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울컥한 내가 무어라 하기 전 사채업자는 꽤 열이 받은 듯 냅다 소리쳤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하지 않았겠냐!”
“아!”
그러더니 열받는 걸 참지 못하겠는지 나를 쥐어박았다. 예전처럼 굴복시키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그리 위력은 세지 않았다.
이마를 문지르고 있으니 사채업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 팔자야.”
“…….”
“……그래. 한번 들어 보자. 원하는 일자리 조건이 어떻게 되는데?”
그렇게 말을 한 사채업자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무슨 소리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반응을 보건대 내가 원하는 일자리는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일단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말했다.
“일단…… 근무 시간이 유연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의미로? 자세하게 말해 봐.”
“그러니까…… 도지완이 쉴 때 나도 쉴 수 있고, 도지완이 일하러 들어가면 나도 일하러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왜 그분이 쉴 때 쉬어야 하는데?”
의심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 사채업자에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도지완을 감시해야 하니까요?”
“뭐……라고?”
그가 이해하지 못한 듯하여 나는 설명해 주었다. 혹시라도 마왕의 추종자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마왕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었기에 자세하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도지완이 누굴 만나는지 알고 싶어서요. 그래서 그 사람이 쉴 때 나도 쉬면서 지켜봐야 해요.”
내 말에 사채업자의 눈빛이 떨려 왔다. 표정도 무너져 마치 기괴한 것을 본다는 듯했다.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니 사채업자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저 숭고한 사명이 있을 뿐이다. 그걸 알지 못하는 사채업자는 주춤거리며 나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너, 시발……. 스토킹이란 거 알아?”
“예.”
“……그게 범죄란 것도 알고 있어?”
“예.”
물론 그것이 내 계획과 상당 부분 닮아 있기는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은 범죄가 아니다. 범죄보다는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사채업자의 얼굴에 동정이 깃들었다. 하나 그 동정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물론 도지완이 동정을 받든 말든 나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었기에 그저 모른 척했다.
“진짜 미친놈. 하…….”
한숨을 쉰 사채업자는 자긴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에게 돈을 받아야 하기에 원하는 일자리를 찾아보긴 하겠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말라고 하면서 사채업자는 떠나갔다.
나도 그에게만 기댈 생각은 없었기에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기도였다.
‘신이시여.’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초를 켜 두고 신에게 기도했다. 회귀하며 소멸해 버린 신이었지만, 그래도 그분의 의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천계에서 그랬듯 그분을 떠올렸다.
‘제가 세상을 구할 수 있게 힘을 주세요.’
내 임무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없애 달라 기도를 마친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신성력이 가득 찬 여섯 개의 구슬을 주웠다. 특이하게도 구슬 겉면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줍자 구슬은 깜빡이며 점멸했다. 천천히 밝아졌다가 천천히 빛이 줄어드는 구슬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연스럽게 구슬을 품에 안자 환청인지, 아니면 신의 남은 의지인지 상냥한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앞길에 무수한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눈앞이 밝아지며 나는 꿈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 몽롱한 와중에도 구슬의 숫자는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나는 꿈에 나온 구슬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어 대충 물로 세수만 하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자취방을 나오자마자 바로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간 나는 머릿속에 남은 숫자들을 적어 복권을 샀다. 구슬과 숫자가 너무 노골적이라 떠올리기는 쉬웠다.
마침 금요일이라 바로 다음 날이 추첨이었기에 긴 기다림 없이 빠르게 결과를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영수증을 품에 고이 모셔 둔 채 시간이 흘러 드디어 추첨 시간이 되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 * *
새로 구한 던전의 첫 공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전하는 차 안에서 지완은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저번처럼 자신을 관찰하는 동물들은 보이지 않아 곧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냥 저번의 일은 우연이었군.’
동물들의 이상 행동부터 시작하여 지호의 감시까지 겹쳐 아무래도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그나마 동물들의 일은 해결되었는데, 지호는 어떨지 알 수 없어 지완은 조금 긴장했다.
설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긴장하며 집 앞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지완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서 서운함을 깨닫는 순간 지완의 얼굴이 굳었다. 멀리한다고 해 놓고 또다시 지호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젠장…….’
지완은 힘을 각성한 이후 그가 뜻한 것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도문 길드를 세우고 그 길드를 한국 최고의 길드로 만들어 내었다.
길드를 세울 때만 해도 파워는 도문그룹이 더 셌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도문 길드가 던전 부산물 유통을 통제해 버린다면 도문그룹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덕분에 그의 부친은 그룹 내에서 입지가 단단해졌다. 서자인 지완 때문에 회장인 할아버지에게 눈총을 받던 그는 나중엔 본처와 이혼까지 하게 되어 아예 눈 밖에 날 뻔했는데 지완의 활약으로 도문그룹이 큰 수익을 얻게 되자 부친의 입지도 덩달아 상승하게 된 것이다.
아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지완의 부친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후계에서 밀려났던 부친도 단숨에 차기 회장으로 만들 정도의 지완이었으니……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거슬려…….’
지완은 지호가 거슬렸다. 지완의 힘이면 지호를 치우는 일 정도는 쉬울 텐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싫었다.
지완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신지호를 밀어내고 싶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완은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는 샤워를 한 후 개인 물품을 손보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1층에서 익숙한 인영을 보게 되었다.
“……신지호.”
정말로 끈질겼다. 지완은 경비를 불러 내쫓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자신이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신지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완이 지호가 아래층에 있든 말든 무시한 채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볼 때였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비가 내리는군, 하고 아무 생각 안 할 그였지만 비가 내리는 걸 인지하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지호를 향한 걱정에 지완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놈이 비를 맞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비가 내리면 당연히 돌아갈 터였다. 멍청하게 그걸 맞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완은 뉴스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앵커가 무어라 열심히 떠들어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을비라서…… 차가울 텐데.’
몸도 약해 빠져서 그렇게 먹여도 영양실조가 낫질 않던데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초조한 마음이 자꾸 일었다. 결국 지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에 없을 거야, 설마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베란다 밖을 살폈다.
세차게 오는 가을비는 한 뼘 앞의 시야도 잘 보이지 않게 했다. 역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지완은 익숙한 자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확인하고는 숨을 멈췄다.
‘설마…… 아니겠지.’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깜빡 잊고 놓고 간 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지만 자꾸 그 실루엣이 머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세차게 오는데…… 그렇게 멍청할 리 없어.’
지완이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누군가가 의문을 던졌다.
‘저게 진짜 신지호라면?’
‘비를 피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예를 들어…… 쓰러졌다든가.’
쿵. 지완은 분명히 들었다. 자신의 심장이 저 바닥으로 처박히는 소리를.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우산을 든 채 1층에 당도해 있었다. 저릿저릿한 맨발이 그가 계단을 날듯 뛰어 내려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초조한 마음을 누른 채 천천히 바깥으로 나간 지완은 위에서 본 것보다 더 또렷하게 보이는 형체를 확인하고 눈을 잘게 떨었다.
떨어지는 빗물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에도 형체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제야 머릿속에 울리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로 쓰러진 건 아닐까?’
우산을 펼 생각도 못 하고 지완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그의 굳었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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