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4화 (104/111)

#104

위병의 전갈에 따르면 황제는 침전에 들기 전 칙사 왕조오와 늦은 저녁 수라를 마치고 입욕실로 향했다고 했다.

결벽은 여전하다고 속으로 읊조린 홍의는 밀려드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침전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이러다 참말로 목 달아나면 어쩌지.’

실제로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명을 어기고 보란 듯이 침전까지 숨어들었으니, 사흘 굶은 호랑이에게 제 발로 걸어가 나 잡아 잡수라며 백팔 배 드리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지금이 아니라면, 더더욱 골은 깊어져 다시는 폐하께 닿을 수 없을지 몰라.’

홍의는 심기일전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 얼핏 커다란 면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허둥지둥 삐져나온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매만졌다.

드르륵. 삼중의 겹문 중 첫 번째 문이 열렸다. 홍의가 멈칫했다.

드르륵. 두 번째 문이 열렸다. 홍의가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이어서 마지막 문이 열렸다.

연한 바람결과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난향이 더욱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던 홍의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붉디붉은 비단 침의가 시야를 메웠다. 태자 시절 예국의 박래품이라며 옥지가 대어 드린, 언젠가 홍의가 보고 아름답다며 감탄했던 그 침의와 색만 다르지 같은 옷감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내쳐지면 어쩌려나 싶은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도, 어쩔 도리 없는 설렘과 반가움으로 잠시 일렁이던 홍의의 눈빛이, 일순 황제를 비껴갔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낯선 미청년의 얼굴로 가 꽂혔다.

“…….”

홍의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청년은 전형적인 예국인의 상이었다. 쌍꺼풀 없이 얄쌍한 눈초리에 키대가 홍의만큼이나 헌칠하고, 하루가 멀게 매운 햇빛 아래 체련한 홍의보다도 피부가 가무잡잡했다. 얼굴의 전체적인 조화가 잘 어우러져 몹시 아름답고, 몸도 좋았다. 몸이 좋은 것을 한눈에 알아본 이유는 속살의 유두가 다 드러날 만큼 투명한 침의만 걸친 채였기 때문이다.

발밑이 쑥 꺼지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천불이 솟구쳐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치달은 느낌이었다.

아찔한 멀미증이 일었다. 너무도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로 머릿속을 휘몰아쳐 어떠한 판단도 서지 않았다. 본디 화가 날수록 도리어 차분해지는 것이 그의 성정이었다. 분명히 그러했다. 그런데.

“…하.”

홍의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입술을 피나도록 감쳐물었다.

울컥울컥 발끝에서부터 솟구쳐 머리까지 치달은 검은 화염이 온몸을 그을려 태우는 듯했다. 난생처음 본 청년에게 이다지도 지독한 분노를 느끼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성은 없었다. 이성적일 수 없었다. 여운이 자신이 아닌 저 청년을 안고, 밤새도록 범하고, 짓궂게 웃으며 입을 맞춰 준다고 생각하면, 분노를 넘어 혼절할 것만 같았다.

이미 침전에 들어 있는 홍의를 발견하고 청년 역시 놀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제와 홍의를 번갈아 살폈다.

부들부들 떨며 황제를 쏘아보는 홍의의 두 눈이 새빨갰다. 곧이라도 뜨거운 물이 한가득 차오를 것처럼 축축했다.

“…나가 주시오.”

홍의가 나지막이 씹어뱉었다. 청년을 향해 한 말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가누며 말했다.

“그냥 있어.”

“나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홍의가 청년을 돌아보았다. 죽일 듯 쏘아보는 붉은 눈자위에 곧이라도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동안 두 눈을 깜박이던 청년이 이내 곧 담담하게 황제를 향하여 읍을 올렸다.

청년이 공손한 자세로 뒷걸음질 쳐 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방의 초가 한차례 일렁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홍의가 아주 뜬금없는 걸 보았다는 듯 물었다.

황제는 잠시 시선을 내려 소매 밑으로 떨리고 있는 홍의의 손을 보았다.

“상황은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황후 마마와 군우령은 구금되어 계시다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의지로 저 사내가 용전에 든 것입니까?”

왜. 왜.

홍의는 잠시 입 속으로 ‘왜’를 반복했다.

“대체 왜요…?”

“…….”

“왜 저자와 함께 침전에 들어오신 겁니까?”

질문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답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홍의가 눈물을 참으려 어금니를 사리물고 서슬 퍼런 안광을 쏘았다.

“본디 왕의 사랑이란 봄눈 같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페하는… 폐하의 사랑은 그토록 짧고 간명합니까?”

“너 살이 좀 내렸네.”

황제는 묵묵히 말을 잘랐다.

“맞아, 몹시 오랜만에 마주 보며 얘기하는 거였지. 그래서 네가 지금 이렇게….”

“…….”

“눈에 뵈는 게 없나.”

황제의 눈동자에 차가운 귀린(鬼燐, 도깨비불)이 번뜩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홍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예, 경고하셨지요. 그토록 아름다우신 옥안으로, 몹시도 처연하게 말씀하셨지요. 아, 참으로 의외입니다. 소신이 사랑한단 말을 끝까지 해 드리지 않아 홧김에 던지신 말인 줄 알았거든요. 어쨌거나 미함 공께 따로 추궁은 말아 주십시오. 멋대로 용전에 들게 해 달라고 애걸한 것은 소신이니까요. 설마하니 폐하께오서, 이미 과거의 정인은 미련 없이 지워 버리고 새로이 충직한 남첩을 들였을 거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물겠다, 홍의야.”

황제가 무표정한 채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해? 충직한 남첩? 방금 나간 그 사내?”

황제가 홍의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아랫도리에 얹었다. 얇은 직금 너머로 두툼한 중심부가 적나라하게 만져졌다.

“내가 이걸 어느 구멍에 꽂아 넣든 이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지.”

“상관할 겁니다.”

홍의가 뚫어져라 황제를 응시하며 천천히 오금을 굽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한껏 꺾어 올려다보며 손에 든 것을 움켜쥐었다.

“진짜로 물어뜯어 버릴 거예요.”

황제가 느리게 손을 내어 홍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활짝 열어 둔 지게문에서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푸르스름한 월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의 높은 금잠을, 맑은 달빛이 한차례 쓸었다. 살얼음처럼 가벼운 한기를 느낀 홍의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황제가 마찬가지로 주저앉더니 가만히 상대를 들여다보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귀여운 협박은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했어야지.”

한참 지독한 침묵이 사위를 눌렀다. 억겁의 시간이라도 흐른 듯했다. 홍의는 천천히 표정을 가다듬고 혼란한 머릿속을 정돈했다.

“…그만하십시오.”

“…….”

“소신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모진 힐난은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아무리 잔인하게 말씀하셔도 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은 어쩔 도리 없이 폐하가 그리웠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울 겁니다.”

황제가 잠자코 바라보았다. 홍의는 무릎을 꿇은 채 양 주먹을 허벅지 위에 공수하였다.

“매일같이 후회했습니다. 폐하를 떠나온 것을 후회하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폐하께서 그러셨지요, 너는 날 믿지 못한다고. 맞습니다. 그때는 폐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

낮고도 명료한 칙문이었으나, 그만큼 무거워 홍의의 말문이 턱 막혔다. 황제가 손끝으로 홍의의 턱을 받쳤다. 호흡이 느껴질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왜 너는 날 믿지 못했지? 내가 병신 황태자라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황후의 끄트러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말꼬리를 붙드는 황제는 진정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때는 믿기지 않았고 지금은 믿겨져? 내가 황제가 되어 벽해를 얻었으니까?”

홍의가 슬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 매도하지 마십시오. 당시 제 마음이 그러했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이제 와 폐하께 거짓을 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폐하를 연모한다는 말 또한 진심이었습니다.”

“아, 연모.”

“…….”

“너에게는 연모가 뒷간 같은 것인가? 필요할 땐 갈급하다가도 볼일이 끝나면 어디로든 치우고 싶어지는?”

홍의가 맥맥하여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폐하는…. 정녕 어디까지 신의 마음을 찢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아무리 제가 밉대도 어찌 그리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너는 처음에는 나를 밀어 내다 은자 닷 근에 돌변하여 군신을 청했지, 그래 놓고 뒤에서는 무동들과 시시덕거리며 나를 능멸했고. 나와 합하여 기껍다면서, 내 양물을 귀애해 줄 사람은 너 하나뿐이라며 가증을 떨었지, 그리고 곧바로 해운에게 가서 색신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지껄였고. 매번, 매번, 너는 매번 내 믿음을 저버리며 절망하게 만들고 끔찍한 세 치 혀로 날 농락했잖아!!!”

콰앙! 거칠게 밀치는 힘에 그대로 나동그라진 홍의의 몸이 굉음을 내며 마루에 부딪쳤다. 처음 들어 보는 황제의 대성이었다. 굵직하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소리를 지르니 귀뿐만 아니라 머릿골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홍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황제는 대체로 침착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폭력을 쓸 때마저 그랬다. 욕설을 뱉어도 나지막이, 화를 내어도 담담히 내는 게 오히려 그다운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다지도 얼굴을 붉히고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목에 핏대를 세울 줄은 몰랐다. 그 커다란 악다구니를 끝으로 홍의를 내리누르는 황제의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곧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아슬아슬 조마조마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폐하. 홍의가 서럽고 아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폐하께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무동들 일도, 해운과의 일도, 다만 상황이 나빴을 뿐, 제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지리멸렬한 변명 같았다. 하지만 진실이었다. 도리 없는 진실이었다. 황제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는 말했다.

“나는 네게 추저분한 과거까지 줄줄이 읊으며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렸어. 그런데 넌 천륜이니 대의니 들먹이며 내 마음을 시궁창에 처박고 달아났잖아, 그게 네가 말하는 연모인가? 정말 그래?”

“방도가 없었습니다!”

홍의가 참지 못하고 부르짖듯 왼고개를 치며 황제의 양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그때 신에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저의 존재 때문에 폐하께서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견디기 괴로웠습니다. 갇혀 지내는 신세인 태자비 마마께도 죄스러웠습니다. 황후 마마의 권력이 두려웠습니다!”

“그럼 내게 말을 했었어야지!!”

“폐하께서는 무얼 말하셨습니까!!”

사납게 뒤엉킨 눈빛들이 흔들렸다.

“화경과 옥지와 미함 공, 게다가 녹빈마저 알고 있던 이번 계획을 소신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폐하 또한 신을 믿지 못하신 게 아닙니까!”

“…천만에.”

황제는 상체를 일으켰다. 홍의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들에게 외따로 명령을 내린 것은 맞아. 하지만 정확한 계획을 알린 건 면사를 벗은 후였어.”

황제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날 의심하지 않았지. 내가 하는 명이라면 그저 지고지순 믿으며 따랐어…. 그러니까 홍의야, 그건.”

“…….”

“너만, 날 믿지 못했다는 거야. 생애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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