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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8화 (8/88)

8화

* * *

던전에 들어가고 며칠이 지났다. 신성력이 신지호의 몸을 고치며 얻어터진 얼굴도 조금씩 고쳤는지 이제는 멍과 피딱지가 살짝 남은 정도였다.

공략에 나선 헌터들을 기다리며 우리는 베이스캠프에서 노가리를 깠다.

“이제 통로 하나 남았네. 이번 던전은 되게 작은 거 같아.”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이번 회차에 던전 클리어 될 것 같지?”

“새 던전 잡힐 때까지는 또 쉬겠네, 그럼.”

선배들의 말대로 던전 공략도 거의 막바지였다. 네 개의 통로 중 세 개는 끝까지 공략이 끝났고,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던전 하나가 클리어 되면 삼사일 정도 휴가를 가지는 편이었다. 그동안 뭐 할 거냐면서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통로로 향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쉬고 있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와, 꽤 깊네요?”

“네. 공략이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어요.”

아까 나눴던 대화 내용처럼 아무래도 이번 회차에 클리어가 될 것 같았다.

공략에 걸리적거리지 않게 시체 정리를 하고 돌아온 나는 대충 손을 씻고 도지완의 샤워를 도왔다. 이제 다들 내가 도지완의 시중을 들어도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도지완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친해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신지호도, 천사인 나도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접근을 해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니 마음만 조급해졌다.

‘……그냥 죽일까.’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는 걸까, 나는. 그런데 도지완을 겪어 본바, 사람이 새침데기 같긴 했지만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가 마왕이 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미래의 일은 사라졌다. 그러니 그의 죄도 사라졌다. 죄 없는 이를 죽일 순 없기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더 열심히 해 보는 수밖에.’

오늘 치 공략이 끝나 저녁밥을 먹고 베이스캠프 주위를 걸어 다녔다. 엉망인 몸을 신성력으로 고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움직여 근육을 붙여 주면 더 빨리 나을 테니까. 요사이 잘 먹어서 비쩍 마르고 우울했던 인상이 많이 나아졌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설렁설렁 걷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벽면 쪽에 이상한 게 보였다.

“어?”

뭐지? 언뜻 보였다 사라져서 잘못 본 건가 싶었다. 그런데 또 쓱 하고 사라졌다.

‘이게 뭐지?’

나는 벽면을 더듬어 보았다. 그냥 돌벽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더듬다가 신성력을 눈으로 보냈다. 이렇게 낭비할 신성력은 아니지만 혹시나 여기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면 이걸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회색 돌벽 위로 금색의 선이 촥 펼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와…….”

“여기서 뭐 합니까?”

금색의 선이 무슨 도형을 그리는 와중에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눈에 두른 신성력을 회수했다.

뭔가 잘못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짓누르며 돌아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도지완이었다.

“아, 아니…… 여기 뭐가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 눈에 신성력을 두른 걸 봤을까? 괜히 찔려 더듬더듬 이야기하자 도지완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져 벽면으로 향했다.

“뭐가 있다라.”

그리고 내 옆에 서서 벽면에 손을 얹었다.

“별다른 게 느껴지진 않는데…….”

“음……. 잘못 봤나 봐요. 헤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내 얼굴을 힐끗 내려다본 도지완의 몸에서 갑자기 기세가 피어올랐다. 화를 내는 건가 싶어 깜짝 놀라니 도지완의 손바닥에서 기파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던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앗!”

“무슨 일이야!”

쉬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바깥으로 나왔다. 던전의 이상에 도지완을 찾아 나온 길드원들은 곧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던전이 흔들리며 괴수들을 자극했던지 하나 남은 통로에 남아 있던 괴수들이 뛰쳐나왔다.

“아! 방금 밥 먹었는데!”

“꼭 피를 봐야겠냐!”

투덜거린 길드원들은 무기를 쥐고 괴수들에게 달려들었다.

도지완만이 그곳에 끼지 않고 여전히 벽면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이 닿은 부분부터 금색의 선이 벽면에 그려지고 있었다.

“뭐가 있긴 한…….”

도지완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금색으로 그려진 마법진 속으로 그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도지완!”

내가 그를 부르며 소리를 지르자 괴수를 상대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놀라서 돌아봤다가 빨려 들어가는 도지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길드장님!”

몇몇 길드원들이 달려왔지만 도지완은 이미 허리까지 마법진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덥석 붙잡았다.

하지만 빨려 들어가는 힘이 너무나도 컸다. 도지완의 허리를 붙잡은 나도 함께 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정호 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깜깜한 어둠 속으로 꺼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던전 안이 아니었다.

“어라?”

여기가…… 어디야? 주위를 둘러봤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곳이라고는 내 원룸 근처와 회사, 그리고 던전이 전부였으니까.

“도지완은…… 어디 있지?”

나보다 먼저 들어온 도지완도 보이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일단 걸었다. 목적지는 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는 부촌처럼 보였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은 보이지 않고 전부 담 높은 단독 주택만 있었다. 그때 내 눈앞에 공이 떨어졌다.

통…… 통……. 높은 담을 넘어 떨어진 공은 내 앞에서 몇 번 튀었다. 반사적으로 공을 잡자 근처 주택의 대문이 열리며 어린아이가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헉?”

아이의 얼굴을 보고 놀라자 아이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 아이는 곧 나에게 뛰어와 내 손에 잡힌 공을 빼앗았다. 도망치려는 아이의 뒤를 쫓으며 나는 그를 불렀다.

“자, 자, 자자…… 잠깐!”

“…….”

“도지완!”

아이는 도지완을 그대로 10살로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부르자 도지완을 닮은 아이는 주춤하더니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다급하게 다가가자 깜짝 놀라며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다행히 문이 닫히기 전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 들어온 나를 보며 도지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왜 들어왔냐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뻔뻔하게 도지완의 뒤를 따랐다.

도지완은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오는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긴 했으나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특이한 것은 도지완의 집안사람들이 전부 나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도지완만 나를 볼 수 있는 건가?’

그런데 도지완은 도지완대로 나를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일이 대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쯤 되자 도지완 가족의 식탁이 차려졌다. 6인용 식탁 위에 앉은 사람은 도지완의 부친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도지완의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도지완, 이렇게 넷이었다. 나는 도지완의 옆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모른 척했는데 그래도 내가 자기 옆에 앉으니 신경이 쓰이긴 하는 듯했다.

계속되는 모른 척에 나는 은근히 심통이 났다.

‘이것도 무시하나 보자.’

나는 손을 뻗어 도지완의 반찬을 뺏어 먹었다. 눈앞에서 소시지 반찬을 빼앗긴 도지완이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주위 사람들은 반찬이 허공을 날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래도 내가 하는 행동도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지완도 그 생각을 했는지 나에게 항의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끝났다.

나는 계란말이도 뺏어 먹었고 동그랑땡도 뺏어 먹었다. 솔직히 큰 도지완은 무서웠는데 작은 도지완은 개만만했다.

거듭되는 나의 반찬 스틸에 기분이 상했는지 도지완은 탁, 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부친이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도지완은 아무 말 없이 식탁에서 일어섰다. 나도 남은 도지완의 반찬을 손에 쥐고 이동하는 그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뒤에서 아이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지완은 따라가는 나를 계속해서 모른 척했다.

도지완의 방으로 따라 들어간 나는 손가락에 남은 반찬의 흔적을 쫍쫍 빨았다. 비위가 상했는지 도지완의 이마가 구겨졌지만 나에 대한 질문이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방에서 할 일을 하는 도지완을 방 한편에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한 도지완이 바깥으로 나가자 나도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그런데 이때만은 도지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따라오지 마.”

그렇게 말하며 도지완이 들어간 곳은 욕실이었다. 애 씻는 것까지 구경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얌전히 욕실 앞에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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