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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28화 (28/88)

28화

“……신지호?”

“어……?”

지호와 지완은 서로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지호는 ‘왜 우산이 있으면서 쓰지 않고 있냐.’는 눈으로, 지완은…….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지완은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호는 무사했다. 아니, 무사한 걸로도 모자라 오히려 돌봄을 받고 있었다.

‘……백설 공주야?’

언젠가 디x니 만화에서 봤던 백설 공주가 떠올랐다. 어째서냐면 그의 주변에 새들이 바글바글했던 것이다.

비둘기를 포함한 여러 종의 새들이 지호의 머리와 어깨 위에 앉아 날개를 펼쳐서 그에게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 주고 있었다.

지완이 지호에게 다가가자 자리에 있던 모든 조류의 시선이 지완에게 향했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무수한 새들의 눈이 희번덕대며 자신에게 향하자 S급의 헌터인 지완도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새 따위에게…… 지금 두려움을 느낀 건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금 앞에 있는 건 괴수도 아니고 그저 새였다.

평소에는 날기보다 땅을 걸어 다니기 바쁜 비둘기들에게 살기를 느끼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황당함에 기막혀하는 지완을 보며 지호는 도망갈 궁리를 했지만 곁에 있는 새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지완이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 지호 머리 위에 씌워 주자 그제야 새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비에 홀딱 젖은 지완과 다르게 지호는 깃털이 묻어 있을 뿐 젖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는 그에게 지완이 말했다.

“신지호 씨.”

“……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겁니까?”

“…….”

“나에게 무얼 원하는 겁니까?”

지완은 궁금했다. 전처럼 매달려 볼 생각이라면 그가 나왔을 때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옳았다. 그런데 지호는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오면 깜짝 놀라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원한을 가지고 지완을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코지를 하려고 했다면 다가오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지호가 이러니 지완은 궁금했다. 자신과 뭘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지완의 질문에 지호는 답을 망설였다. 묻긴 했지만 지호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자 지완은 굳이 캐물을 필요가 있나 싶어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지호가 말했다.

“저는…….”

“…….”

“알고 싶어요.”

무얼? 지완이 묻지 않아도 지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제가 없을 때 길드장님이 누구를 만나는지…….”

“……?”

“길드장님이 그 사람이랑 만나서 뭘 하는지…….”

“…….”

“모조리 다…… 알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호의 눈이 까마득하게 깊어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지완은 왠지 등골이 쭈뼛 서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농담이라기엔 진지해 보이는 지호의 모습에 지완은 갑자기 마음이 술렁거렸다.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기대감이 피어오른 탓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계속 지호의 곁에 있다가는 헛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비에 흠뻑 젖은 그가 집에 돌아와 베란다로 갔을 때, 지호는 없었다. 그가 준 우산도 자리에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쓰고 돌아간 듯싶었다.

혼자 남은 지완은 생각에 빠졌다.

‘왜? 왜일까……?’

왜 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그 누군가와 무얼 하는지 궁금한 걸까?

이상하게 피어오른 기대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쪽 구석은 차갑게 식었다.

‘왜긴 왜야. 신지호를 포섭한 사람이 나를 감시하도록 시킨 거겠지.’

그에 또 기대감이 식어 갈 때, 다른 누군가가 또 그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정말로 신지호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인 건 맞아?’

의심은 가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의심스러운 부분도 신지호가 하는 짓이 하도 황당하니까 얘라면 자기가 뭐가 이상한지 모를 법도 하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자세하게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만약에, 정말로 그렇게 했는데 신지호에게 불순한 의도가 없다면…….

‘……난 대체 어쩌고 싶은 거지.’

지완은 베란다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저 먼 아래 지호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는 지완의 눈이 짙어졌다.

“만약, 정말로…… 아무와도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기회를 주었다. 신지호가 그의 선 밖에서 살 기회를.

지완은 제 것이라 여긴 것은 죽어도 지켰다. 그러니까 관심 없었던 도문그룹 후계자 자리도 한 번 차지하고 나선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 아닌가.

그 때문에 친척들의 눈총과 귀찮은 견제가 생겼음에도 말이다.

‘기회를 줬음에도 스스로 선 안으로 들어오겠다면.’

더 이상 말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호는 잘 생각해야 했다.

한 번 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한쪽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지완은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 * *

내가 무얼 하고 싶은 건지 물어보던 도지완은 대답을 듣고 화들짝 놀라 도망갔지만 사람을 불러 쫓아내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꺼지라며 폭언을 한다든가 경찰을 부른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계획했던 걸 실행해도 되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계획 실행 일 전날. 나는 정호 형과 인사를 나눴다.

“지호야……. 이사 가서도 잘 살아야 해.”

“에이, 형 저 이민 가는 거 아니에요.”

앞으로 못 만날 사이도 아닌데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처럼 그러냐 하며 웃는 나에게 정호 형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게…… 근데 꼭 이사 가야 해?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

“하지만 제 꿈을 이루려면 그쪽으로 가야 해요.”

정호 형은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는 듯한 걱정 어린 얼굴을 했지만 내가 꿈을 운운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사 가는 걸 도와주고 싶은데. 갑자기 잡힌 이사라 나도 시간을 내기 어렵네. 그날 출근해야 하거든.”

“뭐 여기서 가져갈 것도 없는걸요. 다 풀 옵션이었으니까. 어차피 짐도 얼마 안 돼요.”

말 그대로 이불과 옷 몇 가지 제외하면 내가 들고 갈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정호 형이 쉬는 날은 도지완도 쉬는 날이니까.’

혹시 모를 일이지만, 도지완이 쉬게 되어 내 계획을 알게 된다면 방해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생각을 숨기고 아쉬워하는 정호 형을 달랬다.

그렇게 정호 형이 출근을 하고 난 그다음 날이 나의 이사 날이 되었다.

* * *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누군가가 말하면서 따라다닌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터인데. 그것이 지호가 되니 지완은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순 없었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그 일은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자리니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해야만 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것이 무색하게도 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다시 그 울렁거림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이라 슬슬 추워지는데 열선이 깔린 벤치라도 밖에 놔둬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완은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에 실망했다.

지호가 그 자리에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러다가 또 어느 순간 얼굴을 들이밀겠지 싶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 지완은 그의 집이 있는 47층에서 내리려다가 누군가와 마주쳤다.

“……너?”

“헉!”

상대는 다름 아닌 지호였다. 이놈이 하다 하다 불법 침입까지 하는 건가? 생각한 지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호는 그 눈빛을 보고 도망치려 했으나 S급의 헌터에게서 D급 헌터가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하다 하다 불법 침입까지 합니까?”

지완의 아파트는 주민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도록 입구에 카드 키를 접촉해야만 문이 열렸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도 카드 키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으니 그가 한 일은 명백히 불법 침입이 맞았다.

그런데 지완의 한심하다는 눈빛을 본 지호가 발끈하며 성을 냈다.

“아니거든요!”

“그럼 뭡니까?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지호의 빈약한 인맥을 알고 있는 지완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비웃음에 지호는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더니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지완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 아파트의 출입증과 같은 카드 키였으니까.

“나도 여기…….”

“……훔친 겁니까?”

“맞아요. ……가 아니라! 왜 당연히 훔친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뻐기듯 고개를 끄덕이던 지호가 지완의 말을 곱씹고는 씩씩 성을 냈지만 지완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드 키는 주민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외부인인 지호가 얻을 적법한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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