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완결)
“진짜 가세요?”
“진짜 가나?”
“…진짜 갑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안 가는 게 나을 터인데?”
“…가야지요, 황명인데.”
큰머리를 얹은 향주 소의와 그의 아비 문성은, 똑같이 수심에 잠긴 얼굴로 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 주겠느냐?”
머뭇대던 사내가 소의를 향해 물었다. 소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 집 요새 개털 날려요.”
끄응. 한숨을 쉬던 사내가 이내 문성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문성은 근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주치면 밸도 없는 애비라고 갈근거리기나 할 걸 무어 좋은 꼴 보겠다고 게까지 쫓아가겠나? 자네 결정이니 자네 혼자 가는 것이 이치에 맞지. 뭐 내 아들이긴 하지만, 그놈 그거 성격이 보통 아니라서 열 받으면 옛 상관이고 뭐고 없으니까 여차하면 그냥 튀라고. 그게 살길이라고.”
“…….”
“아버지도 참. 가뜩이나 위축되신 분께 그게 할 소리예요? 괜찮습니다, 미함 공. 울 오라버니 제가 이겨요. 심려치 말고 얼른 다녀오셔요.”
“그래, 무사히 잘 다녀오게나. 살아서 돌아온다면 다음 바둑은 두 점 깔아 주는 것 잊지 말고. 자네는 참 사람이 너무 원칙을 따져 문제야. 툭하면 장인을 이겨 먹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아야. 왜 꼬집느냐.”
고명딸의 매운 손맛에 삐친 문성은 결국 팽글 몸을 돌려 슬렁슬렁 뒷짐 지고 안채로 사라져 버렸다.
어지간히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 사내였다. 답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각째 발걸음을 못 떼고 머뭇대는 낭군을 보려니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사라지자마자 소의는 얄망궂게 웃으며 미함의 팔을 당겨, 안겨 들었다.
“저희 오라버니가 그리 무서우시면 저와 혼인은 왜 하셨답니까?”
“…말이라고 하느냐, 그것을.”
귀를 붉히면서도, 은근슬쩍 낭창낭창한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도, 미함은 못내 퉁을 놓는다. 실제로 홍의에게 미함은 언제나 위엄 있던 상관에서 금쪽같은 여동생을 채간 썩을 놈으로 강등된 처지라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어여쁜 내자의 애교 서린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오른 미함은, 어쨌거나 내키지 않는 길을 달막달막 나아가기 시작했다.
***
배꽃이 떨어질 무렵, 동백산에는 온통 찔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찔레꽃 사이로 흰빛의 나비들이 난분분 쏘삭이며 춤을 추고 봄비를 가득 먹고 떨어진 꽃잎은 다시금 자늑자늑한 꽃길로 놓여 발밑을 채웠다. 곳곳의 시냇물이 넘치고 향기가 떠도는 장관이 산을 내리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막 벌초를 마친 홍의는 길벗으로 데리고 올라온 털이 희고 눈이 푸른 늑대개 두 마리에게 동시에 건육을 휙 던졌다. 개들이 날래게 뛰어올라 용하게 잘 받아먹으니 한두 번 맞춰 본 수작이 아닌 듯했다.
늦지 않게 산을 내려 마을로 돌아온 홍의는 서둘러 대나무 사립문을 열고 사저에 들어섰다. 개들과 암소에게 마실 물을 가득 채워 주고 풍로를 돌려 불을 지폈다. 몇 년 사이 세간이 복잡하고 많아졌다. 소의와 문성이 미함의 본가로 적을 옮긴 뒤, 홍의는 사랑채를 비우고 소담한 약방을 차려 소일했다.
향선 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홍의의 일과는 바빴다. 여전히 왁자하고 정이 복닥대는 뜨거운 삶이었다. 본디 은둔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 타고난 그의 바탕이기도 했고, 매사 우묵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홍의를 모두가 좋아하여 그저 이끌리듯 찾아드는 것이었다.
사위에 어스름이 깃들 무렵이었다. 부엌에서는 유모가 자반고기를 굽는지 매캐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마루에 앉아 약초를 찧고 있던 홍의가 문득 고개를 든다. 마찬가지로 마루에 엎드려 늘어져 있던 개들의 귀가 쭝긋하며 울타리를 향하여 우렁차게 짖기 시작했다.
“이런.”
막 문밖에서 말을 멈추는 이를 발견한 홍의가 놀랍다는 듯 읊조렸다.
“도둑놈이 제 발로 나타나다니?”
“…….”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붙매인 미함은 내 분명 저런 반응일 줄 알았다고, 어째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는 법이 없는 진부한 놈이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부엌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동향을 살피던 유모가 숨 죽여 낄낄 웃었다. 그와 동시에 아르르, 낯선 이와 커다란 말이 집 앞을 서성이니 경계심이 인 개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까 드러냈다.
홍의는 울타리까지 다가가 벌초를 너무 하여 팔이 아프다면서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호미를 휘익휘익 휘둘렀다. 미함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적당히 해라. 홍의야.”
참다못해 씹어뱉자 홍의가 저승사자 같은 표정으로 덜컹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 감히 매형의 존함을?”
‘…저놈이.’
오른쪽 발로 홍의의 오금을 후려칠 뻔한 것을, 호미 든 홍의의 팔을 홱 잡아당겨 전신으로 억누른 뒤에 삼끈으로 팔다리를 꽁꽁 묶어 저기 매실나무에 거꾸로 매달 뻔한 것을 필사의 힘으로 참아 누르며, 미함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내 전할 말이 있어 온 것이니 이쯤 하고 안으로 들자. 언제까지 이리 나를 척지고 모질게 굴 참이냐?”
“아이고! 우리 아옹이 다옹이, 우리 집에 뻔뻔함이 철옹성인 도둑놈이 찾아와 몹시 화가 난 게로구나. 그러한 게야. 그렇다고 내 너희들의 목줄을 풀어 줄 순 없어요. 살생은 아주 나쁜 것이거든.”
“…….”
손으로는 흰 개들을 어르면서 눈으로는 미함을 부라리는 홍의였다. 미함은 어느덧 조용히 차렷 자세를 하고 입을 합 다물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사정사정하여 대문 안까지 입성하긴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문 안, 앞마당까지가 고작이었다. 주인장의 마음이 꼭 저희들 마음이라도 되는 양, 미함이 손만 까딱해도 이빨을 드러내는 번견들의 서슬 때문이었다. 뺨에 경련을 일으키며 미함이 애써 웃었다.
“네가 개들의 버릇을 잘못 들여도 한참 잘못 들이는 듯하구나.”
홍의는 묵묵히 개들을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 묶었다. 희고 성긴 털이 너스르르 덮인 이 늑대개들은 삼 년 전 홍의가 금성을 떠나왔을 무렵 황제가 인편에 보내온 자견이었다. 드물게 푸르고 맑은 눈동자가 누군가를 꼭 빼닮아 고귀하고 품격 있었다. 새옹이야 어딜 한갓 개들에게 ‘옹’자 돌림을 쓰느냐고 게거품을 물었지만.
물끄러미 주인을 올려다보던 개들이 앞발로 자리를 긁어 덥히고는 의젓하게 주저앉았다. 홍의가 씩 웃으며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홍의는 슬슬 우물가로 가서 물질을 시작했다. 팔을 걷고 목통에 한가득 쌓인 이불에 물을 붓는 폼이 묵힌 빨래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미함은 괜히 도와준답시고 그 곁을 서성이다가 물을 한 됫박 얻어맞았다. 그리고 두레박을 밟아 미끄러져 뒤통수까지 깨지고 나서야 금성으로부터 온 전갈을 꺼내들 수 있었다.
“엿새 후, 금성에서 새 원주 취임식이 열릴 예정이다.”
대님을 종아리에 조이고 빨랫감을 밟던 홍의가 멈칫하였다. 미함은 뒤통수의 피가 등짝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위엄 있게 뒷짐을 졌다.
“그간 나는 임기를 모두 마쳤음에도 삼 년을 더하여 다향원을 지켰다. 황제께서 그러기를 원하셨으니 말이야.”
“…….”
“홍의야, 이제 네가 내 뒤를 이어 줬으면 한다.”
홍의는 느리게 빨래를 밟았다.
“네가 내게 맡긴 무동들도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고, 금성의 모든 향선들 또한 이와 뜻을 같이 한다. 당시 부제였던 해운도 일찍이 관직을 내려놓았고, 어쨌거나 삼 년 전 차기 부제 후보 중 가장 인망이 높았던 네가 아니냐. 또한, 원주는 네 오랜 꿈이었지.”
미함이 음성을 낮춰 물었다.
“만산성 접전을 기억하느냐?”
“…어찌 잊겠습니까.”
홍의가 씁쓸히 웃었다. 그때 홍의는 치기 어린 소년이었다. 무엇이든 지키고 싶었으나 무엇도 지킬 힘이 없던 시절이었다. 무엇도 가진 것이 없기에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열여덟이었다.
“무엇을 얻고자 사지로 뛰어들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간명히 대꾸하였지. 단지 지키고자 하였을 뿐이라고. 이제 나서 지켜라. 너를 따르던 무동들, 벽해, 그리고 황제 폐하를.”
마지막 이름에 홍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돌아오너라, 홍의야. 좋은 세상이다. 벽해는 이제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곳이 되었어.”
잠자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함의 말이 맞다. 세상은 변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분께 이생을 다 써도 갚지 못할 커다란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
홍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분께 도움이 되지도, 고작 믿어주는 것조차 해드리지 못했어요. 곁조차 지켜드리지 못했지요.”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으로 미함을 바라보았다.
“미함 공은 그간 황제 폐하를 모시며 이 좋은 세상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셨지만, 신은 아무것도 해낸 일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원주에 올라 무동들을 이끌겠습니까? 어찌 폐하의 용안을 뵙고 분수에 넘치는 은애를 구걸하겠습니까?”
“그건 폐하의 말씀과 좀 다른데…?”
미함이 허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만든 세상이라 하셨다.”
홍의가 입을 다물고 뚫어져라 미함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물 밖에서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너였다고 하셨어.”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홍의가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젖은 빨랫감으로 그예 눈물이 떨어졌다.
미함이 떠난 뒤, 홍의는 조용히 방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방안에 초를 켜고 자개장롱을 뒤져 패물함 뒤편에 숨겨 두었던 담비 털 담요를 꺼냈다.
방 한가운데 펼친 담비 털 담요 안에는 해묵은 그림 한 장과 은실로 짠 머리끈과 은자 닷 근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홍의는 양반다리로 주저앉아서 아끼느라 몇 번 써보지도 못한 머리끈을 매만지고, 오래전에 그려놓고 마감하지 않은 그림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백반을 입히지 않아 색이 바래고 손때가 묻어 너덜거리는 종이 위에는 아름다운 벽룡이 작은 우물을 솟구쳐 푸른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젖어 글썽였다. 하릴없는 웃음도 혹간 새어나왔다.
그때, 붉거나 푸르거나 희거나 다사롭던, 어느 봄날이었다. 화구를 챙겨 남산으로 간 홍의는 첫사랑 달래를 꼭 빼닮은 해어화 연홍을 마주치게 되었고, 그녀를 구하려다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은 그 모든 폐단의 중심이었던 황후의 아들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울 때도 많았다. 배를 잡고 웃을 만큼 즐거웠던 기억들, 눈물이 넘칠 만큼 슬프고 아팠던 한때, 별처럼 많았던 설렘의 순간과 영겁 같이 길었던 벅참의 찰나들,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여기 한 그림으로 빛나는 듯했다.
홍의는 매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성했다. 금성을 떠나온 삼년 동안 하루 두 번을 꼬박 빼놓지 않고 망궐례(望闕禮, 황제가 있는 궁궐 쪽을 향해서 배례하는 의식)를 올렸고 잠들기 전이면 의식처럼 그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리하면 하루의 시작과 끝이 춥지 않았다.
가끔은 이불속에서 숨이 넘어가도록 울기도 했다. 분명히 그때는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고 여겼는데, 매번을 밉살맞게만 굴고 실망만 안겨 드린 것은 결단코 아닐진대, 어찌하여 이리 속없이 못해 드린 일만 떠오르는지, 염치없고 면구스럽기만 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던 그가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던 그가 떠올랐다. 끝끝내 말하지 못한 사랑과 부르지 못한 이름이 홀로된 밤에야 서럽게 입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잠들면 꿈길에마저 그가 있었다. 연녹빛 새잎 너머, 닿지 않은 거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꿈에서 깨고 나면 고꾸라지듯 대문까지 달려가 텅 빈 길목을 망연자실 내다보곤 했다. 그저 무야(戊夜)의 새벽빛처럼 고즈넉이, 선선하게 와 주시길 바랐다.
***
이튿날 아침, 수수한 미색 장유에 새하얀 가반을 깔끔히 차려입은 홍의는 어김없이 망궐례를 올리려고 안뜰로 나갔다. 그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란 새옹이 잠이 덜 깬 얼굴로 후다닥 나와 살펴보니, 홍의가 늘 소중히 배례를 올리는 불단 위에 새가 앉았다 솟구친 흔적인지 까만 깃털 몇 개가 놓여 있고, 흙바닥에는 정화수 그릇과 초가 엉망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하여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었다. 홍의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조반을 먹으려 둘러앉은 유모와 새옹은 연신 눈을 맞추며 홍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새옹이 은근슬쩍 며칠 후 있을 새 원주 취임식에 관하여 운을 떼었으나, 홍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무시하였다.
“주군, 쪽물이 떨어졌는데요?”
“뭐?”
밥상을 물리고 풍경화 그리려 나서는데, 새옹이 눈치 보며 말했다. 홍의는 갖신을 신다 말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런 쪽물.
“에휴. 어쨌거나 포목점에 다녀오겠습니다.”
“얼마나 걸리느냐?”
“한나절이면 충분합니다.”
홍의는 오늘은 홍화도 거두어야하니 일찍 돌아오라면서 세마(貰馬, 세를 주고 말을 빌리는 일) 놓을 돈을 주었다.
“저, 주군.”
나서려던 새옹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슬슬 돌아보았다.
“왜.”
“그, 조만간 새 원주 취임식이…”
“주둥이.”
새옹은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고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아침부터 아랫사람들에게 생짜를 둔 스스로가 객심스러워, 홀로 남은 홍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유난히 사사건건 짜증나는 날이 있다. 가뜩이나 심란하고 마음이 복잡한데 이때다 싶은 듯 하는 일마다 삐걱대고 어긋나는 그런 날. 홍의에겐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홍화 밭을 돌본답시고 동구 밖으로 나갔다가 벌에 쏘였다. 어찌어찌 밭을 일구고 돌아오는 길에는 소똥을 밟고 미끄러질 뻔했고, 뒷산에서 땔나무를 긁다가 뱀과 마주쳤다. 약초를 널어둔 사이에 소나기가 내렸으며 소제를 하는 도중에 댑싸리비가 부러졌다. 집짐승들도 오늘따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장독을 깨먹는 둥 안하던 사고를 쳤다.
“한나절이면 온다던 놈은 왜 여직 오도 가도 않는 게야?”
그 와중에 잘 쓰던 참빗마저 와지끈 부러져, 솔방울 하나 구해 와 개들의 목털을 빗기던 홍의가 참다못해 으르렁거렸다. 이렇듯 하는 일마다 전부 말썽이 터지니 이만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천신의 계시 같은 것이다.
해가 지기도 전에 벌써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홍의는 거푸 한숨을 쉬며 안마당으로 나섰다. 어느덧 온 집안이 무른 붉은색으로 이지러져 있었고, 유모는 고새 마을을 나섰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오늘따라 노을도 진하구나.”
저 멀리 서산 근처는 이미 거먕빛이 선연했다. 쓰라린 마음과 달리 노을은 금돈처럼 아름다운데, 문득 기별 없는 왜바람이 불었다.
출렁, 하고 바지랑대가 흔들렸다.
낮에 널어둔 이불보가 미끄러져 흙바닥의 엉그름에 닿을락 말락하였다.
“…….”
더는 찜부럭을 낼 기운도 없었다.
홍의는 고개를 설레 저으며 이불보를 받쳐 들고 다시 털썩 걸었다. 진이 쭐렁이며 새하얀 장막이 시선을 가리었다. 그 사이에 서 있으려니 저녁놀을 머금은 바람에서조차 물 냄새가 났다.
끼이이-
대문의 암톨쩌귀와 수톨쩌귀가 부딪기는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새옹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한 홍의는 돌아보지 않고 다른 이불보를 살폈다. 그러다 멈칫했다.
해사한 난향이 훅 끼쳤다.
출렁, 높게 인 바람에 이불보가 펄럭였다.
홍의가 놀라 돌아보려던 찰나, 새하얀 나래 같은 소매가 뒤로부터 뻗쳐와 상체를 꽉 다죄었다.
…잡았다.
귓가에 스치는 나지막한 옥음과 부드러운 입술이 귀밑에 닿았다. 그 목소리에 모든 것이 하얘졌다. 그간의 모든 불행이 한순간에 소급되는 느낌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소매를 붙들고 돌아보자 펄럭이는 천 사이로 황제가 나타났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학처럼 새하얀 공자의 차림이었으나 틀림없는 그였다. 연푸른 눈동자가 붉은 노을과 부드럽게 얽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삼 년의 세월을 머금고 더욱 공고하고 단단해진 눈빛과, 의젓하게 내려다보는 이마와, 살며시 웃는 붉은 입술과, 옥설 같은 두 뺨으로 그때의 황태자가 겹쳐 보였다. 홍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황제가 그런 홍의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홍의야.”
세상이 꽃처럼 붉었다.
“보고 싶었어.”
다음 순간, 살짝 입꼬리를 말아 웃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모든 경계와 제약이 일시에 흐무러졌다.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본 끝에, 떨리는 손을 들어 황제의 뺨을 감쌌다. 홍의는 그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웃었다. 어색한 입매를 끌어당겨 웃음으로 울음을 잠그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아껴온 마음을 비로소 전하듯, 간절히 불러보았다.
“…여운아.”
다시 한봄이었다.
結
향선 홍의는 다음 날 황제의 연을 타고 금성으로 돌아가 원주의 위에 올랐다. 그가 다향원의 주인이 되자마자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해어화 제도를 철폐하여 서민의 딸들을 부모의 곁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이후 홍의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며, 각기 인통을 뜻하는 향선들의 정복을 붉은색으로 통일하여 파벌을 없애고 수천 명의 무동들과 함께 나라 곳곳을 다니며 소작농의 일손을 도와 서민들의 윤택한 삶에 이바지하였다.
황제는 대대적인 진전 개간으로 나라가 부유해지자 속국의 노비들을 대거 면천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세계 각국으로 사신을 보내 외교정치에 힘썼고, 재화와 문물이 차고 넘치는 벽해는 해를 거듭할수록 태평성세와 금성탕지를 이루었다. 삼 년 후 미함 현군과 소의 낭자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이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양자로 삼았으니 그로서 후계가 안돈되었다.
황제는 이후로도 평생 동안 단 한사람만을 깊이 사랑하였으며, 대궁의 안뜰에 붉은 단청을 둔 아름다운 별궁을 짓고 홍의궁이라 이름 붙여 그를 주인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두 사람의 색련(色戀)이 더욱 다채로운 꽃빛으로 피었다. 형형하고 아름다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