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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1화 (1/88)

1화

“너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지?”

도지완은 나에게 물으며 기다란 다리를 꼬았다. 그러면서 눈으로 훑는 것이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것 같았다.

‘이 지독한 새끼.’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흘렀다. 천사 생활을 한 지 3만 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독한 새끼는 처음이었다.

‘에효, 너무 순진했지.’

지금은 멀끔한 얼굴로 인간인 척하고 있지만 내 눈앞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도지완은 미래에 마왕이 되는 악의 숙주였다.

그런 악의 숙주가 친절하고 상냥할 리 만무했건만 나는 너무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았다.

‘그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면 미래는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라니. 으이그, 3만 살 헛먹었다, 아주.’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으니까 내 대답을 기다리던 도지완은 대답 없는 나를 보고는 신경질을 부렸다.

“신지호.”

“아, 예. 형님.”

신경질이라고 해 봤자 패악을 부리는 것은 아니고 고상하게 이름이나 부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 행동에서마저 품격이 느껴지는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예, 형님 말씀이면 뭐든지 할 수 있죠. 제가 형님의 개 아닙니까.”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헤헤, 하고 비굴하게 웃는 내 얼굴을 도지완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투명한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상대였다.

도지완은 가지고 온 상자에 손을 넣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낯선 바깥의 풍경에 바들바들 떠는 주먹만 한 강아지였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 걸 보면 어디서 주워 온 거 같지는 않았다.

“자. 여기.”

“예?”

도지완은 나에게 그걸 넘겼다. 그의 손에 있을 때는 겁먹어 아무것도 못 하던 강아지가 내 품에 안기고서야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온몸으로 도지완이 무서웠다고 말하는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으니 도지완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죽여.”

“예?”

“죽이라고.”

뭘? 이 강아지를? 나는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입을 헤벌리고 대화를 곱씹다가 화들짝 놀랐다. 죽이라고? 이 불쌍한 애를?

시선을 내렸다가 촉촉한 눈망울과 눈이 마주쳤다. 낯선 곳에 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작게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보니 어떻게 이걸 죽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악의 숙주…….’

내가 망설이는 티를 내자 도지완이 말했다.

“내 개라며. 다른 개가 내 옆에 있으면 물어 죽여야지. 자리를 뺏기게 생겼잖아.”

“하지만…… 얘는 작잖아요? 그냥 물기만 하면 안 됩니까?”

입술로 앙증맞은 코나 살짝 물어 주고 싶었다. 아니면 배 위에 입 맞춰서 배 방구나 불어 주거나.

내가 개가 되겠다 한 것은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 노릇을 하겠다는 거지 애완견이 되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싫어?”

명령을 내렸음에도 내가 움직이지 않자 도지완의 얼굴에서 흥미가 점차 가셨다. 저 흥미 때문에 나를 데리고 있는 것이기에 흥미가 완전히 사라지면 도지완은 나를 내칠 터였다.

그러면 내 계획은 완전 실패였다.

‘이씨……! 저게 지금 누가 자기 목숨을 살려 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억울했다. 정말로 억울했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바라던 와중 나 홀로 그에게 기회를 주자 말했고, 그 때문에 이렇게 천계에서 내려오게 됐건만…….

이 은혜도 모르는 검은 짐승은 나에게 살생을 하라는 요구나 했다.

‘에효, 이 자식은 미래를 모르니까 어쩔 수 없겠지.’

결국 나는 내쳐지기 전에 행동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저 그럼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왜?”

“에이, 여기서 죽일 순 없죠. 형님 눈 상하실라.”

비굴하게 웃으며 혹시나 도지완이 나를 잡을까 긴장했다. 그러나 놈은 내가 제 명령을 듣자 다른 건 상관없어하는 것 같았다.

조막만 한 강아지를 안고 건물 뒤편으로 나온 나는 문을 등진 채 우는소리를 내었다.

“으앙! 어떡해, 애기야! 내가 너를 어떻게 죽여어!”

“끼엥, 깽, 끼우웅……!”

서로 얼굴을 맞댄 강아지와 나는 한참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천사 시절의 나라면 도지완의 명령을 따라야 하니 눈 깜짝하지 않고 죽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들어오며 감정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이성적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무작정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예? 저요?”

“네! 누나!”

갑자기 초면에 누나 소리를 들은 여성분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개 좋아하세요?”

“네……. 좋아는 하는데요.”

“개 알레르기 있나요?”

“아뇨?”

“그럼 개 키울 생각은 있으세요?”

“뭐…… 언젠가는?”

어색해하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여성분에게 나는 강아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강아지를 받은 여성분이 나를 바라보았다.

“얘 키우실래요?”

“네? 얘를요?”

애교가 많은 녀석인지 벌써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있는 돈 전부를 털어 냈다.

“이걸로 용품도 사시고요, 사료도 사시고요. 예방 접종이랑 다 하세요.”

“아니, 잠깐만요…….”

“정말 죄송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잘 살아, 애기야! 나는 그녀가 나를 잡기 전에 후다닥 달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헤어짐이 아쉽기는 했지만 내가 책임질 순 없었다. 나는 이미 내 천사 생활을 걸고 미친개 한 마리를 조련 중이었으니까.

도지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그는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죠.”

“손이 깨끗하네.”

“에이, 형님 앞에 더럽게 뭘 묻히고 올 순 없지 않습니까.”

헤헤, 웃으며 대답하는 나를 보며 도지완은 제법이라는 듯이 픽 웃었다. 맞은편에 앉으라고 하기에 앉았더니 도지완의 경호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와 그와 내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하, 인간계 와서 제일 좋은 게 있다면 바로 이거지.’

먹으면 찌르르하면서 정신이 또렷해진다. 천계에는 왜 이런 게 없었을까.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쫍쫍 빨고 있었더니 다시 도지완의 경호원이 다가왔다.

“길드장님.”

“음.”

“푸우웁!”

경호원과 함께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나는 마시던 것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강아지를 맡겼던 여성분이 어색한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셔 왔습니다.”

“나가 봐.”

그런데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닌 듯했다. 도지완의 경호원에게 잡혀 온 건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경호원은 여성분의 품에서 강아지를 빼앗아 도지완에게 내밀고선 그녀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카페 안에는 도지완과 나, 잔뜩 풀이 죽은 강아지만이 남았다.

도지완은 테이블 위에 강아지를 올려 두며 물었다.

“죽였다며.”

“…….”

“버렸다며.”

나는 도지완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것은 강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바들바들 떨면서 나에게 다가와 기댔다.

도지완이 무서워 끼잉 소리도 못 내고 올려다보는 강아지를 보자 열이 받았다.

‘이 가여운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고개를 들어 도지완을 쏘아본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명령을 듣지 않아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도지완의 표정은 평온했던 것이다.

“뭐?”

지금도 내가 노려보고 있지만 기분 나쁘다는 티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왜 바라보냐는 의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화내리라 생각했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다행인가 싶었다. 적어도 나를 내칠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

“저는…….”

“…….”

“얘 못 죽여요! 으앙!”

“끼앵! 깽!”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죽여요!”

“끼우우웅! 우웅!”

말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 강아지와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난 얘 못 죽여! 안 죽여! 하지만 내쳐지는 것도 싫어서 눈치를 살살 보고 있으니 우리를 바라보던 도지완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하…….”

“안 돼! 나 내치면 안 돼요! 갈 곳 없어! 얘 키워 달라고 돈도 다 줬단 말이야!”

앞으로 손가락만 빨면서 살아야 한단 말이야! 천사일 때는 밥을 먹을 필요가 없었지만 인간이 된 지금은 매 끼니마다 밥을 먹지 않으면 괴로웠다.

천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없었기에 도지완에게 내쳐지면 나는 신지호의 몸에서 세상이 멸망하는 걸 구경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를 끌어안은 채 도지완에게 매달리자 도지완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그가 화내려는 건가 싶어 눈알을 살살 굴리며 눈치를 보는데 도지완이 한숨을 쉬었다.

“놔.”

“저 버리면 안 됩니다! 형님!”

“안 버리니까 놓으라고.”

그의 말에 냉큼 놓자 도지완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내민 손 모양이 잡으라는 것 같지는 않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 도지완의 손가락이 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아악!”

……너무해! 도지완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상급 헌터라 힘이 무지막지하게 센 탓에 머리통이 반으로 쪼개진 줄 알았다.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눈으로 올려다봤지만 도지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앞으로 잘 돌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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