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그렇다면 우리도 색공을 해야 하나요?’
‘아니지, 아니야. 너와 윤명만은 절대 그리 살지 않도록 할 것이다. 너희들은 좋은 남편 만나 오롯한 사랑 속에 살도록 할 것이야.’
‘어머니, 저는 남편은 필요 없어요. 그저 평생 어머니와 살 거예요.’
철부지 윤명이 그리 속살거리며 어머니에게 안기면, 나는 슬그머니 샘이 나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지. 윤명처럼 타고난 바탕이 애교가 많지도 않고 표현에도 서툴렀던 나는 언제나 동생에게 어리광 부릴 틈을 빼앗기고 홀로 토라지기 일쑤였다.
‘옥명아. 윤명아. 보렴. 흉작이 들었을 때 유달리 산열매와 초근목피가 실한 이유는 중생을 어미와 같이 돌보는 관음보살님의 은덕이란다. 내 너희를 낳아보니 그분의 마음을 내 맘처럼 알겠어.’
자장가 소리, 고열에 시달릴 때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던 시원하고 보드라운 손끝, 행여 딸들이 추울까 겨울밤 내내 아궁이를 돌보러 들락거리는 쪽문 여닫는 소리…. 무엇을 잊겠느냐? 감히 내가 누구를 잊어버리고 살겠느냐? 그것이 정녕 사는 것이겠느냐?
세월은 흘러, 나는 자연의 순리대로 첫 몸엣것을 보았다. 딸이 평범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누구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자라났지.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눈길을 빼앗겨 밭두렁에 걸려 우스꽝스레 넘어지거나 담벼락에 이마를 들이박곤 했단다. 그나마 황가의 핏줄을 이었다는 이유로 함부로 건들지 못하던 동리의 무뢰배들도 내 나이가 차오르니 슬쩍슬쩍 담장을 타 넘을 기회를 엿보더구나. 상황이 그러하니 갈수록 어머니의 걱정과 불안은 더해 갔지.
‘댓바람부터 어딜 쏘다니는 게냐? 또 매화 숲에 다녀온 게냐? 너는 여염에서 자랐으나 여염의 여인과는 다르니 항시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느냐!’
어머니는 나의 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의 융기가 솟을수록 더욱 딸을 잡죄며 다그쳤단다. 하지만 철없는 열다섯 살, 모든 것에 호기심이 솟고 사내라는 동물에 시선이 가기 시작한 나이인 바에야 나는 그런 어머니의 잡도리에 마냥 순응하기가 힘들었구나. 내가 아름다운 것이 어찌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게 눈을 빼앗기고 음험한 마음을 품는 사내들이 이상한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노라고 발칙하게 맞서곤 했단다.
철 바뀌는 줄 몰라, 그만큼 철이 없던 때였다. 나는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마다 연분홍 장유에 동강치마 걸쳐 입고 몰래 집을 빠져나오기가 매번이었다. 당시 나는 사람 많은 장터보다는 숲이 좋았어. 남산의 끝없는 푸름이 좋았고 숲에 사는 짐승들의 흔적을 쫓는 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꺼웠지.
그래, 온 누리에 푸른 새싹이 겅성드뭇이 돋기 시작하던 새빨간 봄날이었던가….
항상 어딘지 염세적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노려보듯 하는 그 눈매가 좋았다. 굳게 다물려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앵순과, 언제나 희고 깨끗한 정복을 고수하는 그는 마치 죄를 짓고 선계에서 막 쫓겨난 천인 같았어. 그의 분노와 올곧은 욕망, 순수한 아집이 그를 넘어 나마저 태우는 듯 강렬했지.
그가 바로 대윤, 당시 열일곱이 된 금성의 향선이었단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정통 향선들에게 돌림쟁이 취급을 당하여 매일 이곳 매화 숲 한구석에 숨어들듯 홀로이 수련하는 가련한 처지였지. 그의 아비는 일전에 원주까지 지낸 귀족이었으나 어미는 출신도 알 수 없는 해어화였다고 들었다.
매화 숲은 아름다운 곳이었어. 허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봉오리로 피어오르는 소년이 있었지. 나는 그와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켰다간 눈물 콧물 쏙 빠질 정도로 혼쭐이 날 것을 알았지만 마음대로 자라나는 연심은 나로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단다.
‘내년이면 네 나이가 성년이 되니 더는 막을 명분이 없구나. 나는 우리 옥명이 금성과는 연이 없는 평범한 사내와 혼인하길 바랐으나, 묘랑과 묘녀의 초련을 내가 무슨 힘으로 끊어 낼 수 있겠는가? 너희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혼인을 올리고 정답게 살아 보도록 하라.’
우리는 그렇게 결실을 맺었다. 가난뱅이 향선이라 손가락질 받는 대윤과 쫓겨난 공주인 나는 작은 초가집에서 해운을 낳았지. 함께 황실의 눈 밖에 난 처지, 서로가 보듬고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축복 속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올린 혼인이었어. 그래도 행복했단다. 배냇짓하던 얼뚱아기가 고개를 쳐들고, 돌돌한 몸을 뒤집고, 걸음마찍찍 박수 소리에 맞춰 첫걸음을 떼었을 때, 대윤은 오는 길에 야생화를 뽑아다가 쑥스러운 소년의 미소와 함께 내게 건네곤 하였지. 아기를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맨 나는 날이 좋을 때면 손수 싼 도시락을 들고 우리가 만났던 매화숲으로 가 하릴없는 기다림에 겨웠단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평온하였어.
자, 이제 네 아비의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당시 황태자였던 은종은 몰이사냥에 심취해 있었단다. 네 아비는 내성적이고 책상물림이었던 너와는 달리, 호탕하고 활달한 호남으로 유명하였다. 항시 사냥터를 누비며 술과 여인을 끼고 살았다지.
아직 황제가 되지 못한 자, 그러나 곧 오를 자. 그날도 엄한 황후에게 된소리를 듣고 화가 난 은종은 말에 화살을 가득 싣고 남산으로 향했다더구나. 그들이 쫓던 성체 노루가 매화 숲으로 향하는 걸 보고 선두에서 쫓던 은종은 평소 들지 않던 매화 숲 깊은 일각까지 들었다가 그만 노루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곳에 한 선녀가 있었다지.
선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도시락 바구니를 옆에 두고 한가로운 샘가에서 돌베개를 베고 깜박 잠이 든 듯했다지. 은종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었겠지. 그저 월궁항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이 이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겠지.
막 잠에서 깨어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달아나야 소용없다! 내 말이 빠른가 네년의 다리가 빠른가 어디 겨뤄 보자꾸나!’
은종은 그때, 사냥을 했단다.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언제나처럼 사냥을 했단다. 날카로운 화살촉에 심장을 정통으로 찔린 아름다운 파랑새는 푸드덕, 마지막 날갯짓으로 사력을 다해 울부짖었지. 뿌듯이 사냥을 마친 은종은 시체처럼 늘어진 여린 짐승을 자신의 말안장에 실었다.
나는 흔들리는 마상에서 피를 물고 까무룩 잠에 들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어. 해운과 대윤이 자꾸만 나를 등지고 멀어지더니 갑자기 커다란 까마귀가 날아와 내 눈을 파먹는 꿈을. 그게 너의 태몽이자, 나의 오랜 악몽이었다.
이후 나는 황궁에 감금되었고, 석 달 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 무엇이 먹고 싶으냐?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 말해 보아라. 내가 무얼 해 주어야 네가 나를 향해 웃어 주겠느냐?’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소녀가 원하는 것은 이곳에 없사옵니다. 소녀는 향선 대윤의 아내이자 이미 한 아이의 어미입니다.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뒤늦게 자신이 납거해 온 여인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이자 연전에 쫓겨난 옥명 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은종은 아쉬움에 치를 떨었지. 그는 처음으로 제 맘에 쏙 드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 여인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듯했어. 향선 대윤이 무동들을 이끌고 대궁 앞에 찾아와 머리를 찧으며 아내를 돌려 달라 읍소하였고, 늙은 황제 또한 아들의 경거망동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나 은종은 나서 말했다는구나.
‘옥명 또한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바에야 소자와 합하여 황족을 낳는다면, 어찌 한갓 향선의 여인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는 황가의 피를 보존하라는 신의 계시이니, 그녀를 정실로 삼고 장차를 도모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만히 듣던 화소 황후가 질색을 하며 파르르 떨었지.
‘옥명은 태자의 동모제인데다, 대대로 황태자비는 정통 가문에서만 뽑아 온 것이 황실의 전통이오. 한데 어찌 태자는 한갓 노비 가문 여인의 꾐에 빠져 나라의 기풍을 등한시하고 전통을 뒤집으려는 것이오?’
‘어마마마, 말씀을 가려 해 주십시오. 노비 가문의 여인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공주이며, 배 속에 용종을 품은 여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이면 콩으로 메줄 쑨대도 따르마 하던 어린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의 적장자답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취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내였어.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구나. 그런 감정은 난생처음이라 하더구나. 고운 비단과 세상에 둘은 없을 귀한 보석을 안겨 주어도 도무지 웃지 않는 나를 보며, 은종은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보채며 울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다짐했던지 모르지. 당신을 죽일 거라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당신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어 주겠노라고. 조금씩, 처절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하여, 매일 한 줌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의 영혼을, 나는 웃으며 지켜보겠노라고.
‘웃어 봐라, 옥명아. 나를 향해 웃어 봐!’
그는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금첩지라 여긴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우스워 웃었단다. 깔깔거리며 웃었단다. 배를 잡고 웃었단다!
어쨌거나 다 늙어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황제는 오히려 어머니께 반발하는 태자더러 이제 다 컸다며 역성을 들기에 이르렀고, 이 같은 치욕에 분노를 짓씹던 화소는 당연하게도 이 분풀이를 할 상대를 골라야 했겠지.
단단한 돌에 시달려 등허리에 들었던 피멍이 옅어질 무렵이었을까? 주인 가문을 멸시하고 같잖은 술수를 이용하여 황태자를 홀렸다는 명목으로, 나의 어머니는 갖은 고문 끝에 무릎이 으깨어져 죽었단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손발톱이 으깨지는 것 같았다. 슬픔은 나를 넘더구나. 슬픔을 안고 견디기에 내 몸은 너무 작더구나. 종국엔 나마저 그렇게 슬픔으로 묻히더구나.
은종은 그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양 굴면서 나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나는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으며 어머니가 저런 모습으로 죽었어야만 했는지 끊임없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화소는 내게 찾아와 억울하냐고 묻더구나.
‘억울한가? 분통이 치미는가? 허면 깔끔하게 자결하라. 네 배 속의 더러운 신통의 씨앗과 함께 자결하여 어미 곁으로 가려무나. 어차피 네가 그 더러운 신통의 핏줄을 세상 밖으로 내어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이 금성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너와 네 어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차라리 죽어 버리려 했단다. 이리 살아 무얼 하나 싶었단다. 배 속의 꼬물거리는 핏덩이와 함께 자결하는 것만이 은종과 화소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이며, 대윤에게 의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 같았단다.
‘칼을 뽑아요.’
어렵사리 만난 대윤을 향해 나는 애원했다.
‘모두가 정통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대소신료가 더러운 신통 가문의 씨받이라며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정통의 손아귀에 운명을 붙들려 이리 줴뜯기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화소가 두렵고, 은종이 두렵고, 배 속에 든 이 괴물이 두렵습니다. 대윤, 이쯤에서 날 죽여요. 칼을 뽑아 내 배 속을 찔러요. 어서 나와 이 괴물을 죽음에 이르게 해요. 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으니까요. 화소가 없고 은종이 없는 곳… 정통이 없는 그곳으로 어서 날 보내 줘요.’
‘황후가 되십시오.’
대윤은 눈물이 철철 흐르는 얼굴로 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당신은 이대로 죽어선 안 됩니다. 당신의 하나뿐인 여동생 윤명 공주와 나, 그리고 우리 해운이를 생각해서라도, 사셔야 합니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돌아가신 장모님을 생각하세요. 그 분께서는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염려하다 그토록 자닝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황후가 되어 살아가십시오. 당신의 풀포기 같은 목숨, 제발 구차하게라도 연명하여 주십시오. 살아 복수하면 될 것 아닙니까? 당신을 이리 만든 정통에 복수하리란 힘으로 살아 내면 될 것 아닙니까!’
그가 가여웠다. 내가 가여웠다. 모두가 가여웠다. 내 세상은 그렇게 조각났다.
…언제였더라.
소녀가 처음으로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었을 때, 저녁놀을 끼얹은 듯 얼굴을 붉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녀는 잇바디를 드러내고 깔깔거리며 웃었고, 소년은 심통이 나 입술을 비죽였더랬지. 그들은 이후 서로를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흘렸다는구나. 서로의 소매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눈앞에 닥친 잔인한 운명에 발을 구르며, 제발 죽여 달라 애원하고 그럼에도 살아 달라 애걸하였다는구나. 그때에 누군가가 사랑이 네 인생의 다느냐고 물었다면, 소녀도 지체 없이 대답하지 않았겠느냐? 사랑이 내 인생의 전부이며, 그 외엔 무엇도 필요치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