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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24화 (24/88)

24화

도지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 줬더니 할 말이 그것뿐이냐고 질책하는 태도라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는 평소에 많이 바쁜 편이었다. 내가 입원했을 때도 옆에서 종종 야근을 했을 만큼. 거기에 다시 던전 공략까지 재개했으니 바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어 나는 그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부당해요! 고작 실수 한 번에 저를 배제한다는 게…….”

“그 실수 한 번에.”

“…….”

“당신은 죽을 뻔했습니다.”

내가 내 실수를 ‘고작’으로 치부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도지완은 굉장히 화가 나 보였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무언가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하지만’을 끝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났다.

예감이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며 나를 초조케 하는 바람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전…… 일해야 해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지완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실수 한 번. 실수 한 번에 팀에서 배제하는 건 너무한 처사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다른 팀으로 가는 것까지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라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아예 해고한 것도 아니고 자기 팀에서만 방출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팀으로 옮긴다고 내가 일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정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는 것이기에 나는 도지완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고집 피우듯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도지완은 같이 침묵할 뿐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고 싶다면.”

침묵하던 도지완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많이 벌고 싶다면 어시 일을 하는 것보다는 힐러로 일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왜 어시 일을 고집하는진 모르겠지만요.”

그 말에 나는 다른 생각이 번뜩였다. 그의 말에서 내 치유 능력을 인정하는 기미가 보였으니까.

“저, 그럼! 어시 대신 힐러로 이 팀에 남을 순 없을까요?”

도지완의 팀에 집착하는 모습이 타인이 보기엔 이상하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도지완의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으니까.

그러나 도지완은 내 질문에 그저 눈썹만 구겼다.

* * *

지완은 장고 끝에 한 사람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정을 떼기 위해서 싸늘하게 굴었고 결국 참다못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완의 달라진 태도 때문인가, 눈치를 보던 지호가 사고를 일으켜 위험한 상황까지 이르자 그는 싸늘하게 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아예 팀에서 배제해 버렸다. 말한 대로 고작 실수 한 번에 해고하는 것은 너무한 듯하여 팀을 바꾸는 쪽으로 유도했다.

일은 계속할 수 있으니 돈 문제는 없겠지 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마음이 평온해질 때쯤 채무를 탕감해 주는 것으로 함정에서 있었던 일에 보은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사자가 찾아왔다. 팀에 계속 있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어째서일까?’

지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른 것도 아니고 그저 팀을 변경하는 것뿐인데? 이게 나를 찾아와서 요청할 일인가?

혹시 자신과 있고 싶어서? 함정에서 보낸 시간이 길긴 길었으니 지호도 지완에게 친밀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지완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편 머리 한쪽이 차갑게 식었다.

‘……혹시 신지호가 무언가를 노리고 나에게 접근한 것은 아닐까?’

그는 도문 길드를 성공시키면서 도문그룹의 황태자가 되었다. 도문 길드에서 나오는 던전 부산물들이 도문그룹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팀에 남기를 고집하는 걸 보니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완은 지호에게 나름의 조언을 했다. 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어시 대신 힐러를 하라고.

그걸로 끝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지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욱 황당한 말이었다.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압니까?”

“전…….”

“안 됐지만 내 팀은 이미 티오가 다 찬 상태입니다.”

“…….”

“그리고, 신지호 씨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손발 맞춰 온 사람을 쳐 내면서까지 들일 이유가 제게 있을까요?”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힐러는 곧 여분의 목숨. 여분의 목숨을 책임져 줄 사람은 다다익선이었다.

팀에 힐러가 하나인 것과 둘인 것은 안전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헌터 업계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지완의 말이 얼마나 황당한 말인지 알겠지만 이 업계에 대해서 모르는 지호는 그의 말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지완의 짐작대로 지호는 지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이건 아닌데, 하는 얼굴로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지 몰라 울상만 지었다.

‘……다른 길드에서 보낸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결국 지완은 지호를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보낸 인물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 업계에 대해 모르는 걸 보면 길드 쪽이 아닌 다른 데서 보낸 것이 분명했다.

‘……도문그룹 쪽인가.’

길드를 운영하며 그룹의 중추가 되었지만 서자인 그를 못마땅해하는 친척은 많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지완의 틈을 발견해 그를 무너트리려 했으니.

그가 조사하고 사채업자에게 들은 말로는 지호의 빚이 진짜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니 그 빚을 미끼로 친척들이 지호를 움직인 게 아닐까? 한 번 의심이 생긴 데다 그 뒤의 생각들이 착착 맞아떨어져 가자 지완은 추측이 사실일 거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괘씸했으나 한번 선 안으로 들였던 사람이었기에 지완은 마음을 크게 먹고 그저 내치는 것으로 이 일을 끝내기로 했다.

“다른 팀으로 가기 싫다면, 좋습니다.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다른 팀으로 보낼 순 없지요.”

“그럼……?”

“회사를 그만두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은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직원은 필요 없습니다.”

퇴직을 말하는 지완을 보며 지호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완이 좀 더 빠르게 대처했다.

“퇴직금은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곳에서도 잘 지내시길.”

“길드장님!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지완이 축객령을 내렸지만 사색이 된 지호는 나가길 거부했다. 결국 그는 지완이 부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갔다.

“길드장님! 길드장……! 야! 도지완!”

끝에선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완은 이제 지호와는 더이상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지호는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 * *

잘렸다.

정말로 통장에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채 1년도 다니지 않았는데 주는 것도 다행이라면서 이야기한 사장님은 끝엔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하청 입장상 도문 길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어.”

그렇기에 나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사과하면서 다른 어시 회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어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도지완만이 나의 목표였으니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임무 포기는 곧 세상의 멸망! 그러니 지완에게서 떨어질 순 없었다.

‘도지완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네.’

변덕이라고 치기엔 도지완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뭐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건지 의문이었으나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같이 고민해 줄 사람을 불러왔다.

“뭐? 너 잘렸다고?”

나와 도지완을 알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정호 형도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나와 더 친한 형은 내 편을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됐어요.”

남은 사람은 사채업자뿐이었다.

“그렇게 되다니! 뭐가 된 건데? 하…… 참 나, 왜 이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거야?”

눈치를 보니 나에게 묻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럼 그 알려 주지 않은 상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솔깃해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도지완이 나 잘린 거 안 알려 줬어요?”

“그렇다니까?”

“이제 꼴 보기 싫으니 신지호 돈 쥐어짜서 지옥을 맛보게 해 줘라, 이런 말도 안 했고요?”

“그래!”

참 나, 하는 짓이 완전 온탕과 냉탕이었다. 쌀쌀맞게 찬물의 냉혹함을 맛보아라! 하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따뜻한 온탕 안이었으니까.

가차 없이 나를 해고했으면서도 사채업자에게 내 실직 소식을 알리지 않은 건 또 왜일까.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비죽 웃던 나는 한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라 빚을 지운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이것을 사채업자에게 말하니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미친놈. 네가 진 빚이 한두 푼이야? 23억이면 집 한 채 값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사업하는 인간이 돈을 잊긴 왜 잊어. 아주 똥을 싸라, 인마.”

쯧쯧, 혀를 차며 모자란 사람 보듯 사채업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말도 맞았기에 나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했나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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