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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14화 (14/88)

14화

이 별장은 몇 년에 한 번 친모와 만날 때마다 이용하던 곳이었기에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용했던 제 방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피곤이 지완을 엄습했다.

‘피곤해.’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지완은 생각했다. 저 여자는 알까? 미래에 지완이 그녀의 바람대로 도문그룹을 장악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후계자위를 굳건하게 하자 제 성공처럼 기뻐하며 친모 흉내를 내려고 한 그녀를 지완이 도박과 알코올 중독 명목으로 요양원에 처박았다는 것도?

이럴 순 없다고 소리 질렀지만 친모의 힘으로는 요양원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매년 그녀의 소식을 보고받았던 지완은 날이 갈수록 독기가 빠져 나중에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던 친모를 생각해 냈다. 요양원에서 사귄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은 왜인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지완의 한쪽 소매를 자꾸 남자가 건드렸다. 찔끔찔끔 건드리는 것이 신경을 건드려 지완이 확 걷자 멍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부친이 없으면 은근히 이런 식으로 꼬집고 그랬던 그녀였기에 지완은 익숙했지만 남자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완이 놀랄 차례였나 보다. 남자의 손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지완의 멍이 사라졌다.

“너…….”

사라진 상처에 깜짝 놀란 지완이 남자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비밀이라는 제스처만 취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과거엔 이삼일은 갔던 멍인데……. 지완이 멍하니 바라보자 남자는 바보같이 웃었다.

그 바보 같은 웃음에 이상하게 지완은 가슴이 간지러웠다.

* * *

그 뒤로 지완은 조그만 상처가 생기면 꼭 남자를 찾았다. 평소의 그라면 그러지 않았을 터였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듯 넘기거나 정 안 되면 병원이라도 갔겠지만…….

‘나한테만 보이는…… 내 것.’

지완은 어느새부턴가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정확히 남자가 그의 무엇인지 모른다. 마데카솔일 수도 있고 배후령일 수도 있고,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생체 난로일 수도 있었다.

지완은 남자에게 제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를 자신 있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날도 생긴 소소한 상처를 내미니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는 얼굴이었지만 반항은 짧으리란 걸 알았다.

깔끔하게 치료된 손가락을 보며 만족해하던 그때, 그의 시간을 방해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의 집에서 그를 찾아올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형.”

지완의 동생이었다. 남자가 보이지 않는 동생은 지완이 남자를 위해 놓아둔 의자에 앉았다. 그 때문에 앉아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기에 지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은 눈치가 있으면서도 없는 척 굴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완의 곁에 있을 수 없을 테니까. 글러 먹은 사람들만 있는 이 집안에서 그나마 동생은 좋은 사람이었으니 그도 웬만해선 동생에게 맞춰 주려 노력했다.

“난……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

도문그룹은 관심 없고 유투버나 되겠다는 동생의 말에 지완은 생각에 잠겼다. 지완도 도문그룹에는 관심 없었으니 부친의 뒤는 대체 누가 잇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내비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때 만약 그가 이 마음을 내비쳤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후회는 하지 않지만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사건이 터졌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뺑소니 사건이었다. 과거에 들었고 매년 꿈을 꿀 때마다 계모에게 듣는 말이었다.

과거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꿈으로 꿀 때는 또 느낌이 달랐다.

실제로 지완은 이 일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꿈이었기에 바꾼다고 해도 현실에 변화는 없었다.

‘괜히 현실과 다른 꿈이 되어도 문제지.’

꿈과 현실의 괴리에 비참해질 뿐이니까. 꿈속의 동생을 살려 봤자 현실의 동생이 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계모의 패악을 참아 내고 나가려던 지완의 눈에 남자가 동생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설마?’

지완은 갑자기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남자가 어두운 얼굴로 돌아오자 짓눌리는 느낌이 조금 가셨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지완이 남자에게 물었다.

“네 능력으로 깨울 순 없어?”

그 말에 남자가 도리질했다. 그제야 지완의 마음속에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자신을 좋아해 준 동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남자가 치료하는 것이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

‘온전한…… 내 것.’

자신 말고는 아무도 치료하지 못하고 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치졸한 걸 알기에 지완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 *

악에 받친 계모는 곧 거대한 똥을 쌌다. 지완의 출생의 비밀을 터트린 것이다.

금쪽같은 제 아이도 잃었겠다, 모두 같이 망해 보자는 심산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큰 기대 없었던 지완에게도 이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보다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바뀐 것이 없는데 모두가 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질시에 차거나 선망에 찼던 눈빛들이 모두 싸늘하게 변해서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보는 눈으로 지완을 대했다.

그나마 남자만은 변함이 없었다. 지완은 그게 다행이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이 꿈속의 남자는 지완이 인간을 미워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마지막 선일지도 몰랐다. 남자만 바뀌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함이 사라졌다.

‘과거에는 이걸 어떻게 견뎠지?’

그냥 버텼던 것 같다.

그러나 욕을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가끔 초조함이 올라오긴 했다.

그래도 욕설은 참을 만했다. 지완은 누가 떠들든 무시할 수 있었으나 폭력은 아니었다.

사생아라는 그의 치부가 공개된다 하더라도 지완은 여전히 도지완이었고, 도문그룹의 자제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웃기게도 그의 앞에 사생아라는 단어가 붙으면 마치 그 타이틀들이 떨어지는 줄 알고 있었다. 첩의 자식일 뿐이지 혈연인 것은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내가 사생아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어?”

폭력을 쓰려고 하는 멍청이를 보며 남자가 겁을 먹자 도지완은 참지 못했다. 그의 겁은 도지완이 다칠까 봐 나온 것이었다.

그의 걱정이 유쾌하면서도 타인 때문에 남자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도지완은 쏘아붙였다.

그제야 놈들의 착각이 박살 났고 자신들이 쌓아 온 업보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흘러가는 과거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는 또다시 느꼈다.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멍청하긴.’

다른 이 때문에 남자가 겁을 먹은 게 화가 났다. 그 얼굴은 그냥 항상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게 있으면 그만이었다. 다시는 그런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지완과 지완의 것을 지키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던 도문그룹을 손에 쥐기로 했다.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

얼마 안 가 계모와 부친은 이혼했다. 동생을 데리고 떠나는 계모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사실 지완은 계모를 미워하지 않았다. 계모는 그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었으니까. 용서할 정도의 감정도 존재치 않았다.

여전히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또래들은 그의 기운에 눌렸지만 부친 대의 어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장차 도지완이 넘어야 하는 큰 산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에게 그가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었고, 도지완이 가진 힘은 그들의 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니까.

무언가 남다른 성적이 필요할 때, 도지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세상이 격변한 것이다.

몸에 흐르는 힘을 느끼며 지완은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가 쓰는 능력도 이것일까? 그렇다면 남자는 왜 격변 이전부터 능력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지완은 궁금해하면서도 묻기 두려웠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10년이란 시간 동안 지완은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이름이 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왜 자신 곁에 있는지……. 알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려웠다.

‘그 성격에 말할 수 있는 거면 이미 말했겠지.’

사소한 일로도 그에게 말을 걸던 남자였으니까. 그가 말하지 않는 이유가 혹시, 자신이 무언가를 알게 되면 사라지기 때문인 건 아닐까.

그렇기에 지완은 궁금함을 마음속 깊이 숨겼다. 가끔씩 충동적으로 튀어 오르긴 했지만 그의 인내력으로 누를 수 있었다.

아무튼 지완은 사람들을 모았다. 기회가 왔으니 이걸 잡아채지 않으면 바보였다.

지금 와서 그가 공부라든가, 사업이라든가 그런 걸로 두각을 나타내긴 어려웠으니 다른 사람들이 몸을 사릴 때 그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간 던전에서 벌어진 첫 살해에 지완의 부동심이 흔들렸다.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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