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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29화 (29/88)

29화

‘주운 거겠지.’

지완도 사실 그가 카드 키를 훔친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주민 중 하나가 떨어트린 걸 멋대로 취득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무엇보다도 지호가 그걸 훔쳤든 주웠든 지완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카드 키가 아니라 더한 걸 훔쳤더라도 그는 지호를 타박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남의 것을 들고 다니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해 그가 상처를 받거나 욕을 먹는 건 싫었다.

“주시죠.”

그래서 지호가 주운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카드 키 여분은 자신도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기회 나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지호는 뭐가 그리 슬픈지 눈에 습기가 돌았다. 그러더니 지완의 팔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이……!”

아니, 달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호가 향한 곳은 계단이 아니었다. 지완의 집 맞은편으로 가서는 도어 록에 손을 얹었다.

지문 인식형 도어 록이 그가 손바닥을 대자 삐리릭, 하는 기계음을 내며 열렸다.

“봤죠? 저도 여기 주민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지호의 얼굴에 서운하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지완은 지호의 행동에 얼떨떨해하다가 얼굴이 확 굳었다.

“여기 주민이라고……?”

“네. 그러니까. 이 카드 키는 훔친 게 아니라고요!”

그의 앞에서 카드 키를 팔랑이는 지호를 멍하니 바라보던 지완이 단숨에 지호의 앞에 다다랐다. 갑자기 쑥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지호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힉……!”

“주민이 되었다고? 어떻게?”

지완은 치사하게 지호의 사정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게 흘러갔다.

그도 그럴 것이 지완이 사는 이 아파트는 서울에서도 꽤 고급 축에 속했다. 층이 높으면 높을수록 평수도 높아졌으니 그에 가격도 높아지는 게 당연했다.

23억의 재산은커녕 부채가 있는 지호가 어떻게 자신의 앞집에 이사를 오겠는가?

‘설마…… 뒤에 정말 누군가가 있는 건가?’

지완의 의심이 풀리려고 하면 흘러가는 상황이 또 의심을 낳았다. 누군가가 그를 자신에게 접근시키기 위해서 이곳에 집을 얻어 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지완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동요한 마음에 지호에게 큰 실수를 하게 될까 봐서였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 *

저녁밥 사러 나왔다가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이사 왔다는 말에 성질을 내고 들어가는 도지완의 모습에 나는 그저 황당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화를 낼 거라 생각은 했다. 아니, 사실…… 저렇게 화를 낼 거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이사 온 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저번에 우산을 줬길래 혹시나 했는데……. 너무 서운해서 입맛도 사라졌다.

원래라면 편의점에 도시락을 사러 갔겠지만 마음을 바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집은 굉장히 썰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집에 채워 둔 것이 몇 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거리가 가까워진 것에 의의를 두자고 생각했지만 그를 볼 때마다 가끔 마주치는 눈빛이 쌀쌀맞아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감정이 참 불편하단 말이지…….’

만약 내가 천사의 몸으로 내려와 도지완을 따라다녔다면, 그가 성을 내든 기뻐하든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을 터였다.

신지호의 몸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때때로 느끼는 감정이 너무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서 인간들이 스트레스로 많이 죽는 건가…….’

감정이 없는 천사들은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어서 장수하는 거고? 흠……. 비약 같지만 은근히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 나는 천계에 있었다.

* * *

‘오……?’

한순간 천계로 돌아온 건가? 싶었는데 나는 신지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지호의 몸으로 천계에 돌아올 방법은 없었으니 나는 이것이 꿈이란 걸 바로 깨달았다.

〈어라? 왜지?〉

천계가 나오는데 개꿈일 리는 없었다. 이런 꿈을 꾸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 순간 내 눈앞이 환하게 변했다. 찬란한 광휘를 등에 지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신이었다. 이제는 소멸하고 없어진.

〈신이시여.〉

나는 그분에게 다가갔다. 이것이 진짜 신이 아니고 그분의 잔상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감정을 알게 된 내가 먼저 느낀 것은 그리움이었다.

내가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다가온 그분께서는 내 볼을 양손으로 감싼 채 나에게 속삭였다.

〈조심하라.〉

그 순간 그분의 뒤에 찬란하던 광휘는 꺼지고 검은 먹구름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천계는 금방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빛이 사라지고 깜깜한 암흑만이 남았을 때, 나를 내려다보던 신의 모습도 사라졌다.

당황하는 내가 주위를 다급하게 돌아보자 천계를 먹어 치운 먹구름들은 끝내 모든 것을 삼키기 위해 나에게 달려들었다.

* * *

“헉!”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깐 잔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9시였다.

‘오늘은 던전 들어가는 날이지?’

그럼 지금 이 시간이면 도지완은 이미 나가고 없을 터였다. 물론 던전 입장 날이 아니더라도 도지완은 이 시간에 회사에 있었겠지만.

한숨을 팍 쉬면서 나는 꿈의 내용을 곱씹었다.

“조심하라니…….”

내가 조심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이것을 개꿈이라 치부하지 않았다.

신은 소멸했어도 그의 의지는 신성으로 남아 있기에 그 잔상 되는 것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조심해야 할 건…… 역시 마왕의 추종자들이겠지.’

신지호가 조심해야 할 건 딱히 없었다. 예전처럼 사채업자와 사이가 나쁘다면 그를 조심해야 했겠지만…….

사채업자 따위를 조심하라고 신이 꿈에까지 나타났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뭐지? 설마 새로운 사람이 회사에 들어온 건가?”

그 사람이 마왕의 추종자고? 나는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가 몇 개 없어 나는 바로 전화할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수화음이 잠시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지호야. 왜?

정호 형이었다. 아마 던전으로 가는 회사 차 안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호 형. 지금 어디예요?”

꿈이 경고한 것이 정말로 마왕의 추종자를 가리키는 거라면 내가 그쪽으로 가야만 했다.

다짜고짜 위치를 묻는 내가 수상해 보이지도 않는지 정호 형은 해맑게 대답했다.

- 응? 나 집인데?

“네? 출근 안 하셨어요?”

- 아……그게…….

당황하는 나에게 정호 형은 던전 입장이 미뤄졌다는 것을 알렸다.

- 길드장이 일이 있다나 봐. 그래서 이틀 미뤄졌어.

무슨 일인진 모르겠다고 말한 정호 형은 시간이 난 김에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아무래도 도지완은 오늘 던전에 가는 대신 마왕의 추종자를 만나러 갈 듯했으니까.

말려야 된다는 생각에 나는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 앞집 문을 두드렸다. 아까 베란다를 통해 도지완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걸 확인했으니 아직 나가진 않았을 터였다.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에도 나오지 않기에 초인종을 타다다닥 연달아 눌렀다. 그럼에도 열리지 않아 나는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도지완 씨! 길드장님!”

소란을 피운 보람이 있게도 도지완은 나를 무시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샤워 중이었는지 가운을 허술하게 걸치고 젖은 머리를 한 채 나를 문틈으로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별 몰상식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에 조금 상처받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늘 어디 가세요?”

“그걸 왜…….”

“안 가시면 안 돼요?”

다짜고짜 매달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도지완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 서서는 팔짱을 끼었다.

“제가 왜 신지호 씨 말을 들어야 하나요?”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마왕 어쩌구 이래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내가 우물쭈물하니 도지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시킨 겁니까? 오늘 행사에 나를 오지 못하게 하라고요?”

“……예?”

“혹시, 그 사람이…… 나를 감시하라고 시켰습니까?”

“예에?”

나는 황당했다. 누가 나더러 도지완을 감시하라고 시켰다고 지금 의심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치 않았고, 존재한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아닌데요?”

“진짜 아닙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도지완은 믿지 않았다. 그는 더욱 눈초리를 날카롭게 해서는 집요하게 물어봤다.

“정말로 나를 감시한 이유에 다른 사람의 사주가 없었다는 건가요?”

“네.”

“…….”

“진짠데요……. 길드장님을 지켜보는 건 제 의지로 하는 거라고요.”

나라서 널 지켜보는 거지! 다른 천사였으면 벌써 넌 죽은 목숨이었다! 감시하는 것보다 없애는 게 더 간단하고 빠를 테니까.

“정말로 길드장님이 절 놔두고 누굴 만나는지 궁금하니까…….”

내 말에 도지완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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