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5화 (105/111)

105

“폐하는 황제이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멈칫하여 바라보았다.

“신의 염려가 정녕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황제는 후사를 보아야만 합니다. 벽해의 혈통제도 아래 후사를 보지 못한 황제는 폐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헌데 신은 사내입니다. 천지가 개벽하고 죽었다 깨나도 회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날 화양각에서, 폐하의 용정을 어떻게든 머금어 보려 애를 쓰다가, 차마 몸이 받아들이질 못해 홀로 숨어 배설하면서… 제가, 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십니까? 폐하는 몰라요. 폐하는 그 심정, 죽어도 이해하시지 못합니다.”

홍의의 두 눈으로 빠르게 눈물이 차올라 볼을 탈 겨를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음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아니, 이제는 알려 하시지도 않겠지요. 폐하는 쉽잖아요.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그게 뭐가 되었든 임의대로 가져다 질릴 때까지 탐하실 수 있잖아요. 폐하는 폐하이시니까요. 이 나라의 황제가 되셨으니까요. 그리하여 새로이 색신도 들이셨고요, 그런데 왜요? 왜 소신만 끝까지 청렴결백해야 합니까? 제발, 제발 소신에게 제 깜냥을 넘어선 과한 의리를 요구치 마시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하려 했는지, 너는 죽어도 모를 거야.”

황제는 나락처럼 읊조렸다.

“이 나라는 아름답고도 잔혹하지. 천자로서의 삶은 더더욱 그러했어. 나는 출생부터 사사로운 일상까지 모두 감추고 가린 채 살아야만 했고, 그건 허상의 삶과 다를 바가 없었지. 나는, 언제고 나를 증명해야 했어. 흉하다는 이유로 버려진 내 형과, 그에 비해 덜 흉하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내겐 그만한 책임이 있었으니까. 하여 나는 어머니의 눈과 귀가 닿을 궁중 화공이 아니라, 아무도 모를 뜨내기 화공을 찾아 나섰지. 처음엔 맞아,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 화공은 나더러 아름답다고 하더군. 이 눈, 징그러운 흉터이자 족쇄 같았던 나의 눈동자를 마치 상처를 대하듯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황제가 한 손을 들어 힘겹게 자신의 눈을 감쌌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어.”

“…….”

“그런 건, 그런 것은 정말 난 처음이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낯선 말을 하는 네가 너무 이상해서, 먼 별처럼 아득해서….”

황제는 살면서 누구와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홍의를 만난 이후 늘 기분이 얼얼했다. 어디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했지만, 도리 없이 행복했다. 그런 일은 정말 처음이었고 아마 두 번은 없을 것이다. 홍의가 황제의 삶을 바꿨다. 그때 오기와 치기로 똘똘 뭉쳤던 황태자는, 그저 모두의 위에 서서 보란 듯이 군림하겠다고 치졸한 강다짐이나 했던 황태자는, 홍의를 만나고 좋은 황제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홍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아까 그자는 왕 공이 몰래 올려보낸 그의 오른팔이야. 공의 호의를 대놓고 무시하기 어려워, 가볍게 차나 대접하여 돌려보내려던 것뿐.”

홍의가 망연히 굳었다.

“홍의야,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네가 아니면 누구도 싫다고. 회임할 걱정이 없는 사내라 할지라도, 그게 네가 아니라면 싫었단 말이야. 심지어 그래서 난, 이 나라의 체제를 바꾸기로 결심까지 했어. 가장 먼저 황손 적통만이 황제에 오를 수 있다는 혈통 제도를 폐하고, 미함 현군을 다음 후계로 지목하여 후사 없는 통치를 공표하려 했었지.”

홍의가 고통을 느끼는 듯 이를 악물었다.

“한 나라의 국가 체제를 바꾼다는 건 수이 결행될 일이 아니야. 누구도 감히 침범하거나 깨트릴 수 없는 고유의 세계를 축조해야만 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적당한 시기가 되면 네게 말해 주려 했어. 만인 앞에 당당히 면사를 벗고 옥좌에 올라, 놀라고 기뻐할 너를 상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는지….”

눈을 덮은 황제의 손가락 사이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제발 내 손을 놓지 말라고 했잖아.”

황제가 눈두덩을 움켜쥐었다.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그거면 된다고 말했잖아. 내가 바란 건 정말 그거 딱 하나였는데, 믿어 주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옆에서 기다려 주는 것. 그게 너한텐 그리도 비참하고 못 할 짓이었어…?”

“아닙니다.”

홍의가 고개를 저으며 황제를 붙들었다.

“저의 비참은 폐하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못난 저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가슴속에 새빨갛게 달군 돌덩이가 구르는 듯 뜨겁고 쓰라렸다. 그제야 정인의 처절한 눈물을, 그 겉모습 뒤에 감춰진 아픈 진심을 보고야 만 홍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신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소신이 전부 잘못했습니다. 두려움에 눈이 멀어 가장 중요한 걸 못 보고 몹쓸 패악을 부렸습니다. 폐하를 의심하고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고집을 피우고 벽견을 부렸습니다!”

홍의는 무너지듯 황제의 무릎에 엎드렸다.

“제발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이대로 저를 놓지 마세요. 제발….”

황제가 침잠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들에겐 각각이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하던가. 너 또한 불가항력의 이유가 있었겠지. 머리로는 알겠어, 하지만… 도저히 널 가슴 깊이 이해할 수가 없어.”

아래로 펼쳐진 황제의 고운 속눈썹이 무젖어 반짝였다.

“이게 나의 결벽인 걸 알아. 지독하고 지독하지. 어째서 나는 조금의 흠조차 견디지 못하는 걸까. 나 자체가 모난 구석 가득한 인간이기에, 그걸 스스로 잘 알기에 삶이 더 팍팍하고 힘겨웠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너와 함께 그리려던 세상은, 백옥처럼 눈부셨고, 흠결 하나 없이 매끈했고, 언제나 눈부시게 빛났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홀로 꿈속에서 살았나 보지. 아마 내가 바란 사랑도 그처럼 허황한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홍의가 고개를 내젓고는 붉은 눈자위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전 폐하의 그런 점을 좋아했어요. 백옥처럼 눈부셨고, 흠결 하나 없이 매끈했고,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셔서. 그런데 폐하는, 도무지 그걸 몰랐단 말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지 바보처럼 모르고 있었습니다.”

홍의는 두 손으로 황제의 손을 맞잡았다.

“향선들에게도 각자의 신념이 있습니다.”

고결한 손등에 천천히 이마를 대었다.

“그것은 가문의 명예일 수도 있고, 재력이나 신분 상승일 수도 있고, 끝 모를 학식을 얻어 갖는 것이거나 백성들을 돌보는 것일 수도, 장군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꿈을 이루려 고군분투합니다. 저의 신념은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내 남은 사랑하는 자들을, 그리고 이 나라 벽해를.”

홍의의 뜨거운 눈물이 황제의 손등을 적셨다.

“미함 공의 말처럼 신은 이 나라의 돌연변이였습니다. 신 또한 이 나라의 체제가 끔찍하고 싫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나라를 지키려는 모순당착에 빠져 있었지요…. 사랑했습니다. 벽해의 폐단에서 태어난 당신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외로웠던 당신을, 벼랑 끝 홀로 벼린 꽃 같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에 지키고 싶었습니다. 미함 공과 당신은 나라를 바꾸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었으나 깜냥이 좁은 저는 그저 겁이 났습니다. 불안했기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고 마실까 봐, 이대로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영영 꺾이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황제는 손등을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홍의의 맑은 눈물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그때, 태양 아래 선 당신은 몹시 치기 어렸고, 아름답다는 한마디에 당황하여 귀를 붉히며 노려보셨죠. 말씀은 안 드렸지만 그때 이미 반했습니다. 그때부터 당신도 제게 절대 가치였어요.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빛나는 천연석처럼, 절대로 훼손되지 않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보석이었습니다.”

홍의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눈동자는 여전히 공고하고 흠결 없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 세계를 침범하려 하겠습니까? 어찌 감히 당신의 깊고 아픈 마음을 추썩이고 괴롭히려 하겠습니까?”

황제가 홍의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시간을 갖자.”

홍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왈칵 샘솟았다. 은은하게 견준 시선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홍의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폐하 그러지 마세요.”

“홍의야.”

“싫습니다.”

“언젠가 네가 말했잖아, 모든 다툼 뒤엔 앙금을 풀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홍의가 아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예, 그랬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홍의가 황제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무서웠다. 짧은 순간 아득한 상상을 해 보았다. 황제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죽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할까. 본디 사랑은 다 고되고 아픈 걸까. 돌고 돌아 간신히 만났거늘 다시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자니 깜깜나라에 갇힌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홍의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자 황제가 홍의의 뺨을 쥐고 뚫어져라 눈을 맞췄다. 눈빛이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나도 두려워.”

황제가 숨을 들이키며 이를 악물었다.

“너 없이 내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마가 맞닿은 채로 두 사내는 눈을 꽉 감고 눈물을 삼켰다.

“한데 왜 자꾸 가라 하십니까. 왜 떠나라 하세요.”

“아주 가라는 게 아니야.”

“제가 싫어지셨습니까?”

“아니.”

“도저히 저를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니.”

“허면 어찌 자꾸만 밀어내십니까?”

“다시는 널 잃지 않기 위해서.”

사실 난 지금 무엇 하나 이룬 게 없어.

아직도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이곳이 옳은 곳인지, 이 낡은 법칙과 규율로 가득 찬 세상이 정말로 변하긴 할지, 내가 정녕 해낼 수 있을지.

난 항상 스스로를 의심했고 많은 걸 두려워했지. 그게 나를 넘어 너의 고통이 될 줄도 모르고….

“나의 불완전함이 너의 불안이 되고, 나의 부족함이 너의 두려움이 되는 게 더는 싫어. 그러니까 기다려줘. 내가 온전한 나로서 네게 갈 때까지. 내 세상이 아주 단단해져서, 거뜬히 너를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

“…….”

홍의는 천천히 숨을 삼키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여전히 흘러넘치는 사랑과 의지를 확인한 순간, 홍의의 가슴이 벅차도록 크게 뛰었다.

“예, 폐하.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면.”

치미는 울음을 갈무리하며 홍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절대로 이 마음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억지로 폐하의 시선을 피하거나, 밀어내거나, 사랑이 식은 척 연기하며 매정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홍의가 눈물에 씻긴 맑은 눈을 들고 애써 미소 지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폐하가 만든 견고한 세상에서 그때처럼 웃으며 기다리겠습니다. 더는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롯이 폐하만을 지아비로 섬겨 믿고 따르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말입니다.”

황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홍의를 끌어당겼다. 서로에게 빠져 들어가듯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으며 자긋자긋 입술을 씹었다.

“다시 만나면.”

날 향해 웃어줘.

“그때처럼.”

“예, 그때처럼요.”

“응. 그때처럼.”

홍의가 한 발 물러나려하자 황제가 다시 끌어당겼다. 맞물렸던 이술이 한참을 질척이다 아프게 놓였다.

“…괜찮아.”

황제가 읊조리자 홍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손끝이 늘어졌다. 자꾸 붙잡으려 했고, 붙잡히려 했다. 힘겹게 그의 손을 떨쳐낸 홍의가 군신의 예로서 절을 올리고 빠르게 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힐 때 참지 못하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더니 황제가 시리도록 어두운 공간에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겹문이 탁 탁 닫히며 그가 사라졌다. 난향이 뚝 끊겼다.

“…….”

대궁을 나선 홍의는 벽루교까지 천천히 걸었다. 공기가 상쾌하고 맑았다. 천청루로 늘어진 수양버들의 새잎이 잔바람에 흔들거렸다. 이리저리 오가는 궁인들의 한가로움과 둘레를 지키며 하품하는 병사들의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유난히 맑은 달빛에 등을 들지 않아도 환한 깊은 새벽이었다. 그런데 홍의는 자꾸만 눈앞이 침침했다.

처음 보는 어둠이었다.

홍의는 벽루교 한복판에서 난간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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