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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23화 (23/88)

23화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자 도지완은 눈썹을 삐뚜름하게 세운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막아서긴 했으나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러워 알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비켜 주시죠.”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도지완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가 버리는 그를 나는 결국 잡지 못했다.

“……아.”

대체 어디서부터 비뚤어진 건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너무 답답했다.

그 뒤로도 도지완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여전히 철벽이었고, 나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도지완에게 온통 정신이 팔린 나는 결국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던전의 벽을 짚는 바람에 함정이 작동해 버린 것이다.

원래라면 스카우터들이 함정을 해제해야 하는데 트리거인 벽을 건드려야만 발동하는 함정이라 해제하지 않고 놔뒀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내가 도지완을 어떻게 구슬릴까 고민하다가 발이 꼬이는 바람에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차!’

벽을 짚자 바닥이 푹 꺼지면서 구덩이 바닥에 박혀 있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보였다. 한두 개가 꽂혀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요령 좋게 피할 수도 없었다.

“지호야!”

떨어지는 나를 보고 정호 형이 비명 같은 목소리로 불렀다. 바닥이 꺼져 공중에 떠 버린 나는 아픔을 예감하며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켁!”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어 함정 바깥으로 던진 것이다. 덕분에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뒷덜미를 잡혀 숨통이 조여졌었기에 잔기침을 하면서 나를 던진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도지완이었다.

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넘어져 있는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일을 이따위로 할 거면 그만둬!”

“죄, 죄송…….”

나는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도지완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내 멱살을 놔 버렸다. 다시 나동그라졌지만 도지완은 쌀쌀맞게 등을 돌려 가 버렸다.

그제야 동료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지호야! 다친 덴 없어?”

“괜찮아?”

“네……. 죄송해요.”

걱정 어린 얼굴을 하는 동료들에게 사과하자 그들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네가 가장 놀랐을 텐데……. 그래도 조심하지 그랬어. 스프레이 뿌린 벽은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몇 번씩이나 길드원들이 이야기했는데.”

“그래도 길드장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네. 무슨 번개처럼 날아와서는 얘를 확 던지더라. 진짜 멋있었음.”

동료들이 두런두런 떠들었다. 그러더니 많이 놀랐을 테니 돌아가서 잠시 쉬라고 나를 배려해 주었다.

솔직히 많이 놀란 건 사실이라 진이 빠져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배려를 거절치 않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도지완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구기더니 팩하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뒤로도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도지완은 여전히 나를 무시했기에 기회가 없었다. 저번처럼 샤워할 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입을 열려고 하면 샤워를 그만두고 나가 버리려고 하기에 나는 결국 2차 공략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다음엔 꼭 사과해야지.’

그리고 고맙다고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도지완이 회사에 클레임을 넣어 자기 어시 팀에서 나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 * *

휴식을 취하고 출근했다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저, 저를 뺀다고요?”

“응……. 그렇게 됐다.”

사장님이 미안한 듯 내 눈치를 보았다. 출근하자마자 나를 부른 사장님은 도지완이 회사에 클레임을 넣어 나를 자기 어시 팀에서 제외했다는 말을 해 주었다.

“해고하라는 말은 아니라고……. 다른 팀으로 보내도 되니까 자기 팀에서는 빼 달래.”

“예? 왜요?”

실수 한 번 했다고 팀에서 잘라 버리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경우는 사장님도 처음이었는지 그저 한숨만 뱉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지. 이쪽이 을이고 저쪽이 갑이잖니.”

“…….”

“다른 팀으로 바뀐다고 해서 페이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싫어요!”

페이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목표는 돈이 아니고 도지완이었으니까.

나는 무조건 이 팀에 있겠다고 우겼고 사장님은 난처한 얼굴로 한숨만 쉬었다.

“저쪽이 거부하는데 어떻게 그래.”

“…….”

“에이, 그러지 말고.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깐?”

사장님이 나를 살살 달랬지만 나는 꿈쩍도 안 했다. 완고하게 구는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는 사장님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장님 선에서 할 수 없으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지.

그래. 도지완을 만나야겠다.

* * *

“길드장님 좀 보게 해 주세요!”

“아니, 그러니까…… 약속을 잡으신 것이 아니면 힘드시다니까요?”

나는 던전 공략 휴일에 맞춰 도문 길드로 쳐들어갔다. 무조건 길드장을 만나게 해 달라는 나의 말에 로비에 있는 경비원이 난감한 얼굴로 거절만 했다.

사실은 던전 쪽으로 가 보려고 했지만 항상 회사 차로 가는 바람에 나는 던전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또한 회사 차에 몰래 타려고 하다가 걸려서 사장님께 크게 혼났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다른 팀으로 옮기라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사장님이 가슴을 치며 말했지만 내가 계속 요지부동으로 굴자 사장님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 나는 모른다. 네가 알아서 해라.〉

만약 클레임이 들어오면 이미 잘린 놈이라고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 사장님에게 나는 꾸벅 인사하고 나왔다. 그 후에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이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또 며칠 뒤에 봐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로비에 드러누웠다. 내가 드러눕자 경비원이 이런 진상 오브 진상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진저리 쳤다.

그때였다.

“어? 어시……?”

“어? 안녕하세요?”

“어! 맞죠? 어시 팀! 여기서 뭐 해요?”

낯이 익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길드장 공대에 속해 있는 길드원이었다. 왜 여기 드러누워 있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바로 매달렸다.

“길드장님 좀 뵙고 싶어요!”

“엥? 길드장님은 왜요?”

“진짜 진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나는 정말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나를 자르지 말라는 말이니 중요한 말은 맞았기에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다.

길드원은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자기가 이 일에 껴도 될까, 하는 고민 같았다.

“흠……. 잠시만요.”

고민을 끝냈는지 길드원은 내 손을 떼어 놓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길드원의 말대로 나는 잠시 기다렸다. 내가 더 이상 떼쓰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경비원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1분이 1시간 같은 기분을 맛보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경비원이 귀에 단 무선 무전기로 무언가 신호를 받더니 나를 일으켜 주었다.

“길드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나에게 목걸이가 달린 게스트 카드를 넘겨주면서 45층으로 가라고 말했다.

“3번 엘리베이터를 타시면 되고요. 버튼 근처 패널에 카드를 대야 작동합니다. 45층 외에 다른 층은 허락되지 않은 카드니까 45층으로 바로 가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경비원의 설명을 듣고 나는 바로 그가 말한 대로 3번 엘리베이터를 탔다. 45층으로 올라가며 나는 어떻게 도지완의 마음을 돌려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다.

‘진짜 어렵다.’

도지완만큼 어려운 상대가 또 있을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가 곧 45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로비의 모습이었다.

‘위에도 로비가 있네?’ 하면서 놀라고 있는 나에게 한편에 대기 중이던 직원이 말을 걸었다.

“신지호 님 맞으십니까?”

“에? 예……!”

“길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45층 로비에 마련된 문은 단 하나였다. 그곳이 도지완의 사무실일 터였다. 이상하게 긴장되어 축축해진 손바닥을 옷에 대강 문지르고 있는데 직원이 문을 열었다.

넓은 사무실 안. 그 안에 도지완이 있었다.

“저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도지완은 인사하기도 전에 용건부터 물어 왔다. 하지만 나는 도지완을 보자마자 긴장으로 입이 바짝 마르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더듬더듬 내놓은 말이 이것이었다.

“저를…… 팀에서 배제하셨다고요…….”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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