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10화 (110/111)

#110

3년 뒤, 벽룡사.

절 아래로 흐르는 계곡 기슭에 물망초가 만개하였다. 정운은 작고 맑은 소 앞에 주저앉아 어른거리는 송사리를 유난스레 지켜보다 이내 다섯 개로 나뉜 잎이 별꽃처럼 앙증맞고 어여쁜 연분홍 물망초로 눈길을 돌렸다. 먼발치를 서성이던 대윤이 내리 그 골짝에 앉아 있는 정운을 발견하고는 이내 골짝에 발을 디뎠다. 풀숲에 숨죽이고 있던 나비 떼가 화려한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하늘을 덮을 만큼 날아올랐다. 박꽃처럼 새하얀 나비였다.

“올해도 물망초가 활짝 피었군요. 소장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지요.”

정운은 갓난아이 손톱만 한 크기의 물망초 한 송이를 꺾었다. 대윤이 옆에 함께 쭈그려 앉더니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었다.

“마마. 소장은 본디 크고 화려한 꽃보다는 이리 소박하고 작고 여린 풀꽃이 좋습니다. 따로 피지 않고 이리 붙어 한 덩이로 피어나는 모양이 꼭 사람들 살아가는 모양과 같지 않습니까?”

정운은 투박한 손으로 여린 풀꽃이 다치지 않게 한 움큼 따다가 마찬가지로 투박한 대윤의 손에 들려 주었다. 또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그도 모자라 팔찌까지 엮어 주겠다며 풀물 든 손가락을 열심히 놀렸다. …이런 것은 딸이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입맛을 쩝 다시던 대윤이 어색하게 허허 웃었다. 우리 딸래미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비가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인가. 요즘 사는 낙이 각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다니는 고명딸의 서신을 받는 일이라는 대윤은 한참을 뒷짐 지고 먼산바라기나 하였다.

한편, 아미타불이 놓인 극락전에서 배례를 마치고 나선 옥명은 뜰에 내려 상쾌한 공기를 들이켰다. 행자 아이가 뜰에 우뚝 선 칠층석탑을 뱅글뱅글 돌면서 깔깔 웃었다. 뒤를 줄레줄레 따르는 강아지도 있었다.

날이 좋았다. 옥명은 부엌 할멈의 도움을 받아 달래를 무쳐 주먹밥을 싸가지고 절을 나섰다.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갖신을 신고 가사를 걸친 채 암벽을 지나 계곡의 골짜기로 들어섰다. 저 멀리 정운과 대윤이 보였다.

옥명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차디찬 계곡물에 뽀얀 발을 담갔다. 그러다 문득 물에 비친 자신의 머리칼을 응시하였다.

희한한 일이다. 금성을 떠나 벽룡사로 적을 옮긴 뒤에야 세월의 순리대로 사는 듯 흰머리가 돋기 시작했다. 수면 위에 어른어른 비치는 스스로를 응시하던 황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대윤은 세월이 가는 것이 어찌 나쁘다고만 하겠느냐고, 이제야 독기가 가시고 본연의 삶을 찾은 연유이니 고민도 심려도 말라 다그친다. 한데 정작 본인만은 왜 여직 새까만 머리칼을 뽐내는지 얄궂기 그지없었다. 옥명은 화관 쓰고 웃고 있는 대윤을 슬쩍 흘기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정운이 히히 웃으며 옥명 몫의 화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촌스럽다.”

냉정한 어미의 일침에 정운은 눈썹이 축 처진 채 돌아서는데,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님! 어머님!”

“…저놈이 또 왜.”

“어머님! 어머니이임!”

이그. 개 냄새. 옥명이 코를 싸쥐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마침 잣나무로 사이로 이어진 길목에 서서 손을 흔들던 해운이 늘씬한 긴 몸으로 한달음에 코앞까지 달려와 해맑게 헐떡였다. 돌치와 깜치를 더불어 열댓 마리의 검둥개들이 그 뒤를 우루루 쫓아와 원진을 짰다. 또 산책인지 뭐시긴지를 한다고 한참 산을 헤집어 댄 모양이었다.

“예까지 뭐 한다고 올라왔느냐? 그 시커먼 것들 데리고.”

“어머님도 참, 달포 만에 보는 아들한테 어인 핀잔이세요. 산책 겸 사냥 겸 어머니도 뵐 겸해서 올라왔지요.”

여전히 해말쑥한 해운은 전보다 몸이 좋아졌고 피부도 보기 좋게 그을려 무척 강건해 보였다. 이제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나 뭐라나. 좌우지간 아들들이 하나같이 개라면 사족을 못 쓰는 꼴이 영 괴란쩍고 보기 싫었던 옥명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너까지 개에 미쳐 학문과 수련은 게을리하고 온종일 개새끼들 뒤치다꺼리만 하면 어쩌누? 혼인은 안 하느냐? 여자가 그리 없어 그래? 면상 곱게 낳아 줬으면 써먹을 줄 좀 알아라, 어휴 내 이 한심한 놈들을 그냥.”

“개새끼들이 아니라 돌치 깜치입니다. 요기 이놈들은 한치 두치.”

“작작하려무나. 작작.”

해운은 편편한 너럭바위에 털썩 앉아 달래 주먹밥을 두 개 집어 한입에 넣고는 우물대면서 검둥개 자랑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모르셔서 그렇지 이놈들이 아주 똘똘합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안 가르친 것마저 스스로 깨우치는데 사람보다 개가 낫다는 말이 그르지가 않은가 봐요. 아까는 있지요, 이따만 한 멧돼지도 잡은 것 있지요? 저기 도랑가에서 불 피워 구워 먹을까요? 아버지 좋아하시잖아요.”

내내 귀를 긁으며 딴청이나 피우던 옥명이 화들짝 손사래를 쳤다.

“멧돼지는 무슨, 가사 입고 고기 먹을 일 있느냐? 스님들 아시면 혼쭐이 나려고. 아이고, 그나저나 이 똥개들이 어찌 태자궁에 있을 때보다 더 천방지축이 되었어? 저리 좀 치워라! 냄새난다!”

“그러지 말고 좀 예쁘다 귀엽다 얼러 주십시오. 어머님이 볼 때마다 학을 떼며 싫어하시니 이놈들이 서운해 더 그러는 것이지요.”

아는 얼굴이라고 신난 검둥개들이 뺨을 핥으려 들자 황후가 질색 팔색을 하며 넌더리를 쳤다. 한바탕 야단야단 후에야 병사들을 시켜 개들을 묶어 둔 해운은 깨끗한 계곡물에 손을 한차례 씻었다.

“참, 명일에도 금성에 내려오지 않으시렵니까?”

옥명은 어느덧 옆으로 다가온 정운의 입에 주먹밥을 쏙 넣어 주며, 덤덤히 대꾸하였다.

“이미 불가에 귀의한 몸인데 어찌 자꾸 성화냐.”

“엿새 후 다향원의 새 원주 취임식이 있지 않습니까. 큰 행사인데 태후이신 어머님이 빠지셔야 되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뜻만 통한다면 언제든 내려오실 수 있게 가마를 준비하여 올리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옥명은 정운의 부푼 등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일없다. 이따금 올라와서 이리 소식이나 전해 주면 족하구나.”

해운도 더는 말하지 않고 저 멀리 골짝을 내다보았다. 전 군우령, 신통의 마지막 대부께서 홀로 동그마니 등을 굽히고 앉아 꽃다발을 서리서리 엮고 있었다. 해운이 잠자코 턱을 괴었다.

“와… 참말 꽃이랑 안 어울리시네….”

“무슨.”

옥명이 눈을 흘기며 해운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저분이 예부터 얼마나 꽃에 일가견이 있는 분인데.”

남편을 바라보는 옥명의 눈이 행복한 웃음으로 젖었다. 꽃다발을 들고 이쪽을 향해 환히 웃어 보이는 대윤의 얼굴이 언젠가 보았던 젊은 날의 그때와 꼭 같았다.

***

장날이었다. 지난 몇 년 사이 각국과의 물자 교류가 부쩍 활발해진 덕에 더욱 넓고 화려해진 도경의 중심거리, 얼마 전 개업한 홍안 주막의 평상에도 막 남문을 들어온 보부상들이 그득그득 들어찼다.

팔다 남은 그림을 둘둘 말아 대충 봇짐 사이에 밀어 넣은 새옹도 휘파람을 불며 거리를 쏘다니다 주막을 찾았다.

“빈이, 나 왔어.”

그에 마당 구석에 놓인 화덕 앞에서 커다란 솥을 돌보고 있던 녹빈이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아이고, 우리 새옹 나리 왔소? 잉, 어째 오늘은 혼자야? 홍의 님은 어딜 가시고?”

“주군은 오늘쯤 벌초 간다고 하셔서 나 설렁설렁 혼자 내려왔지 뭐. 저기, 밥 좀 넉넉히 해서 말아 줘. 아침부터 여기저기 발싸심했더니 영 허기가 져서 말이야.”

봇짐을 평상에 내려놓으며 새옹이 툴툴거렸다. 춘화도 그리 안 팔렸는데 풍경화라고 팔릴쏘냐. 이 길은 영 주군의 길이 아닌 듯하니 제발 다시 금성에 들어가 녹봉이나 챙기시자고 아무리 닦달을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 멍청한 주군이었다.

“삼덕이는?”

새옹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기 무섭게, 인파를 헤치고 이제 막 변성기에 든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재들! 아재드으을!”

“…저놈 저거 절대 양반은 못 돼.”

“암만요.”

녹빈과 새옹이 심드렁히 보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달려온 삼덕이 소리쳤다.

“방이 붙었습니다!”

“응?”

“광장에 방이 붙었다고요, 새 원주 취임식을 기념하며 신입 무동들을 대거 뽑는다고 합니다! 열세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강건한 사내라면 과거를 치를 자격이 된다니까요! 열세 살! 나 생일 지났는데! 진짜 올해로 열세 살인데!”

녹빈이 치맛자락을 여며 팔짱을 끼우고는 코웃음을 팽 쳤다.

“이놈 이거 또 설레발 시작이네. 귀족도 뭣도 아닌 놈이 무슨 다향원에 든다 그래? 김칫국 장독째로 들이켜지 말고 장작이나 패라, 이놈아. 하여튼 저건 허구한 날 싸돌아 댕기기나 하고 진득하게 앉아 있는 꼴을 못 봤다니까.”

그러자 삼덕이 쯧쯧 혀를 차며 맞잡이로 팔짱을 꼈다.

“아, 이 아재야말로 참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신다니까. 균등 제도 몰라요? 균등 제도? 올해부터는 작위가 없는 평민이어도 과거 시험과 무관 시험에 합격만 한다면 다향원에 들어 무동이 될 수 있다고 금성에서 공표를 했다고요!”

신이 난 삼덕은 주막 둘레를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명일 무동 입단식과 더불어 원주 취임식이 열린다면, 장거리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릴 터였다. 마침 옆에서 장작 패던 녹빈이 친구 중노미가 이럴 게 아니라 육수부터 말아야겠다며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갔다.

“게다가! 게다가!”

주막을 열 바퀴 쯤 돈 삼덕이 다시 녹빈과 새옹 곁으로 와 소리쳤다.

“황제 폐하께서 갓 입학한 신입 무동들에게까지 녹봉을 준다는 소문이 있다고요!”

끄으으, 엉거주춤 서서 주먹을 쥐어짜며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에 녹빈이 저러다 똥 싸겠다고 중얼거리는데, 새옹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아까 뭐라고? 원주 취임식이라고?”

“네, 새 원주 취임식이요!”

“현재 다향원에는 부제 향선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누가 원주가 된다는 말이냐?”

“엥, 듣고 보니 그러네?”

“…흐음?”

세 사내는 동시에 머리를 맞대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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