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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9화 (9/88)

9화

곧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도지완이 나오자 나는 또 그를 졸졸 쫓아갔고, 침대에 눕는 도지완의 근처에 앉았다.

‘……천사 시절로 돌아온 것 같네.’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몸이 피곤하지 않은 그 시절 말이다. 음식을 뺏어 먹긴 했지만 딱히 배고파서 빼앗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 이거였지.’

계속 어두운 방 안에서 잠든 도지완을 밤새워 관찰하고 있기는 좀 그래서 침대 근처에 기대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 * *

나와 도지완의 이상한 동거는 계속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지완이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밥 먹는 도지완의 반찬을 가끔씩 뺏어 먹으며 그가 가는 길을 졸졸 쫓아다녔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도지완은 나에게 익숙해졌다. 여전히 나를 무시했지만 경계심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은 도련님의 11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장소를 빌려 놨습니다.”

도지완 부친의 부하인 것 같은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도지완의 표정은 평소와 비슷했다. 저만한 나이대의 사람이면 보통 생일이라 하면 설레 하거나 할 텐데 그는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생일 파티 장소로 가니 거기에는 작은 도지완 또래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데면데면한 것이 친한 친구라기보다는 그냥 반 친구들 같았다.

“와, 오늘 재밌겠다!”

“축하해! 지완아!”

생일 파티를 하는 곳은 마치 조금 나이 있는 아이들을 위한 키즈카페 같았다. 게임기와 몸으로 놀 수 있는 시설이 있었고, 한쪽에는 뷔페와 드링크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 눈으로 봐도 괜찮은 시설이었다.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놀 때, 도지완은 테이블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이라고는 어린애들과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있는 부친의 부하들뿐이었다.

나이 차 얼마 안 나는 도지완의 동생도, 부친도, 모친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생일 파티장 안에서 도지완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무표정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다가 일어선 그가 출구로 향했다.

그렇게 생일 당사자가 자리에서 사라짐에도 붙잡거나 아쉬워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도지완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돈이 있는지 걱정되었는데 도지완의 지갑엔 돈 대신 대단한 것이 하나 있었다.

‘와……. 블랙 카드.’

10살짜리 초등학생이 블랙 카드를 들고 다니다니. 결제를 한 택시 기사도 조금 황당해했지만 그의 목적지가 부촌이었기에 이해된다는 얼굴을 했다.

이르게 돌아왔음에도 집에는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익숙하다는 듯 도지완이 방으로 들어가자 방 안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들이 있었다. 생일 선물이라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상자였지만 도지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뭘까.’

상관없는 나만 그냥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나중에 도지완이 대충 뜯어 본 상자 안에는 최신형 게임기와 노트북, 태블릿 같은 비싼 것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도지완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이답지 않게 생일이라는 큰 이벤트를 기뻐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이상했다.

그 태도에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도지완이 밤에 잠들자 마음이 답답해 그의 방을 나왔다. 그러다 1층 안방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다가갔다.

“애가 파티장에서 일찍 돌아왔는데 왜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고? 그게 엄마가 되어서 할 짓이야!”

도지완의 부친이 버럭 외치는 것이 들렸다. 아무래도 낮의 이야기를 부하에게 전해 들은 것 같았다.

문틈으로 훔쳐보자 화장대에 앉아 있던 여자가 팩 고개를 돌리더니 부친을 쏘아보았다.

“그게 내 자식이야? 내 자식이냐고! 당신 자식이잖아! 왜 나한테 떠넘겨!”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도지완의 모친이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이 정실이고…… 도지완 쪽이 첩인 거지?’

흔하진 않지만 뻔한 이야기였다.

도지완의 부친은 정략결혼으로 이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연예계에 데뷔한 도지완의 모친을 보고 반한 부친이 그녀를 애인으로 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지.’

여러 이권이 얽힌 탓에 부인과 이혼할 수는 없었다. 또한 도지완을 임신한 탓에 친모는 연예계 은퇴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친은 그녀를 설득해 도지완을 본부인 아래로 입적시켰다.

문제는 그 뒤에 나타났다.

‘……뒤늦게 동생이 생겼지.’

남편의 불륜으로 태어난 이를 감싸 안으려 노력했으나 뒤늦게 태어난 제 아이에게 도지완은 너무나도 큰 장애물이었다.

적어도 사생아로 남아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제 와 그녀의 아래에 입적한 아이를 없앨 수도 없었다.

결국 본부인은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도지완을 멀리했고, 부친은 그런 본부인에게 엄마면 엄마답게 행동하라고 한 것이다.

‘자기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화려한 생일 파티라든가, 비싼 선물을 주긴 했으나 그게 정말 도지완이 원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제로 안겨 주고 좋아할 거라 여긴 것일까? 아니면 빈자리를 돈으로 채웠으니 도지완도 만족했을 거라 생각했을까? 무표정하게 남의 일을 보듯 생일 파티장에 앉아 있던 도지완이 생각나 입맛이 썼다.

나는 싸우는 두 남녀를 뒤로한 채 다시 도지완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한 도지완이 깨어 있었다.

어둠 속에 앉아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아직 12시가 지나지 않았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축하해.”

무표정한 도지완의 얼굴에 이채가 돌았다. 그와 내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서 정한 규칙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그 규칙을 내가 깨자 도지완은 꽤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생일 이후 우리의 관계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서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스킨십이 늘었다.

……애를 데리고 끈적끈적한 짓을 했다는 게 아니고, 그냥 그저……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어깨에 손을 올린다거나, 포옹해 준다거나? 그런 가볍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스킨십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도지완은 화들짝 놀랐다. 눈빛은 완전 ‘이게 미쳤나?’ 하는 눈빛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슬슬 익숙해져서는 그는 내가 멋대로 하게 두었다. 큰 도지완 때도 느꼈지만 도지완은 은근히 대인배라고 해야 할까……. 뒤끝도 없고 까다롭지도 않고,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하루 이틀 켜켜이 쌓여 갈 때는 몰랐으나 어느새 뒤돌아보니 다시 1년이 지났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렇게 도지완이 12살이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색한 가족끼리 먹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도지완을 부친이 불렀다.

“할 말이 있으니 이따가 서재로 오거라.”

도지완을 신경 쓰는 척만 할 뿐 따로 말을 걸거나 한 적이 없던 부친인지라 나는 좀 놀랐다.

‘따라가도 되나?’

도지완이 막으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도지완은 따라가는 나를 막지 않았다. 결국 부친의 서재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이번에 반에서 1등 했더구나.”

“네.”

“……요새는 어떠니?”

“그냥 지내요.”

서로 할 말이 없는 부자는 메마른 대화를 잠시 나눴다. 곧 부친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2주 뒤에 네 엄마가 한국에 온다는구나.”

나는 조금 깜짝 놀랐다. 엄마라고 하면 지금 방 밖에 있을 법적인 모친 말고 친모를 말하는 걸 텐데…….

‘와, 2년가량 언급도 않길래 난 또 죽었나 했지…….’

살아 있었구나. 깜짝 놀라면서 힐끗 도지완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는 도지완을 보며 어색한 얼굴을 한 부친이 만나 보겠냐고 물었다.

“만나죠.”

“그래…….”

“말씀하실 건 그게 다인가요?”

그게 다라면 가 봐도 되겠냐는 도지완의 물음에 부친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재 밖으로 나오자 도지완의 동생이 둘이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한 얼굴을 했지만 도지완은 평소처럼 무시하고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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