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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19화 (19/88)

19화

나는 그의 웃음에 조금 빈정이 상했다.

개 같은 놈.

속으로 욕을 뱉어 낼 때 그가 들을수 없는걸 알면서도 도지완이 나를 바라봐 나는 조금 찔렸다.

“내가 이정호 씨보다 직급이 높아 형이라 부를 수 없다라…….”

“…….”

“그럼 님을 붙이면 되잖아.”

“예?”

“님을 붙여 높여 부르면 해결되는군.”

어서 해 보라는 듯이 까딱거리며 턱짓을 하는 도지완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호칭이 뭐길래 저 도지완이 저렇게 집착하고 애태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당함에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도지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눈으로 빔을 쏘기 전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형……님.”

“흠…….”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에 도지완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결국 나는 퇴원을 했다. 도지완은 정말 미쳤는지 앞으로 호칭 틀리지 말라고 말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다음 날 퇴원시켜 준 것이다.

‘뭐…… 잘된 건가?’

임무를 위해서는 도지완과 가까워져야 했으니 호칭이 변한 것은 좋은 징조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퇴원한 나는 회사에 전화부터 했다. 퇴원 소식을 사장님께 알리니 그러냐며 언제부터 다시 나오라 말을 하였다.

내 몸 상태에 대한 안부는 묻지 않았지만 서운하진 않았다. 그도 나도 내가 나이롱환자였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퇴원하고 나서 나흘 뒤 나는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옆집 사는 정호 형 빼고는 다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호 왔어?”

“오랜만에 본다.”

“몸은 괜찮아?”

살짝살짝 건드리며 나를 확인해 보는 동료들이었다. 그야 그들의 기억 속에는 기절한 내가 실려 가는 것이 가장 최근의 모습이었을 테니.

나는 괜찮다고 답해 주고 던전으로 가기 전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헐? 정말요? 그럼 여태까지 다른 팀으로 차출되었던 거예요? 다?”

“그렇지. 우리는 길드장 공대 어시니까. 길드장이 던전을 안 가면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었는데 잘됐지 뭐야.”

“으음…….”

뭔가 좀 이상했다. 내가 누누이 들어온 도지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하청을 챙길 정도로 세심하고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설마……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걸까?’

그런데 마왕의 씨앗이 발아하면서 변한 것일까? 천사였을 때 들어온 도지완과 인간이 되어 겪고 듣게 된 도지완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찜찜함을 남긴 상태로 나는 회사 차에 올라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도지완의 길드원들이었다. 평소에는 던전 입장 전까지 느지막이 오던 사람들이 오늘따라 일찍 도착해 있었다.

“어라? 일찍 오셨네요?”

우리 팀장님이 그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을 걸었다. 도지완이 어시 팀에 담백한 만큼 길드원들도 담백한 편이었다.

딱히 갑질을 하거나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말을 걸어오는 팀장에게 길드원은 웃어 보이며 대답해 주었다.

“네, 오랜만에 들어가는 던전이라 다들 좀이 쑤셨나 봐요.”

“아하, 그러시군요.”

“어쩌다 보니 긴 휴가가 생겼는데 아무도 여행 같은 거 가지 않고 대기 타고 있다가 길드장님이 부르니까 다들 쌩하고 달려왔잖아요. 어시 팀은 다른 공대로 차출 갔었죠?”

“예. 그렇죠.”

팀장님과 길드원이 두런두런 대화 나누는 걸 지켜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번 함정이 있었던 던전은 내가 기절한 사이에 다 공략이 끝난 관계로 우리가 온 곳은 새 던전이었다.

나는 이곳저곳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한편에 놓인 던전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보고서 내용은 던전의 크기나 식생 등을 선발대가 조사하여 적어 놓은 것이었다.

던전으로 오기 전 회사에서 브리핑을 듣긴 했지만 심심했기에 나는 보고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힉!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깜짝 놀랐다. 오른편 어깨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에 입술이 부딪혔다.

그것이 도지완의 볼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죄, 죄송……!”

나는 펄쩍 뛰면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엉겁결에 나의 뽀뽀를 받게 된 도지완은 입술이 닿았던 볼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그와 뒤엉켜 주니어를 세웠던 기억이 나 나는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또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겨우 거리가 좁혀졌나 싶었는데 입술을 비비는 바람에 망한 듯싶었다.

‘……아니지? 내가 입술을 들이댄 게 아니고 쟤가 나한테 얼굴을 들이민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열이 받았다. 또 이걸로 변태니 뭐니 하면 그냥 암살해 버리고 천계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노려보던 나는 아리송해졌다.

그의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호불호가 보이지 않는 그 오묘한 표정은 인간계 생활 몇 개월 차인 내가 속뜻을 알아채기엔 너무나도 난도가 높았다.

한참을 서로 바라보며 침묵하던 우리의 정적을 깬 것은 도지완이었다.

“깜찍하게 구는군.”

“예?”

제가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교라도 부린 것일까? 나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지만 내 어디에서 깜찍함을 느낀 건지 도지완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당황에 빠진 나를 보며 도지완은 짙게 미소 지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술이 마치 비웃음처럼 보이는 그 미소 말이다.

그와 지내며 몇 번 봤었던, 도지완이 정말로 즐거울 때 내는 미소였다. 다만 그가 즐거울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어디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저러나 의아했다.

‘내가 당황하는 게 즐거운 건가?’

도지완이 그 정도로 인성이 파탄 나지는 않았는데…… 내가 잘못 안 것일까? 아무튼 그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 보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기껏 쌓아 놓은 관계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면 그 끝은 암살밖에 남지 않으니 말이다.

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내가 내려온 만큼 암살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도지완이 다가왔다.

“잘 지냈나?”

“예? 아…… 네. 잘 지냈죠?”

못 지낼 이유가 있나? 아직도 퇴원한 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일까? 그 예상이 맞았는지 잘 지냈다는 내 말에 도지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잘 지냈다라…….”

‘아, 또 왜이래…….’

또 뭔데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싶어 떨떠름해진 내 귀에 도지완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퇴원하고 나서 한 번도 나를 보지 않았는데 잘 지냈다, 이 말이군.”

중얼거린 도지완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좀 있으면 빔을 쏠 것같이 변하기에 당황하는 나를 쏘아보던 도지완은 쌀쌀맞은 표정이 되더니 홱 돌아섰다.

널뛰기하는 도지완의 기분 변화에 나는 그저 황당할 수밖에 없어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 * *

지완은 지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입원이 왜 싫지?’

지완이 그를 입원시킨 이유는 겉으론 그의 건강이 걱정되어서였지만 그가 실제로 노린 것은 지호에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맛보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지호가 입원한 도문그룹 산하 병원의 VIP 병실은 이름만 병실일 뿐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매 끼니 셰프가 만들어다 바치는 음식이며, 유료 케이블 채널이나 게임기 등 갖은 유희거리들이 병실 안에 가득했던 것이다.

원래 VIP 병실 이용 층은 나이가 지긋한 회장님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게임기나 다른 유희거리들은 지완이 사다 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20대 초반 남자라면 껌뻑 죽을 것이라는 추천을 받아 채워 놓은 것인데 이상하게도 지호는 그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천사인 신지호가 게임이라는 문물을 접해 본 적이 없어 게임기 자체가 그에겐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상태였기 때문이었지만 지완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지완이 시범이라도 보였으면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도 게임을 즐겨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지호에게 게임기란 그저 용도를 모르는 기계 1이었다.

지완은 답답했다. 지호는 계속 퇴원을 바라는데 솔직히 말해 불안해서 퇴원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집에 데려다 놓을 수도 없고.’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지완은 대체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던전이 보여 준 꿈속에서 지호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아차 싶었다. 지호를 옆에 둘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던 탓이다.

그나마 지호가 돈을 원하는 건 다행이었다. 그래서 병실에서부터 호사스러운 생활을 맛보게 해 점점 더 깊은 호사를 누리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게 간단하고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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