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9화 (109/111)

#109

“…그 뒤로 나는 사랑을 버렸다. 살기 위해 버렸다. 내 마음에 기어 들어오려는 네놈들을 모질게 내쳤다. 배고파 우는 너를 뒤로한 채 넘치는 젖을 홀로 짜 연못에 내다 버렸다. 장안의 가장 야차 같은 망나니를 수소문해 정운이를 격리하고, 수많은 사내들과 사통하여 세를 불렸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느냐? 어찌 어미가 되어 그토록 자기 자식들에게 모질게 굴었느냐고 물었느냐? 너희는, 네놈들이야말로 내 어미를 뜯어먹고 태어난 괴물들이야. 내 그런 네놈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겠느냐?”

옥명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인생에 두 번째 악몽이자 재앙이었던 그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를.

“아까보다 적의가 마모되었구나. 왜, 이제야 네 어미가 불쌍한가? 동정하지 마라. 하려던 것 마저 해. 듣자 하니 미함이 각 속국에 서신을 보내 새로이 군대를 꾸렸다지?”

“어머님.”

“그렇게 부르지 마!”

황후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난 네 어미가 아니야, 너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어!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제 아비와 똑같은 놈!!”

황제는 발악하는 모후의 몸을 끌어다가 안았다. 옥명이 경기가 들린 듯 악다구니를 쓰며 황제를 밀쳐 내려 하였다. 그럴수록 더욱 세게 옥죄었다. 진정이 될 때까지 팔의 힘을 풀지 않고, 가만히 다죄었다.

“자, 나를 개로 만들어라! 청제부인처럼 개로 만들어 목줄을 매어보아라! 네놈이 나의 개였듯, 나를 산사람 취급 말고 얼마든지 복수해보아라!”

여전히 옥명은 화탕 지옥의 불구덩이, 그 한복판에 잠겨 있었다. 황제는 불물을 헤치고 손을 뻗듯, 힘겹고 아프게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미워하십시오. 죽을힘을 다해 미워하십시오. 저 또한 그리하겠습니다….”

아들의 음울한 음성이 귓전을 적셨다. 황후는 너른 어깨너머 천장을 망연히 바라보며 건지처럼 축 늘어졌다.

“어머님이 아버님을 죽이고도 끝내 용서할 수 없었듯, 저 또한 어머님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하기엔 제 삶이 너무 아팠으니까요. 하지만, 이해하겠습니다. 어머님을 이해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이해하겠다고?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한단 말이냐? 모르겠구나. 이제는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원한 것이, 은종의 죽음이었는지, 정통의 몰락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벽해의 종말이었는지….”

대윤이 둥치를 베인 듯 털썩 무릎을 꿇고 얼굴을 싸쥐며 통곡하였다. 정운이 목 놓아 울었고, 준명이 소맷부리로 눈물을 찍었다. 잇달아 향선들도 칼을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

“한심한 놈.”

무표정한 채 조소하는 황후의 뺨을 흐르는 눈물이 긴 얼룩을 그렸다.

“나는 네 주위의 사람을 철저히 차단하여 너를 마음이 없는 황제로 만들려 했다. 그래, 그렇게 이용하려고. 줄을 매달아 평생을 부리며 갖고 놀려고. 헌데 너는 왜 여직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느냐? 왜 끝끝내 나를 내치지 못하고 이리 미어지게 안아 주느냐?”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더 세게 안았다. 실은 언제나 그러하였다. 언제나 어머니를 미워하려 애를 썼지만,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냉정해 보려 마음을 다잡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어머니였다. 하늘 아래 한 분뿐인 어머니였다.

“아직은 절 인정치 마십시오.”

황제는 쓰라린 눈을 찡그리며 어머니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소자는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인정치 마세요. 언젠가, 제가 벽해를 부수는 날이 온다면.”

우리를 둘러싼 벽해의 폐단, 벽해에 팽배한 지금의 폐단을 깨끗이 부숴 내는 날이 온다면.

“그때 어머님의 무릎을 베고 잠깐 눕겠습니다.”

황제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밝게 미소 지었다.

“그때 장하다 해 주십시오.”

어릴 땐 아픈 게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자주 아팠는지 모른다. 매사 냉정하고 곁을 주지 않던 어머니도, 아들이 아플 때는 사색이 되어 달려와 당신이 더 아픈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밤새 안아 주고, 도닥여 주고, 약손이라며 몸 곳곳을 살뜰히 쓰다듬어 주었으니까.

어머니가 무너지듯 아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삶이 아파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등을 이제는 아들이 쓸어 주었다. 오래 묵은 골을 대하듯, 담담하고 서글픈 손길이었다.

***

천청루 기둥 아래 연꽃이 만개하였다. 멀리 퍼질수록 맑다는 은은한 연향이 주변을 떠돌았다. 옥명은 흰빛에 가까운 연분홍 저고리를 걸치고 수수한 차림으로 수행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석계를 올랐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서 화색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그만큼 고아한 귀부인의 품격이 배어나왔다. 그 뒤를 준명이 따라 올랐다.

황제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장성한 아들의 뒷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어쩌면 서운함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지탱하며 중심이 되었던 지지대가 한순간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너의 답은 무엇이냐?”

황제 옆에 선 옥명이 고요하게 물었다.

“너는 어찌할 수 있다는 말이냐? 벽해에 팽배한 지금의 폐단, 이 폐단에 가담치 않고 그것들을 부술 수 있다고 여기느냐?”

“더는 황실과 귀족들의 상피가 없도록 평비 제도를 실시할 것입니다.”

옥명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나라의 체제를 바꾼다는 것은 그만한 시간과 품이 드는 일. 무엇보다 네가 이미 그들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씨족 문화를 부순다고 나서는 순간 반발이 이만저만이 아닐 게다. 특히나 정통과 신통이 아닌 다른 가문에서 황비를 들이는 것은 벌열인 그들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행태와 진배없지.”

“소자는 비를 들이지 않습니다. 후사를 보지 않을 것이니까요.”

황제는 담담히 말했다.

“다만 소자의 다음 후계가 평탄히 이 뜻을 목도할 수 있도록, 황제로서 길을 닦아 둘 생각입니다.”

“너는 후사를 보지 않겠다 하였다. 너 외에 이 나라에 황족이 없으니 다음 후계는….”

“미함 현군입니다.”

신통의 중추인 황제가 정통의 중추인 미함을 후계로 삼는다면 오랜 세월 벽해를 나누었던 인통 간의 경계가 얼마간 지워질 것이다. 오래도록 숙고한 일이었다.

“그렇게 신통과 정통을 통합하여 추후 다음 대가 황제에 오를 때는, 비로소 혈통과 인통 체제 자체가 사라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인통이, 사라진다고?”

옥명은 잠시 허를 찔린 듯 요연해졌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일이다. 정통과 신통을 통합하여 아예 인통을 없앤다니. 한 번도 생각지 못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그리던 세상이었다.

“더는 문무백관을 작위로서 나누지 않고, 성을 매개로 한 등용문을 없애 오롯이 인과 도, 학문에 의한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균등 제도를 실시할 것입니다. 학문과 실력이 된다면 작위가 없는 그 누구라도 다향원에 들 수 있고, 관작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뜻을 관철함과 동시에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백성들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 소자가 믿는 현왕의 길입니다.”

해사한 햇발 아래 드러난 벽안이 곧게 그녀를 향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리 밝은 햇살 아래 보니, 고왔다. 참으로 고운 눈동자였다. 차가운 고독과 세속의 경멸과 단애의 고통까지 모두 견뎌내고, 이제는 영롱한 꿈으로서 확고히 빛나는, 차분하고 의젓하고 현명한 눈이었다.

“그리고, 준명.”

황제가 나직이 부르자 준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르시옵소서, 폐하.”

“이대로 금성을 나서겠느냐.”

“예, 폐하. 그리할 요량이옵니다.”

잠시 바라보던 황제가 어여쁜 모란이 새겨진 작은 금합을 건넸다.

“이건 선물이다.”

“…….”

달칵. 금합을 열자 역시 모란 모양을 낸 장신구 일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위엄과 품위를 갖추어 부귀화라 한다던가. 본디도 준명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고, 그래서 더 맘에 쏙 들었다.

“준명아.”

그리 부르는 황제의 맑은 물빛의 시선 끝에는, 본 적 없던 우련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앞으로 어딜 가든 즐거이 지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무람없이 인편을 보내고. 알겠지?”

한참을 머뭇대던 준명은 치마를 단정히 감아쥐고 처음으로 황제를 향해 공경의 예를 다하여 읍하였다.

“예. …오라버니.”

막 천청루를 내린 준명은 아래서 서성이던 대윤과 효금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랬고, 놀라 얼른 안아 주는 아버지의 품은 따스했고, 아무도 몰래 손깍지를 끼어 오는 효금의 손가락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처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한, 그런 날이었다.

***

여운아.

예, 어머님.

너는 연꽃이 지닌 수많은 의미를 아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진창에서 자라지만 꽃잎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이제염오(離諸染汚)이고, 물이 닿아도 흔적도 없이 그대로 굴러 떨어지니 불여악구(不與惡俱)이며, 아무리 지저분한 물속이라도 연꽃이 가득 피면 악취는 사라지고 향기만이 연못을 가득 채우니 계향충만(戒香充滿)이며, 어디에 피어도 그 잎은 푸르고 색은 아름다워 본체청정(本體淸淨)이며, 모양이 둥글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고 행복하게 하니 면상희이(面相熹怡)이다. 줄기는 연하고 부드러워 강한 이에게도 어지간하면 꺾이지 않으니 유연불삽(柔軟不澁)이며, 피고 나면 반드시 열매를 맺으니 개부구족(開敷具足)이고, 활짝 피었을 때는 그 모양과 색이 참으로 곱고 아름다워 누구라도 넋을 빼앗기니 성숙청정(成熟淸淨)이며, 싹부터 남달라 꽃이 피지 않아도 그것이 연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 생기유상(生己有想)이라.

꽃 하나에 뜻이 많기도 합니다.

그래, 참으로 많기도 하구나. 하지만 그토록 수많은 뜻도 결국은 하나의 의미로 귀결된다지. 청정, 신성, 순결, 성장, 이 모든 것을 뜻하는 연꽃의 꽃말은 말이다…. ‘너는 아름답단다.’

앞으로 이는 너의 물결마다 연꽃이 만개하길 이 어미가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기원하겠노라. 부디 세상을 감싸는 성군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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