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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7화 (7/88)

7화

* * *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첫날 텅 비었던 냉장고는 어느새 꽉꽉 차 있었다. 레인지에 바로 돌려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도 한가득이라 나는 히죽 웃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땐 정말 서러웠는데.’

배가 찢어지게 고픈데 먹을 게 없다니. 역류한 위액에 목이 타들어 가는데 마실 물도 없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정호 형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중에 꼭 보답해야지.’

신지호의 몸으로야 밥 사 주는 것이 전부겠지만, 천사인 나는 달랐다. 일이 끝나면 꼭 그에게 가호를 내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호를 받은 인간은 장수하고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만큼 내 신성을 쓰는 일이기 때문에 천사들은 아무에게나 가호를 내리지 않았다. 천사에겐 신성이 곧 목숨이었다.

물론 천계에 있으면 신성이 금방 회복된다. 그렇기에 가호를 내려도 문제가 없지만 딱히 인간에게 애착이 없는 천사들이었기에 진짜 잘한 사람, 예를 들어 성인이라든가 그런 사람에게나 내려 주는 것이 다였다.

지금이라도 내려 주고 싶지만 말했다시피 천계가 아닌 이상 신성이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죽은 신지호의 몸을 신성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 그러긴 힘들었다.

밖에 나가려는데 정호 형이 나를 불렀다.

“어디 가냐?”

“저, 은행에요.”

“그래? 같이 갈래?”

“아녜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정호 형에게 못 보일 꼴 다 보여 줘서 그런지 형은 나를 좀 과보호하는 면이 있었다.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보던 정호 형은 곧 불안한 기색을 지우고 말했다.

“그래, 다녀와. 저녁엔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까?”

“좋아요.”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나는 원룸을 나섰다. 근처에 있는 은행이 넝협과 저희은행 두 개였는데 나는 이상하게 저희은행이 좀 더 마음에 들어 그쪽으로 향했다.

‘왠지 불안한걸…….’

주머니 안에 현금 300만 원이 있어서 그런가. 억 소리 나는 금액은 아니지만 내가 가져 본 금액 중 가장 큰 금액이라 그런지 심장이 다 떨렸다.

빨리 계좌에 숨겨 둬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후다닥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억!”

대낮에…… 강도? 나는 깜짝 놀라며 버둥거렸지만 강도의 힘은 D급 헌터를 상회했다.

‘미친. 헌터가 왜 강도 짓을 해?’

당황해하며 끌려가던 나는 상대가 나를 던지듯 놔주자 그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신지호의 기억이었다.

‘사채업자잖아?’

아무래도 연락을 씹으니까 찾아온 듯했다. 그는 비죽 비웃으며 말했다.

“고객님,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별거 아닌 상대건만 그에게 당했던 신지호의 기억이 내 몸을 짓눌렀다.

몸을 떠는 나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라본 사채업자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발밑에서 기는 상대를 조소하는 얼굴이었다.

“야. 너 어떻게 돈 갚을래? 알바도 다 잘려서 이제 돈 벌 곳 없잖아.”

신지호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가 세뇌했다. 헌터인 그가 혹시라도 목숨 걸고 헌터 일이라도 해서 돈을 갚을까 봐 폭력으로 그를 눌렀다.

사람의 주먹이 무서운 사람이 어떻게 괴수를 상대할 수 있을까? 결국 신지호는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신지호가 짊어진 무거운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신지호의 죽음에는 이 사람도 관련되어 있는 거지.’

물론 사채업자는 신지호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소중한 광산 노예를 죽이긴 왜 죽이겠는가. 하지만 신지호는 죽음으로 도망쳤다. 죽는 것이 그와 맞서는 것보다 쉬웠다는 것이다.

“그냥 광산 가라니까? 그냥 10년 빡세게 일해서 번다고 생각해. 대학도 중퇴해서 고졸인 네가 뭐로 그 큰돈을 벌겠어.”

신지호였다면 협박이 반쯤 담긴 이 소리에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신지호가 아닌 나였다.

“나 일하고 있어요.”

“네가? 무슨?”

피식 비웃는 사채업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시스트 일 하고 있어요. 그걸로 돈 갚을게요.”

어시스트라는 말에 사채업자가 깜짝 놀랐다. 헌터에 가려져서 그렇지 어시스트도 꽤 고소득 직업이었으니까.

내가 그 일을 어떻게 딴 건지 궁금하단 눈으로 사채업자가 나를 위아래로 흘겼다.

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은행에 입금할 생각으로 챙겨 온 봉투였다.

“돈도 벌었어요. 오래 걸려도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끼.”

사채업자가 내 손에서 봉투를 빼앗았다. 내용물을 보고 눈을 빛낸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쳤다.

“악!”

눈앞이 번쩍하며 맞은 부위에 열이 확 올랐다. 입술도 찢어졌는지 입술 쪽이 시큰거렸다.

한순간 살의가 치솟아 올랐다. 이 새끼가 뭔데 날 치지?

‘……참아야 해.’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이런 쓰레기 하나 죽이는 건 쉽지만 그것이 문제를 일으켜 버린다면 할 일을 끝마치지 못할 터였다.

참아 내는 나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사채업자가 아까와는 달리 토닥이듯 내 볼을 두드렸다.

“새끼야, 잘해. 또 연락 안 받고 도망갈 생각하면 죽을 줄 알아?”

폭력으로써 나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하는지 사채업자는 돌아갔다. 골목에 남은 나는 한숨을 팍 쉬었다.

“하…….”

그나마 봉투만 뺏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혹시 몰라 비상금으로 쓰기 위해 남은 돈 중 60만 원은 지갑에 넣어 놨다.

‘……말 그대로 비상금이 되었네. 이걸로 계좌를 만들어야겠다.’

다음부턴 월급을 그 계좌로 받아야지. 괜히 돈 들고 다니다가 또 끌려가서 처맞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곤 터덜터덜 은행으로 향했다.

* * *

은행에 다녀오자 정호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손을 흔들다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호야! 너, 얼굴이…….”

“아…… 좀 그렇죠? 은행 직원도 깜짝 놀라더라고요.”

“대체 누가 그랬어?”

정호 형은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얼굴에 옅은 자책감이 비쳤다. 어리바리한 나를 그냥 보내서 이 꼴이 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냥 숨김없이 말했다.

“사채업자가 찾아왔더라고요.”

“……하.”

그의 머릿속에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지는지 대강 이해되었다. 물론 그 시나리오 비스무리하게 흘러가기도 했고.

“그래도 그렇지. 사람 얼굴을 어떻게 이렇게…….”

너무 속상해 보여서 당황스러웠다. 한 대만 맞았는데 정호 형 말하는 걸 들으면 완전 무슨 떡 반죽처럼 처맞은 것같이 느껴져서였다.

“한 대밖에 안 맞았는데요, 뭘…….”

“입술도 터졌잖아! 신고하자!”

“아이…… 됐어요. 그러다가 더 해코지하면 어떡해.”

내가 말리니 정호 형도 어쩔 수 없다는 눈치였다.

다음 날이 되었음에도 얼굴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원래라면 신성력으로 금세 고쳐질 상처였지만, 지금 내 신성력은 망가진 신지호의 몸을 고치는 데 모두 쓰고 있었다.

‘얼마나 몸이 망가져 있었던 거야, 얘는…….’

그래서 얼굴까지 고칠 여력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출근을 하니 김건규도 사장도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좀 일이 있었어요.”

사채업자에게 처맞은 것이 자랑은 아니었기에 내가 말을 돌리자 두 사람은 더 묻지 못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하라고 걱정 어린 얼굴을 했기에 나는 고맙다고 답했다.

회사 차량을 타고 던전에 도착했다. 다시 가지고 들어갈 물건을 보충하고 있으니 도지완의 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던 도지완은 내 얼굴을 보고 움직임이 멎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지만 도지완은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네?”

“얼굴.”

그러면서 도지완은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사채업자에게 맞은 부위였다.

사람에게 관심 없는 도지완이 신경 쓸 정도로 내 모습이 처참하긴 처참하구나, 생각하며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조금…… 일이 있었어요.”

도지완은 내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왜 저러나 싶었다.

한참을 서로 바라만 보다가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도지완이었다.

“하…… 던전 공략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면 그냥 이번엔 쉬시죠.”

“예? 아니! 아닙니다……! 그 정도 부상은 아니에요! 차질 없이 일할 수 있어요.”

집에 가라는 도지완의 말에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그렇게 나오니 도지완의 눈썹이 휘어졌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까?”

“예?”

그의 말을 곱씹던 나는 뒤늦게 뜻을 이해했다. 전에 왜 그만두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에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답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도지완의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더 크지만 아니라고 했다가는 그가 나를 돌려보낼까 봐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전 돈이 많이 필요해요.”

도지완은 나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리고 가 버렸다. 끝내 그의 입에서 돌아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같이 지내며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길드원들도 내 얼굴을 보고 걱정 어린 한마디씩을 뱉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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