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너! 왜 그래!”
도지완이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투명하게 변하는 손은 붙잡히지 않았다. 도지완의 눈이 커지며 일렁거렸다.
‘내가 꿈에서 깨고 있구나.’
트랩이 실패하여 내가 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지완도 곧 꿈에서 깰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지완에게 내가 말했다.
“형님. 여기는 꿈이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몸이…….”
“꿈에서 깨야 해요. 밖에서 봐요.”
밖에서 보자는 내 말에 허둥지둥하던 도지완의 움직임이 멎었다. 오히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내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밖에서…….”
내 몸처럼 흐려져 가는 시야에 도지완이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말인지 듣기 전에 나는 눈을 떠 버리고 말았다.
* * *
“……사람이!”
“여기! 사람이 있어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던전의 공동 안이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도지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지호야!”
“길드장님!”
사람들이 우리에게 막 뛰어왔다. 그 사이로 정호 형도 보였다.
‘돌아왔구나…….’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울상을 지은 정호 형의 얼굴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은 채 픽 쓰러졌다.
* * *
‘또 꿈인가.’
지완은 눈을 뜨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가끔씩 지나간 과거에 대한 꿈을 꾸는 편이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의미보다는 그때 느낀 것들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무의식이 보여 주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꿈을 꿀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을 하진 못했지만 이것이 이미 지나간 과거인 것만은 알았다.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기에 빨리 지나가기를 빌며 시간을 때우던 그의 눈에 공이 보였다.
대충 튕기고 있다가 공이 담벼락을 넘어 밖으로 나가자 지완은 혀를 찼다. 괜한 짓을 해서 귀찮아져 버렸다.
‘귀찮은데…….’
그냥 나가지 말까. 공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공이 하필이면 동생의 것이었다.
계모와는 달리 자신에게 애정을 비쳤던 이복동생. 아주 예전에는 그것이 적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그게 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사실 지완은 도문그룹을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친모가 들으면 까무러쳤겠지만 말이다.
계모가 그를 동생의 적으로 취급하며 경계할 때마다 저 얼굴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말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로 마음속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도문그룹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은 고3 때의 일이었다.
‘……가져오자.’
어찌 됐든 아무리 담벼락을 노려본다 해도 넘어간 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결국 스스로 가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그렇게 바깥에 나간 지완은 공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보고 당황했다.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은 남자였다.
“헉!”
남자는 지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지완은 평소와 다른 제 꿈에 조금 공포를 느꼈다. 그를 경계하며 공을 빼앗은 지완이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그를 부르면서 따라왔다.
당연히 집 안의 다른 사람들이 남자를 쫓아낼 줄 알았던 지완은 아무도 남자를 보지 못하자 더욱더 경계심만 늘었다.
‘내가 미친 걸까?’
왜 갑자기 내 과거에 없는 사람이 내 꿈에 나타난 거지? 그렇게 지완을 따라온 남자는 뻔뻔스러웠다.
그의 반찬을 갑자기 뺏어 먹질 않나, 그가 씻는 곳에 멋대로 침입하려고 하질 않나.
‘변태인가?’
변태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무언가 떠오르려고 했지만 잘 생각나지가 않았다. 뻔뻔한 남자는 그렇게 지완에게 들러붙었다.
* * *
남자가 지완을 관찰하듯 지완도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묘하게 창백한 안색에 20살쯤 되어 보였다.
‘이 사람을 내가 대체 어디서 봤을까?’
분명 어디서 봤으니 꿈에 등장하는 것일 텐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우울한 인상을 한 남자는 가끔 바보같이 웃을 때가 있었는데, 생김새가 미형은 아니라도 오밀조밀 귀엽게 생겨서 괜찮아 보였다.
첫날을 제외하면 남자는 지완에게 말도 걸지 않고 이상한 수작질도 하지 않았다.
‘반찬은 가끔 뺏어 먹지만.’
이 남자는 대체 뭘까?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씻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도 없었다. 24시간 지완에게 붙어 있는 것이 다였다.
‘역시 귀신인 걸까?’
그렇다면 왜 반찬을 뺏어 먹은 걸까? 지완의 의구심은 점점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가 원한 적 없는 생일 파티를 통보받고 끌려간 자리에는 지완의 반 친구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도, 다 큰 후에도 생일이라는 것 자체에 큰 기대가 없었다. 계모가 그를 학대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는데 이제 와서 가족 놀이 하듯 하하 호호 생일을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튼 적선하듯 열어 준 생일 파티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후 빠져나왔다. 그런 지완을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후령처럼 들러붙은 남자만이 안절부절못하며 파티장과 지완을 돌아볼 뿐이었다.
평소와 같이 보내고 밤에 누웠는데 파티장 이후로 계속 표정이 안 좋던 남자가 일어났다. 이제야 떠나는 건가 싶었는데,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그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지완은 그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말에 담긴 진심을 느껴서였다. 낮에도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이런 파티에 초대해 주어 고맙다.’라는 것이 더 컸으니까.
아무 대가도 없이 순수한 축하는 처음 들어 봤다는 것을 깨달은 지완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
대체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계속 말을 하지 않다가 겨우 뱉은 것이 생일 축하라니. 지완은 남자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남자와 지낸 지 2년쯤 지났다. 이때쯤 그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고 지완이 생각했다.
“2주 뒤에 네 엄마가 한국에 온다는구나.”
서재로 부르기에 역시나 했더니. 생각대로 지완의 친모가 한국에 왔다는 말을 부친이 꺼냈다. 부친이 지완의 친모를 언급하자 남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제야 저 바깥에 있는 여자가 계모라는 것을 알아챈 걸까? 지완은 조금 웃겼지만 참았다.
이게 진짜 과거도 아니고 꿈일 뿐이니 기억을 바꾸고 싶지 않았던 지완은 친모와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가 우울한 얼굴을 했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본인 때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다만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찌르고 장난치는 것은 그냥 놔두었다. 뭐 때문에 우울한진 모르지만 그걸로 해결된다면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말이다.
2주는 금방 지나 친모를 만나는 날이 되었다. 역시나 부친이 있을 때는 세상 가련한 여자가, 둘만 있을 때는 손바닥을 뒤집듯 변하는 것을 보면서 지완은 감탄했다. 몇 번을 봐도 놀라웠으니까.
지완과 남은 친모는 계모를 향한 열등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굉장히 슬퍼했다.
지완을 가지면서 친모는 연예계 생활을 접어야 했다.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 유부남을 꼬신 자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수만 분의 확률을 뚫고 임신을 해 버렸지만 없던 일로 하기 전에 부친에게 들켜 버렸다. 계모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기대할 수 없었던 부친은 지완을 욕심냈고, 지완을 흠결 없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 친모는 연예계에서 잠정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미래에 성장한 지완이 친모와 닮았을 경우를 상정하여 그리한 것이었다.
결국 빛나는 별을 꿈꿨던 여자는 그 자리에 다다르기도 전에 추락했다. 그래도 부친의 사랑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친모에게서 지완을 데려온 후에도 그녀를 보살폈다.
꿈을 잃은 여자는 허영과 사치로 부친이 준 돈을 탕진하다가 돈이 떨어질 때쯤 되면 지완을 찾아와 부친 앞에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지게 된 가여운 여인’ 흉내를 내었다.
그러면 부친이 위로금 조로 쥐여 주는 돈을 가지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 사치를 즐겼다.
아무튼 꿈이 좌절된 이후로 친모는 그녀의 분신인 지완이 도문그룹을 차지하는 것을 두 번째 꿈으로 여겼다.
자신이 꿈을 잃은 만큼 그것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속셈이었다.
“지완아, 다 네 거야. 알지? 네가 장자라고. 네 아빠가 가진 모든 건 다 네 거야. 알겠어?”
희번덕 눈알을 빛내면서 지완의 팔뚝을 붙잡은 친모의 손톱이 옷을 넘어 그의 살 위를 파고들었다.
도문그룹을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때까지 놓지 않을 테니 지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면서 지완을 놓아주는 친모였다.
“그 잘난 회사라도 건져야지. 그래야지……. 내가 이만큼 희생했는데…….”
중얼거리며 소파에 널브러지는 친모를 잠깐 보다가 지완은 2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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