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3화 (103/111)

#103

꽃빛 낙원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실 수 있었잖아?’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던 홍의가, 한참 만에 번뜩 고개를 든 것도 그때다.

광장으로부터 이어지는 왕도에 황제의 연이 당도했다. 기실 홍의가 일전에 탔던 태자의 연과 비교하자면 금성과 일반 사택만큼의 차이가 났다. 둘 다 허례허식 넘치고 기품 있고 아름다운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그 크기도 가마꾼의 숫자도 곱절은 거뜬히 넘었다.

황제가 연에 올랐다. 다행히 몰려드는 인파에 치여 좀처럼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 틈에 삼덕을 새옹에게 맡기고, 홍의는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쳐 연 가까이 다가가려 기를 썼다.

화경은 그새 선두로 끼어들어 미함과 나란히 연을 호위하느라 바빴다. 홍의가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려 애쓰는데, 느릿느릿 허공을 부리던 연이 병사들의 벽제 아래 슬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방의 구슬발 너머로 가만히 착석하여 앞을 보는 황제의 옆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더욱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때마침 연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옥지를 발견했다. 홍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손나팔까지 만들어 입가에 대고 나머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옥지야! 옥지야!”

홍의가 앞을 살피랴, 옥지를 부르랴, 혼자 바빠 죽는 와중, 얼핏 익숙한 음성을 들은 옥지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워낙 머릿수가 많아 쉬이 헤아려 살피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야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그래! 옥지야! 여기다, 여기!”

옥지가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다. 아니, 어깨를 으쓱하다니. 대체 저게 무슨 표현이란 말인가. 담이라도 든 것인가? 땀범벅이 된 홍의가 망연자실 가쁜 숨을 놓던, 그때였다.

연이 멈추었다.

그 먼 거리와 무수히 많은 인파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구슬발을 젖히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홍의가 커다랗게 외쳤다. 황제는 움직임이 없었다. 표정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얼마 후 황제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쥐고 있던 구슬발을 놓았다.

그 장면이 몹시 느리게 느껴졌다. 마치 홍의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하염없었다.

“폐하.”

홍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며 한 걸음 떼었다. 겹친 창이 차갑고도 매섭게 홍의의 가슴팍을 막았다. 두어 걸음 떠밀린 홍의가 황망 중에 자신을 가로막는 창과 병사들을 번갈아 보다, 이내 출발해 버린 연을 향해 소리쳤다.

“폐하!”

곁을 따르던 옥지와 화경이 되레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으로 홍의를 돌아보았다.

“폐하! 황제 폐하!”

밀어 내고 밀어 내도 끝 모르고 따라붙으니, 엇갈려 세운 창이 네 주제를 알라는 듯 홍의의 몸을 왁살스레 밀쳤다. 창졸간에 털썩,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졌다. 뭇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홍의는 아랑곳 않고 크게 뜨인 눈으로 이내 수행인들의 행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연을 애타게 찾았다.

“폐하…! 폐하….”

바닥을 홈켜쥔 손톱 밑으로 흙뭉치가 버석거리며 끼었다. 몰려와 지켜보던 사람들도 이내 흥미를 잃고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부연 흙먼지가 일어 텁텁하게 시야를 가리었다.

“알거지냐? 땅거지야?”

“…….”

문득 울리는 음성에 홍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명색이 풍류 귀족에 향선이란 놈이 대체 길바닥에 주저앉아 무얼 하는 게야?”

원주 미함은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길게도 혀를 끌었다. 못 본 새 연이은 고생을 했는지, 주저앉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얼굴이 한 치는 쑥 꺼져 있어 더욱 복장이 터지는 듯했다.

“아, 왜 그러고 자빠져 있냐니까! 당장 일어나 정제하지 못해!”

계속 축 늘어져 있는 꼴에 단단히 화가 난 미함이 결국 버럭버럭 우렛소리를 질렀다.

“…고됩니다.”

홍의의 메마른 뺨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

대궁이라 불리는 금성의 중앙궁, 그곳을 넘으면 황제의 침전인 용전이 장엄하게 놓여 있다. 용전으로 향하는 너른 길목에는 저수지만큼이나 커다랗고 화려한 연못 둘레에 녹빛 머리칼 드리운 버드나무와 아름드리 거목이 어우러져 장관이고, 물속에 우뚝 솟은 천청루(天靑樓)는 대대로 벽해의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별채로 그 또한 아름다운 정취였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천청루를 난생처음 마주한 홍의는 입 안에 날벌레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쩍 벌렸다.

“…궁인들이 몹시 많군요.”

쉴 틈 없이 교차하며 지나치는 시녀들과 내관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하던 홍의가 놀라워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에 미함이 몹시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돌아보았다.

“이조차 신황께서 쳐 내어 저 정도인 것이다. 본디는 병사 백 명, 내관 스물, 시녀 서른 명이 항시 대기 중에 하루 온종일 궁장을 둘러치고 있지.”

“흐음. 번견들은 어디 있습니까?”

“후원의 나무 몇 그루를 뽑고 그곳에 새로이 건물을 짓고 있다. 막사가 아니라 아주 정 하나를 지으시려는 모양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귀한 국고를 한갓 개새끼들 집 짓는 데 쓰시겠다는 줄 알고 내 기함을 하여 뜯어말렸더니, 아, 글쎄!”

미함이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댔다.

“그간 폐하께서 은밀하게 각 지방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한바탕 장사를 벌이고 계셨더구나. 거 참 징글맞게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야. 왜, 벽해의 속국인 주련국은 예부터 철기 만드는 기술이 좋기로 유명하지 않으냐? 그곳의 이름난 은장이들에게서 튼튼한 농기구를 헐값에 대량으로 사들여 진전을 개간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삼 할의 세를 받는 것으로 꼬불쳐 둔 본인의 내탕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야!”

“…그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다마다. 이미 도경을 벗어난 각 향청에서는 기념비도 모자라 황제 폐하의 은총을 기리는 신전을 짓는다, 동상을 세운다, 자처해서 떠받드는 티를 내지 못해 다 같이 안달이 났다는구나.”

겉으로는 질린다는 듯 혀를 끄는 미함이었으나, 자신이 믿고 모시는 군주에 관한 자부심으로 달뜬 표정까지 완벽히 가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홍의는 이렇게 대궁에 직접 걸음하고, 또 미함에게서 최근 일어난 황제의 대소사를 미주알고주알 전해 들으면서, 희한하게도 자꾸만 낯빛이 가라앉았다.

금성의 어디든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받았을 만큼 신황의 신임을 단단히 얻은 미함은 당당히 대내에 통하는 벽루교를 지났다. 곧이어 용전에 당도했다. 사전에 말을 맞춰 둔 모양인지 위병들이 별다른 저지 없이 길을 터 주었다.

홍의는 목이 빠작빠작 타들어 가는 긴장으로 연신 심호흡을 했다. 침전으로 통하는 낭하를 지나 삼중의 미닫이문을 넘어 들어서니 두려울 만큼 넓고 기품 있는 내실이 드러났다. 방 곳곳에 스며든 익숙한 난향이 아니었다면, 아늑하고도 해사하게 꾸려져 있던 태자궁 침전과 분위기가 몹시 달라 더욱 괴리하고 위압적이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침전에 딸린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 긴 비단 의자에 앉았다. 미함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화경에게 미리 연통을 두긴 했다만, 가뜩이나 폐하께서 요즈음 매사에 예민하시고 날이 잔뜩 서 계신 데다, 네놈의 존재 자체가 역린이니 일이 어찌 될지는 장담치 못한다. 목이 달아날 수도 있어.”

“…….”

“또한, 감히 용전에 허락도 없이 불청객을 들인 꼴이니 네 오늘 밤 성심을 되돌리지 못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화경과 위병들까지 줄줄이 된서리를 맞을 게다.”

“알고 있습니다.”

덤덤한 대답에 그 이상 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으나, 요즈음 홍의의 ‘홍’자만 들어도 표정을 굳히며 싸늘히 정색하는 황제의 지밀에 당사자를 냅다 던져 두려니 미함의 마음도 영 찜찜하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쯤 입궐하십니까?”

“곧 당도하실 게다. 많이 고단하실 게야.”

“…….”

“오늘 즉위식을 치르자마자 선황의 신위를 모신 벽룡사에서 백관들과 모여 대제 의식까지 치르셨거든. 돌아오는 연 안에서도 잠시 눈을 붙이기는커녕 산더미처럼 쌓인 장계를 읽는다고 몹시 피곤하실 게지. 흠, 곁에서 모셔 보니, 그분은 한시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더구나. 기껏해야 스물한 살, 약관의 나이에 무얼 얼마나 이루고저 그토록 동분서주하시는지 원….”

“…그렇습니까.”

나지막이 대꾸하는 홍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황상의 짐과 도리를 걸머진 황제가 아니라 여운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사내. 미함이 말하는 황제는 모습에는, 힘들다는데도 몇 번이고 집요하게 침상 위로 내리누르던, 언제나 손바닥 뒤집듯 울컥 뼛성을 부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던 그 사내의 모습은 없었다. 가만히 말간 빛을 쏘다가도 대번에 살얼음이 박혀 들도록 노려보던, 도톰히 부푼 꽃 치마를 입고 새색시처럼 웃었던, 입을 여는 족족 야한 농을 일삼아 질색을 하게 만들었던,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뜨겁게 파고들곤 했던 그 사내. 난데없이 불쑥불쑥 나타나 사람 피를 말리고, 툭하면 토라지고, 화를 내고, 치근덕거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나누어 먹고, 함께 말을 달리고, 웃고, 떠들고, 입 맞추고, 무젖은 몸으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벅차고 먹먹한 설렘을 나누었던 그때의 황태자는… 정녕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제야 홍의는 여운에 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보았던 황태자의 모습은 그저 일면이었을 뿐이다. 그걸 인정한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고 울컥 서운함이 물밀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면, 내가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았을 텐데.’

장안에 떠도는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마냥 기뻤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언짢은 것도 사실이었다. 먹꾼들을 앉혀놓고 장단을 맞추던 녹빈과 중노미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언젠가 홍안상점에서 보았던 ‘만파식’이라는 이름의 책을 떠올렸다. 황제는 그 이전부터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고 비밀스럽게 준비해 왔던 것이다. 한데 왜 자신에게만 그 계획을 알리지 않았을까.

‘…일종의 시험이었던 걸까?’

자신은 마음을 숨겼고 황제는 진실을 숨겼다. 그렇다면, 황제 또한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미함이 침전을 나서고 얼마 안 있어, 시종들의 발소리가 너른 복도를 울렸다.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홍의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황제가 입궐한 듯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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