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내가 칼을 꺼냈으니 도지완이 해야 할 것은 둘 중 하나였다. 맞서 싸우느냐, 항복하느냐.
그렇게 침묵하던 도지완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지호야……. 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호 형이 들어왔다.
‘지’를 뱉을 때는 방실거리던 정호 형의 얼굴이 끝으로 갈수록 우중충하게 변했다. ‘아’라고 말할 때는 핼쑥하고 안색이 어두워 그가 병실로 들어오며 급격하게 늙어 가는 저주에 걸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가 너무 걱정되어 벌떡 일어났다. 저주에 걸린 거라면 내 신성력으로 풀어 줘야겠다 생각하며 정호 형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그가 변한 것일까? 이유라면 이 병실에 있을 텐데. 나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도지완 탓도 아닐 터였다.
그야 도지완은 아주 까다롭지는 않은 윗사람이었고, 정호 형도 그가 어렵긴 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으니까.
“형?”
대체 왜 이러나 싶어 그를 바라보며 부르자 정호 형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길드장님…… 계시네……?”
“어? 어…… 그렇지.”
“그렇구나……. 이거…… 너 생각나서 사 왔어.”
정호 형이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나에게 넘겼다. 그 안에는 주전부리할 과자나 껌은 물론이고,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들어 있었다.
“와……!”
“……근데 정말 이걸로 돼? 근처에 전문점 있던데 거기 거로 먹지.”
“난 이게 좋아.”
그러면서 내가 봉투에서 꺼낸 것은 편의점에서 파는 레토르트 닭죽이었다. 밥공기 모양의 용기에 담겨 전자레인지에 땡 돌려서 먹는 그 제품 말이다.
내가 웃으며 그걸 꺼내자 정호 형은 피식 웃다가 갑자기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뭐 때문에 그러나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그의 시선이 내 등 뒤로 가 있었다.
“뭔데 그래?”
하지만 내가 뒤를 돌았을 땐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도지완이 사무용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다시 정호 형을 돌아보니 그의 어두웠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 나…… 가 볼게.”
“어? 벌써?”
“미안해!”
그러면서 정호 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나가 버렸다. 뭔가 급한 일이 있었나 싶었다.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가 식탁을 꺼냈다. 병실 안에 전자레인지가 있었기에 나갈 필요 없이 병실에서 조리가 가능했다.
용기에 쓰여 있는 시간으로 맞춰 돌리자 곧 병실 안에 고소하면서도 인스턴트 느낌이 나는 냄새가 퍼졌다.
땡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전자레인지 문을 연 나는 뜨끈뜨끈한 김이 나는 죽을 꺼내 내 침대로 갔다.
반으로 접혀 동봉된 작은 스푼을 펴 뜨거운 죽을 휘휘 젓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 시선의 주인은 도지완이었다.
‘아차.’
닭죽에 정신이 팔려 그와 대화 중이었다는걸 깜빡 잊었다. 그래서 그런가. 도지완의 표정이 정말 정말 정말 좋지 않았다.
그 표정에서 배신감이 엿보인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그게 맛있나?”
“에?”
“맛있냐고.”
그렇게 묻는 도지완의 얼굴이 정말로 흉악했다. 거의 부모의 원수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물론 도지완은 그의 부모가 죽는다고 해도 눈 깜짝 안 하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표정을 보니 도지완은 인스턴트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예…….”
맛있으니까 먹죠? 당연한 거 아닌가? 무슨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맛없는 걸 일부러 찾아 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지완의 표정이 더욱더 흉악해졌다.
“……보다?”
“네?”
“병원 밥보다…… 맛있냐고.”
도지완이 이를 꽉 물고 말하는 바람에 말이 거의 짓씹혀 나왔다. 반쯤은 못 들었지만 나는 비상한 눈치로 그의 질문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당당히 말했다.
“네.”
레토르트 죽과 병원 밥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맛있는 건 병원 밥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병실의 밥은 일반 병원식과 달랐으니까.
다만 이 닭죽은 내가 처음 인간계에 내려와 신지호의 몸으로 맛본 음식이었다. 마시듯 삼켜 바짝 마른 식도와 위장에 단물처럼 스며든 닭죽의 맛은 아무래도 내가 다시 천계로 돌아간다 해도 잊지 못할 맛이었다.
그때와 같은 천상의 맛은 느낄 수 없다지만 사람은 추억하는 동물이라서일까? 간간이 이 맛이 그리웠다. 이 병원 매점에는 오가닉 같은 제품만 있고 레토르트 제품이 없어 아쉬웠는데 딱 알맞게 정호 형이 사다 주었다.
‘……아. 이 애매해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양도 좋단 말이지.’
작은 스푼으로도 몇 숟갈 안 되는 양을 아쉽게 바라보면서 흡입하고 있을 때였다. 꾸드드득.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
무슨 소리인가, 두리번거리던 나는 도지완의 손아귀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을 보았다.
아무리 마왕 후보라도 도지완의 피가 검은색일 리는 없으므로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런 그의 손안에서 기이한 각도로 우그러진 만년필을 보고 그 검은 물이 잉크였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저기, 길드장님……?”
“길드장?”
다시 도지완의 눈에서 빛이 번쩍번쩍 터져 나왔다. 분명 살인 파괴 광선이 아닌데 나는 이상하게 오체분시 되는 환각이 보였다.
“내가 왜 길드장입니까?”
“예?”
“신지호 씨, 도문 길드원입니까?”
번쩍번쩍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묻는 도지완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치사하지만 나는 도문 길드원이 아니고, 그저 하청 업체의 직원이었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던 나는 서러워졌다. 내내 반말하던 그가 존댓말을 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제가 길드원은 아니지만…….”
“…….”
“제가 길드원이 아니라고 길드장님이 도문 길드 길드장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
도지완은 당돌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가 그리 썩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번쩍번쩍 빛나던 눈알이 차분하게 변해 더 이상 빛이 번쩍거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 말이 맞지.”
“…….”
“그래서, 신지호가 퇴원하고 싶은 게 저 새…… 람 때문인가?”
중간에 이상한 단어가 있었던 거 같은데 도지완의 얼굴이 태연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일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퇴원하고 싶은 것은 임무 때문이지, 정호 형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내 대답에 도지완의 반응이 이상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썹만 까딱였다.
잠시 침묵하던 도지완은 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랑 무슨 관계지?”
“정호 형요?”
“그래. ……가족인가? 정호, 지호. 이름이 비슷하군. 돌림자라든가…….”
“아닌데요? 정호 형은 이 씨예요.”
나는 신 씨였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이 될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그건가 싶어 순순히 말해 줬건만 도지완의 표정이 흉악해졌다.
왜 화를 내는지 인간계 상식이 적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가족이 아니다……. 근데 형이라고?”
“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는 건 상식 아닌가? 나는 도지완이 대체 왜 이러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이러나 싶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도지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허! 하!’ 같은 짧은 웃음뿐이었다.
정호 형이 내 가족이 아니라서 기분 나쁠 리가 없으니 저것은 즐거워서 내뱉는 웃음일 텐데 그가 즐거울 일이 뭐가 있나 아리송했다.
“형이라고.”
“……네.”
“나는 길드장인데 저 사람은 형이라고?”
그제야 나는 그가 ‘허, 하’ 웃던 게 기분 나빠서였음을 깨달았다. 인간계란 정말 어렵구나. 무슨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한담? 천계였으면 서운한 거 서로 주고받고 이미 집에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도지완은 또다시 말했다.
“내가 길드장인데, 이정호 씨는 형이라…….”
‘차별하는 거냐?’ 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상식상 직장의 상사를 형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지 않나? 하청이긴 해도 나는 도지완의 부하였다. 그런 그에게 형이라고 말해도 되나 싶어 아리송했다.
“그게…… 길드장님은 제 상사잖아요?”
이쯤 말하면 알아듣지 않을까 했지만 도지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더 말해 보라는 듯해서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상사를 형이라고 부를 수는…….”
상사마다 다른가? 가족 같은 회사가 있다고 하던데 거기선 형, 누나, 엄마, 아빠 이렇게 부르나? 인간계 생활 반년도 안 된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신지호도 알바나 했지 어디 취직하고 그런 적은 없어 그에 대한 상식이 없었다.
정호 형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물어라도 볼 텐데 정호 형은 이미 가고 없었다.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알 수 없었던 나는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하, 하지만…….”
“…….”
“길드장님은 정호 형보다 높은 사람이잖아요.”
정호 형보다 상사라서 형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내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도지완을 형이라 부르면 정호 형과 도지완이 동급이 되지 않나? 나로선 진지하게 말했건만 도지완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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