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2화 (102/111)

#102

“금성 중심가에 나와 본 일이 있느냐?”

“응. 지난번에 도련님이 가계주 끊으러 가시는데, 짐 들고 쫓아다니면서 엿도 얻어먹고 떡도 얻어먹고 했지!”

“허어, 해운 놈에게 그런 아량이 있었단 말이야?”

중심가를 벗어나 시전에 들어서니 평시보다 유난히 인파가 많고 거리가 들떠 왁자하였다. 각국으로 장사를 나갔던 보부상들이 배를 타고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홍의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밀어 넣은 삼덕이 이어 말했다.

“해운 님은 뼛성이 잦아 그렇지, 내가 재게 굴면 장하다고 비싼 당과도 자주 주셨는걸. 헌데 그 성질머리 더러운 단점이 너무 커서 나머지 장점을 죄 잡아먹지 뭐야?”

확 터진 홍의가 배를 잡고 소리 없이 파학 웃어 넘어가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새옹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제부터 느낀 것이지만 열 살배기 동자와 죽이 저리 잘 맞아서야 원, 어딘가 모자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가.

“허면 삼덕이 너는 태자비 마마와도 아는 사이냐?”

“저기, 그분은 나 태어나기도 전에 금첩지 받아 입궁하신 분이거든?”

홍의가 또 꺽 넘어갔다. 이제는 삼덕조차 이 아재가 미쳤나 보다하고 안쓰러운 눈을 했다. 그때 상인들이 갓 밭에서 뽑은 싱싱한 채소를 팔기 위해 가판과 옹이를 지고 지나쳤다. 그 바람에 서로 손을 놓치고 허우적거리느라 화경과 새옹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우왕좌왕하던 삼덕은 문득 흙바닥을 나뒹구는 종이 하나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헉.”

종이를 들여다본 삼덕의 두 눈이 단숨에 회동그래졌다.

“우와아아, 진짜 잘생겼다. 천인 아니야? 천인?”

그런데 그리 시전을 나도는 종이가 한두 장이 아니었다.

때마침 홍의의 앞을 바쁜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던 젓갈 장수가 돌연히 불어오는 꽃바람에 잠시 더위를 식히려 멈췄다. 그가 송골송골 돋는 땀을 닦으려 손등을 들어 올렸을 때, 비린내 잔뜩 밴 손아귀를 스스럼없이 벗어난 종이가 팔랑팔랑 홍의의 이마를 스쳤다. 어쩐지 그 장면이 유달리 느리게 보였다. 홍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손을 뻗어, 어렵지 않게 종이를 잡았다.

익숙한 손때가 묻은 화선지였다. 아닐 리 없었다.

짙은 먹빛의 눈동자가 자신이 손수 그려 낸 청아한 물빛의 눈동자를 끈질기게 견주어 보았다. 여러 손을 탔음에도 물감 하나 번지지 않고 아름다운 색을 뽐내는 까닭은, 어느 얼뜨기 화공이 매일같이 밤잠 줄이고 쉴 짬 들여 가며 좋아하는 사내의 얼굴을 한 장 한 장 백반으로 소중히 마무리한 덕분일 터다. 그때만 해도 모든 게 간명하였다. 그림 속 묘랑은 누구보다 투명하게 웃었고, 화공은 밤마다 아무도 몰래 그이를 붓 끝으로 옮기며 천진한 설렘에 겨웠다.

종이에 새겨진 푸른 눈을 더듬던 홍의의 손끝이 아스라이 떨렸다. 끼끗한 계곡물에 멱을 감다 일시에 마주쳤던 순연한 눈, 손차양 아래 바싹 다가든 얼굴에 놀라 반짝 뜨이던 눈, 푸르른 녹음의 한복판에서 손수 나뭇가지를 젖혀 주며 돌아보던 눈, 초련(初戀, 첫사랑)에 벅차 가만히 들여다보던 눈, 담담히 전한 고맙단 인사 끝에 살며시 수줍은 미소가 어리던 눈, 그 모든 눈이 여기 깃들어 있었다. 켜켜이 쌓인 비밀스러운 시간과 기억과 온정과 추억이 울컥 물밀어 들었다. 홍의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재, 그러고 보니 여기가 홍안 상점 같은데?”

또렷이 울리는 삼덕의 목소리에 홍의가 깜짝 고개를 들었다.

인파로 발 디딜 틈 없는 상점 앞에는 백 명이 넘는 먹꾼들을 둥글게 앉혀 두고 진행하는 만담이 한창이었다. 여느 때보다 아름답게 치장한 녹빈이 웬일로 땟국을 벗고 멀끔히 차려입은 친우 중노미와 함께 미리 획책한 흰수작을 익살스레 주고받고 있었다.

“일순 조용하던 사방을 뚫고 도내기샘이 솟구치며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는데, 그때 벽해(碧海)로부터 날아온 벽룡이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을 띤 알을 둔 것이라!”

“오오오!”

“그렇게 알을 물어다 준 푸른 용은 잠시 차가운 밤하늘을 넘노는 듯하더니 마침 금성의 동쪽에 놓인 태자궁의 용마루에 앉아 일각을 쉬었고, 이어서 태자궁의 매화나무에 떠오른 자미원의 빛나는 별을 따라 삽시간에 사라졌다는군!”

“이야아! 자미성이라 함은 고왕금래가 일컫듯 태어나기 전부터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자만을 쫓아다닌다는 천운의 별이 아닌감?”

“말해 무엇 해? 한데 지금 윗대의 귀족들이 본인들 세를 지키려고 떠들어 대는 가증스런 유언비어를 들어는 보았나? 그들이 지껄이기를 태자 전하는 글도 제대로 못 읽는 까막눈에, 수틀리면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무뢰배 폭군이요, 반쪽은 서역의 천한 피를 타고나 천자의 정통성을 흐렸으며, 요사한 간신의 세치 혀에 휘둘려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는데! 하이고, 그게 지금 말이야 방귀야?”

“아니 그것이 진정으로 맞는 말인지, 아니면 한갓 입으로 뀌어 대는 방귀에 지나지 않는지, 어리석은 우리가 알 게 무언가?”

“우리 태자 전하가 누구신가? 지방의 관리들이 저희들 배부르고 등 따시자고 깨알같이 숨겨 둔 수백만 논마지기를 찾아내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시려 동분하시고, 또 허허벌판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름진 옥토로 만든 뒤 가난한 민인들에게 나누어 주려 서주하시고! 이토록 어지러운 정세에도 오롯이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하시는 성군을 우리가 믿어 주지 않으면 당최 누가 믿어 준단 말인가?”

“그도 그렇구만, 그도 그러해! 이제 황상에 오르실 태자 전하께오서 그간 벼르고 벼른 천안을 드러내어 면사를 벗는 순간, 온 나라가 화평해질 거라던 예언이 비로소 실현될 모양이로구먼!”

녹빈과 중노미의 장단에 먹꾼들도 다 같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새 몰려든 백성들까지 연호하였다.

이내 소고 가락이 울리며 인파를 헤치고 용의 머리와 꼬리를 쓴 광대들이 한바탕 극을 벌였다. 환호하는 민인들의 손에는 제각기 홍의의 그림이 들려 있었다.

“흠. 나는 정치니 뭐니 하는 말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보다 이게 제일 궁금한데…. 정말로 새 황제께서 이토록 아름답게 생기셨어?”

홍의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삼덕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기대에 찬 얼굴로 그림과 연극을 번갈아 살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럼.”

홍의는 응당 대꾸하며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어 해사한 햇살에 종이를 비추었다.

“감히 이깟 그림으로 다 못 담지, 그분 미모는.”

둥! 둥! 둥!

그때 성문으로부터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곧 즉위식이 거행되니 민인들은 속히 광장으로 모이시오!”

먹꾼들, 장사꾼들, 귀족들, 민인들이 한데 더불어 너나없이 금성의 중심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홍의가 삼덕과 함께 막 광장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 왕도를 걷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광장의 단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승려들이 양옆으로 부복하여 만들어 둔 인간 길에 푸른 용의 문양이 새겨진 벽해의 깃발이 꽂혔다. 백성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넋을 놓고 숨을 죽였다. 반짝반짝 부서져 내리는 눈부신 햇발이 그의 새하얀 이마에, 맵시로운 어깨에 닿았다. 그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의 풍경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청청하늘 아래 거대한 아름드리, 그 곁으로 붉은 나래를 흩날리며 걸음을 놓을 때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환상이 놓였다. 허허롭던 티끌세상이 한순간 푸르른 청산과 구릉으로 바뀌는 듯했다.

후드득!

만개의 꽃송이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백성들이 경외하며 흩뿌린 꽃의 인사에, 막 단을 오르려던 태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어 발 앞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선뜻 주웠다. 백성들이 놀라 물러났다. 마침 그 앞에 돌올하게 서서 지켜보던 분홍 댕기 늘인 계집아이의 볼이 꽃물 들듯 붉어졌다. 순흑의 머리칼을 죈 금붙이가 다시 높이 솟구칠 때, 바람 따라 난향이 흘렀다. 소문이 자자했던 푸른 눈동자는 진실이었다. 맑게 내쏘는 눈빛은 독처럼 아찔했다. 그는 가히 아름다운 신이었다. 신의 아름다움이었다.

태자는 만백성의 축복 속에 단상에 올라 황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금관과 옥새를 건네받았다. 모두가 진정한 용의 도래를 축원하며 눈물지었다.

“백성들이여!”

원주 미함이 소리쳤다.

“거친 파도가 멈추고 안식이 왔노라. 세상을 화평으로 이끄실 만파식안(萬波息眼)의 주인이시다. 이제 벽해는 새로운 신을 맞았으니 그로 하여금 능히 사해정밀(四海靜謐)하리라!”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일제히 내지르는 군중이 함성이 뜨거운 광명 아래 웅장하게 퍼져나갔다. 눈부신 엽월(葉月)의 마지막 날, 벽해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였다.

‘드디어 스스로를 찾으셨구나.’

홍의는 좁은 허구렁을 벗어나 하늘로 솟구치는 푸른 용의 환상을 본 듯하였다. 그가 곧 만파식(萬波息, 큰 파도가 일어 안식을 찾다)의 고운 물결, 여운(麗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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