 하는가요?”

“물론 단박에 본래의 살성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민가의 속신대로 매일을 정성스레 적시면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니? 정 효과를 보고 싶거든 불려 놓고 조금씩 손톱을 갈아 보도록 하자꾸나.”

“그리고는 봉숭아물을 들여 볼까요? 백반을 함께 쓰면 어지간히 붉어져 훨씬 보기 좋을 것이어요.”

문득 울리는 음성에 돌아보니, 이제 막 문간으로 들어선 연홍이 활짝 웃고 있었다.

“연홍이 네년은 너는 또 뭐 한다고 예까지 왔어?”

연홍은 소쿠리에 받치고 온 감자와 떡을 대청 위에 내려놓으며 녹빈을 향해 눈을 흘겼다. 닦인 방울처럼 어여쁜 눈은 매섭게 치켜떠도 곱기만 했다.

“겸사겸사 놀러 왔다,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느냐?”

“할 일 없으면 너한테 죽고 못 사는 아부지랑 당혜나 팔아라, 이년아.”

“당혜는 어제 초저녁에 동났다, 이놈아. 백 섬지기 밀밭에는 낟알이 가득 맺혔고, 이제 재산도 남부럽지 않은걸?”

녹빈이 껄껄 웃었다.

“그래, 상황이 그리되니 네 아버지는 가죽 다듬는 일은 뒷전이고, 하나뿐인 딸자식 좋은 혼처 잡겠다고 매파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바쁘다면서?”

“뭐 나 좋다는 사내야 줄 세우면 장터 한 바퀴를 돌고도 남지. 어떤 놈팡이를 골라잡을까, 꽃 점 치며 톡톡 따 젖히면 족한 것을?”

“해서, 마음에 찬 사내는 있느냐?”

연홍은 치마를 걷어 가랑이 사이에 휙휙 끼우고 다라지게 앉아서는 여문 솜씨로 책 엮는 걸 도우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나는 평생 아버지나 공양하며 살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때 불가에 귀의하여 여래님 모실 거고.”

여인들이 모여 앉아 서로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책을 엮고 쌀뜨물에 손을 씻었다. 병든 몸 이끌고 기어이 품앗이를 하겠다며 달려드는 노모와 녹빈의 투덕투덕 잔소리가 그림처럼 소담한 집을 정답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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