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0화 (100/111)

#100

즉위식이 명일로 다가온 밤.

대윤의 사저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홍의는 슬그머니 내실 밖으로 버선발을 빼었다. 숨죽이고 주변을 홱홱 살피는 홍의의 코 밑으로 검은 보자기가 야무지게 묶여 있었다.

열 발쯤 앞을 걸으며 앞서 길을 봐주던 삼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휙휙 손짓을 하였다. 홍의는 비장하게 그 뒤를 쫓아 발소리가 나지 않게끔 종종걸음을 쳤다.

어두운 밤 작은 호롱불 하나 들고 뒤뜰의 담 앞에 당도한 사내와 아이종은, 내내 바지춤에 은밀히 꽂아 두었던 구리 수저를 슥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안 들킨 게 용하다 싶다. 매일 밤 담장 밑을 숟가락으로 판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덕이 작은 몸 쪼그리고 앉아 호롱불을 비춰 주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바위를 치워 내자 아이 하나가 들어가 누울 법하게 파 둔 구덩이가 드러났다. 홍의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숟가락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세를 잡고 앉아 퍽퍽 단단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삼덕은 하품으로 짝짝 입을 벌리며 그 모습을 구경하였다.

“내가 예상하기로는 내년 이맘때나 빠져나갈 성싶음.”

“닥치고 불이나 잘 비추어라.”

“한데 말이야, 나가서 무얼 어쩌려고?”

“어쩌기는.”

열심히 수저질을 하던 홍의가 이내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턱에 주름을 새기며 울먹울먹 돌아보았다.

“나도 우리 전하 즉위식 보고 싶다고오… 흥엉.”

“아아, 즉위식? 내일 금성 앞 광장에서 열린다는 그거?”

“그래, 이놈아. 헌데 심술퉁이 해운 놈이 절대 이곳을 나서는 걸 허락지 않을 테니, 내 이리 해서라도 빠져나가려는 것이지.”

“응, 그래. 내년에.”

“닥치고 불이나 잘 비추랬다.”

팍! 팍! 팍!

열이 오른 김에 한 수저질에 흙 한 주먹씩 올차게도 파내던 홍의가 문득 되똑한 코끝을 씰룩거렸다.

“큼큼. 음…? 이게 무슨 냄새지?”

“…아재.”

“응?”

“저쪽 있잖아. 안채 쪽. 엄청 밝아, 대낮처럼.”

삼덕이 가만히 말했다. 어느새 우두커니 서서는 뒤쪽을 향하여 작달막한 손가락을 가리키는 채였다. 홍의는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이야!”

“사랑채에 불이 났다!”

“물을 퍼 올려라!”

천우신조였다. 홍의가 지내는 별당을 넘어 연못을 사이에 둔 본채에 화마가 든 것이었다. 사택 둘레를 지키던 군부의 병사들이 일제히 안채 쪽으로 달려가는 듯, 사내들의 고함과 발소리가 잇달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홍의는 재빨리 삼덕을 어깨에 들치고 바위를 디뎠다.

“나도 가는 거였어?”

“허면 여기서 평생 비질이나 하고 살 테냐?”

“오오, 아재가 나 밥 먹여 주게?”

“아니, 네 밥벌이 네가 해라. 난 데려가만 줄 테니.”

삼덕이 와락 홍의의 목을 싸안았다. 홍의는 바위를 밟고 단숨에 담을 타넘었다. 바깥에 착지하여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이제 내려, 인마. 캑. 목 그만 졸라, 새끼야!”

“히히, 향선 목은 단단한 줄.”

삼덕이 해맑게 읊조리며 스르르 팔을 풀고 내려왔다. 아이의 왕얽이짚신이 바닥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웬 놈이냐!”

“헉.”

“헉.”

홍의와 삼덕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마침 불이 난 현장 쪽에서부터 이쪽으로 병사 열댓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장검을 들고 말이다.

“야, 합체!”

홍의가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가리키자 삼덕은 다시 와락 매달렸다.

“…으아아아악! 으가아아악!”

“…왜, 왜 이래? 야, 인마!”

홍의는 기함을 하였다. 아이가 난데없이 비명을 내지르더니 아주 목말을 타고 올라 깡깡한 허벅다리로 모가지를 조여 댔기 때문이다. 암만 아이의 허벅지여도 그 힘이 워낙 왁살스러워 혹시 이놈이 해운이 심어 놓은 마지막 끄나풀이 아닐까 싶은 지경이었다. 이제는 아예 목을 다리로 조르다 못해 손바닥으로 눈까지 가리는데, 움치고 뛸 구석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함께 생난리를 부렸다.

“아악, 이놈아, 일단 이것을 놓아야 달아나든 말든 할 것 아니냐! 이러다 진짜 칼 맞는다!”

“으아앙! 저거 봐! 저거 봐, 아재!”

“아니 네가 손을 치워야 보지!”

삼덕이 손을 풀고는 홍의의 목을 잡고 빼각, 정면으로 돌렸다. 그제야 홍의의 휘둥그레한 눈에 든 것은, 검둥개 무리였다.

이빨을 드러내고 매서이 달려드는 검둥개 무리에 혼비백산하던 아이가 아주 홍의의 정수리에 올라탈 지경이 되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데, 쏜살같이 달려든 검둥개들은 그대로 홍의와 삼덕을 지나쳐 맞은편에 달려오던 군부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홍의 님!”

“주군, 괜찮으십니까?!”

뒤이어 익숙한 태자궁의 병사들이 보였고, 개중엔 화경과 새옹, 그리고 무동들도 뒤섞여 있었다.

“어? 어어, 괜찮지 그럼.”

홍의는 여전히 아이의 다리에 목이 졸리는 채로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 어찌 여기 나와 계십니까? 지금 막 저희가 쳐들어가려던 참인데? 아니 그 머리통에 상투 대신 달고 계신 아이는 또 누구고요?”

“뭐, 이러저러 많은 일이… 야 이놈아, 이제 좀 내려오지?”

검둥개들의 등장에 너무도 놀란 삼덕은 흐느적흐느적 아래로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홍의는 혀를 쯧쯧 차며 아이의 뒷덜미를 집어 새옹에게 안겨 주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연통도 없이 예까지 어인 일이냐? 불 지른 것도 너희들 짓인가?”

“원주 미함 공으로부터 홍의 님이 대윤 공의 사저에 구금되어 계시다는 보고를 받고 이에 모시러 왔습니다. 곧 군부의 병사들이 들이칠 테니 어서 길을 잡으시지요.”

“…미함 공의 명으로?”

전하의 명이 아니라? 뒷말은 삼키고 보는데 화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함 공은 현재 태자 전하를 호위하느라 금성을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 저희들끼리 나섰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랬겠구나. 허면 어서 금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어쨌거나 태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홍의가 달떠 오르는데, 화경이 찬물을 끼얹었다.

“아닙니다. 오늘 밤은 도경을 벗어나 몸을 숨기시고, 내일 해가 뜨는 즉시 홍안 상점으로 가시라는 미함 공의 전언입니다.”

“…홍안 상점?”

홍의가 흠칫하는데, 마침 새옹의 품에 안긴 삼덕이 해맑게 물었다.

“홍안 상점이 뭐야? 무엇을 파는 곳이야?”

“…….”

“좌우지간, 알겠다. 일단 미함 공의 명대로 하지.”

“붉을 홍 자에 얼굴 안! 맞지? 나 요즘 한자 배우잖아. 붉은 얼굴의 상점이라니 당최 무엇을 파는 곳일까?”

“…….”

“하, 한시가 급하니 어서 출발하자. 저 말 많은 꼬마 놈에게도 말을 내어주도록 해라.”

“예, 예, 홍의 님.”

갑자기 말을 더듬고 허둥거리기 시작하는 어른들을 보던 삼덕은 이내 난생처음 높은 말 등에 올라 홍안 상점 따윈 까맣게 잊고 우와아, 하였다.

***

“상쾌하도다.”

하늘이 청명하였다. 요 며칠 날씨가 꾸물꾸물 할 때마다 관절 마디마디가 저릿했던 느낌도 오늘은 없다. 짜증을 돋게 하던 두통도 사라졌다. 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꿈자리만은, 그 지긋지긋한 꿈만은 뒤숭숭하게 그녀를 옭매었다.

잠시 창밖의 어느 때보다 맑게 갠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던 황후는 이내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가장 오래된 벗이자, 가장 충직한 신하이자,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연인인 대윤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곧 즉위식이 열릴 것이니 어서 채비를 하셔야지요.”

“…대윤, 나는 이토록 화창한 날씨가 되레 두렵습니다. 어떤 참극이 일어난들 그것은 너만의 비운일 뿐이라는 듯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운 세상이 말예요.”

별안간 씁쓸히 웃는 황후의 얼굴로 소녀 때 품었던 순수가 짧게 스치는 듯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는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그럼에 눈부시게 아름다워, 대윤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날이지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날이 아닙니까.”

“…백성들은 듣도 보도 못한 벽안에 경악할 겁니다. 정통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눈동자는 태자에게 독이 될 뿐이에요. 어찌 드러내었을까요. 어찌 이 어미의 마음을 그토록 몰라주는 걸까요.”

대윤은 한숨을 깊게 놓았다.

“이번 태자 전하의 일에 오래도록 마음 졸이실 필요 없습니다. 백성들의 냉랭한 반응을 보면 분명히 소치를 깨닫고 깊게 후회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마마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윽고 집무실 문이 열리며 키 작은 시비 한 명이 들어섰다.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빗으며 거울에 비치는 시비의 얼굴에 대고 담담히 물었다.

“그래, 초오는 다 처리하였느냐.”

“예, 황후 마마. 그를 운반해 왔던 궁인들도 모두 금성 밖으로 내보내어 확실히 처리하였사옵니다.”

잠시 황후의 시선이 아래로 흘렀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부복하여 있던 시비의 손끝에 머물렀다.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쯔…. 네 전임이 손톱이 지저분하여 태자에게 살해당한 것을 모르느냐? 머리가 잘리고 싶어?”

시비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어물거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마마! 초오의 독물이 빠지지 않아 이러하옵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하겠사옵니다.”

“그 독한 것을 맨손으로 만지니 그 꼴이지. 머리들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지, 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빗질을 하던 황후의 얼굴에서, 다음 순간 웃음기가 싹 가셨다.

황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비를 돌아보았다.

“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예?”

의미를 알 수 없는 칙문에 시비가 고개를 들었다.

“손톱이 어찌 그리되었다고?”

“마마께서 쇤네에게 맡기신 명을 수행하다… 초오 물이 들어….”

“초오를 다루면 손톱이 그리 썩은 것처럼 변질한다는 말이더냐?”

“그, 그러하옵니다.”

“…….”

황후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전신을 흐르던 피돌기가 멎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대윤조차 그런 황후의 반응에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며 표정을 굳혔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황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처음 시비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기이하다고 생각되긴 했다. 태자가 아무리 결벽이 심하다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사소한 이유를 붙여 궁인들을 핍박하거나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가…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황후가 허공을 향하여 망연자실하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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