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흠…….”
뭐든 명하는 대로 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올려다보는 사채업자의 얼굴을 지완이 샅샅이 훑었다.
“평소처럼 수금을 하되, 절대 신지호에게 손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예?”
사채업자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대체 지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고용하는 건…… 계속 신지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의문이 들었지만 사채업자는 곧 의문을 접었다. 자신은 머리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걸 원해서 도지완이 자신을 쓰는 것이 아니니 의문을 뱉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뿐.’
사채업자가 알겠다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지완이 덧붙였다.
“손댄다는 의미는 폭력도, 다른 의미도 전부 포함입니다.”
그가 말하는 다른 의미란 것이 굉장히 두루뭉술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순 있었다. 사채업자는 지호가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 한 방울도 갈기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말을 들어 보니 사채업자는 자신이 지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손대지 말라는 것을 보면 신지호를 위하는 것 같은데…….’
자신을 고용하는 것을 보면 괴롭히려는 것 같기도 하고. 명령에 의문을 가지거나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채업자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신지호를 어떻게 대하길 원하십니까?”
모를 때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괜히 머리 쓰다가 정반대의 상황이 나와 버리면 기껏 잡은 이 황금 줄이 그대로 썩은 줄이 되어 버릴 테니까.
혹시라도 건방지다며 지완이 화낼까 긴장하면서 사채업자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채업자의 생각처럼 지완이 화내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늠하듯 사채업자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평소대로 하십시오. 당신 뒤에 내가 있다는 것을 모르도록.”
다만 말한 대로 절대 지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난해한 명령은 아니었기에 사채업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듯싶었는데 지완은 곧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했다.
“신지호가 때리고 싶다 하면 한 대는 맞아 주시죠.”
“한, 한 대요?”
지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자신이 이 얼굴을 뭉갤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여기서 그의 얼굴을 햄버그처럼 뭉개 버린다고 해도 지호는 그의 수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럼 보복을 해야 하는 대상자는 내가 아니지.’
신지호. 그가 직접 해야만 했다. 원한을 갚을 기회를 준 지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지완이 지호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나서 오랜만에 던전 공략을 하게 되었다.
빨리 지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빡빡하게 일정을 잡았음에도 공대원들과 어시 회사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잡아 둔 일정에 동의했다.
그렇게 지호와 재회할 것을 기대하며 지완은 던전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던전 입장 전쯤 느지막이 도착했겠지만 오늘은 누구보다도 빨리 왔다.
평소에는 어시스트 팀이 먼저 오는데 그들보다 더 빨리 왔을 정도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호 때문에 조금 마음이 상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오늘따라 일찍 던전으로 오는 길드원들을 보았다.
‘음.’
지완은 그들을 피해 몸을 숨겼다. 딱히 그들이 싫은 건 아니었으나 번거롭기는 했기 때문이다.
지완이 숨고 나서 조금 뒤 길드원들이 지완의 차를 보고 다가왔다.
“어? 길드장님 차다.”
“그런데…… 안에 안 계시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지완을 찾는 듯하였다. 길드원들은 이상하게도 지완이 사무적으로 대함에도 그를 좋아했다.
“아, 하루하루가 1년 같았어.”
“웃겨. 무슨 1년씩이나…….”
“그렇지만 난 길드장님이랑 공략 가는 게 제일 재미있단 말이야. 넌 안 그래?”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나는 다시 공략한다니까 바로 뛰어왔잖아. 긴 휴가라고 여행 안 간 내가 승리자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사라지는 길드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 지완은 계속 숨은 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어시 팀의 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호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를 찾지도 않고, 동료들과 대화하는 지호의 모습을 보고 조금 서운했다.
지호로서는 당연히 지완이 평소와 같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던 지호가 사람들에게 멀어져 구석으로 가자 몰래 그 뒤를 따랐다. D급이라서 그런가 지호는 지완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언제 자신을 알아차릴까 기다리던 지완은 뚱한 얼굴이 되었다. 지호가 보고서 같은 거나 뒤적거리느라 자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조금 심술을 부렸다. 가까이 다가가 지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함정에 빠지기 전, 28세의 도지완이었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장난이었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 어릴 때로 돌아가 줄곧 지호와 함께 지냈던 지완의 친밀감은 거의 소꿉친구와 동급이었다. 절친에게나 할 만한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지완의 볼에 말랑하고 촉촉한 것이 닿았다.
‘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던 지호가 실수로 지완의 볼에 입술을 대었던 것이다.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실수로 이뤄진 볼 뽀뽀일 뿐인데 지완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볼을 부여잡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지호가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 엄청나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그게 너무 귀여워 보였다.
“깜찍하게 구는군.”
“예?”
지완은 자신이 웃는지도 모르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그쳤으며 둥실거리던 그의 기분도 함께 진창에 처박혔다.
“아…… 네. 잘 지냈죠?”
퇴원하고 그를 만나지 못한 기간 동안 지호는 잘 지냈다고 말했다. 그게 거짓말 같지 않아 더 화났다.
트랩 안에서의 지호는 항상 자신과 붙어 있으려 했기에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그럴 거라 착각한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지호의 대답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당황이 더욱 컸기에 지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지호가 자신과 같았으리라 착각했던 것이 조금 수치스러웠다.
‘어째설까…….’
함정에서 빠져나온 후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꿈과 현실이라는 장소뿐이고 두 사람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까? 지완은 눈을 감았다.
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얄밉고 성가시게 굴다가 그의 상황을 알게 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지완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 동정 어린 시선이 화가 나고 싫었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모습에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곳을 나오자마자 변해 버린 지호의 태도에 배신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
지완은 실소했다. 이래서 타인에게 기대감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언제부터 타인을 믿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라 오면서 누누이 그것을 봤으면서도 잠깐 잘해 준 것에 넘어가 곁을 내어 주다니.
지완은 꼭꼭 감춰 두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드러나자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 같기도 했고, 슬픔 같기도 했다.
* * *
도지완이 이상했다. 아니, 그가 이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긴 하지만…….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거리감이 좁혀졌다고 생각했는데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다 보니 1차 공략이 마무리되었다. 아차 싶어 던전에서 나가며 그에게 말을 걸어 볼까 했는데 도지완은 던전을 나가자마자 차를 타고 쌩하니 가 버렸다.
“뭐야, 진짜…….”
아무리 무던한 나라도 서운해질 만큼 차가운 태도라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에 심기가 상해 저러나…….
이미 가 버린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던 나는 회사 차를 타고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휴식을 받고 집에 도착한 나는 무료함을 느끼며 뒹굴뒹굴하다가 띵동 울리는 알림음에 문자를 확인하고선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좀 보자.]
사채업자였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입원 때문에 한 달이 지나서 빚을 갚을 때가 된 것이다.
“아이 씨…….”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지만 빚을 진 입장에서 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답장을 보내니 그가 몇 시까지 근처로 온다기에 알았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 장소로 내려가니 이미 그는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온 것이지만 사채업자보다 늦은 건 늦은 것이었기에 그가 한소리 할 것이라 여겨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번처럼 뺨이라도 맞는 건 아닌가 싶어 주춤거리면서 다가가는데 사채업자가 나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 왔어?”
‘어엉?’
이상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그는 별로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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