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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30화 (30/88)

30화

그는 곧 허탈한 얼굴이 되어 이마를 짚었다.

“하…… 자꾸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아니고…….”

“…….”

“정말로 나를 감시하라 시킨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여기로 이사한 겁니까?”

나는 곧 사정을 알았다. 내가 이사 온 것이 도지완의 의심을 불렀다는 것을 말이다.

‘돈 없는 내가 비싼 아파트로 이사 와서 그러나 보네.’

합당한 의심이긴 한데 조금 서운해 나는 뾰로통해졌다. 참으려고 해도 입술이 삐죽 나와서 서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됐거든요.”

“뭐라고요?”

“로또에 당첨됐다고요!”

서러움에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도지완은 깜짝 놀랐다. 멍청이같이 ‘로또?’라고 되묻기에 인상을 잔뜩 쓴 채 고개를 끄덕여 줬다.

“……빚을 안 갚고 집을 샀다고?”

“산 건 아니고…… 월세예요. 집값이 워낙 비싸서…….”

“월세?”

도지완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이 아파트가 좋다지만 월세로 살 만한 가치가 있냐 하는 의문도 얼굴에 가득이었다.

상식적으로 바보 같은 일은 맞는 것 같아 나는 쭈그러든 채 변명하듯 말했다.

“……감시하려면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런데 도지완의 표정이 이상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무슨 감정이라고 딱 꼬집긴 어려웠는데 불호보다는 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보였다.

왜냐면 입가가 씰룩거렸기 때문이었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

“그래서? 갈 거예요? 안 갈 거죠?”

한숨을 뱉는 도지완에게 내가 물었지만 그는 바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도지완이 조금 망설이듯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취소할 수 없는 일이야.”

“예? 왜요?”

“할아버지 생신이거든.”

생신 파티를 겸한 모임이라 도문그룹의 사람이면 빠질 수가 없다고 했다.

“길드 덕분에 내 입지가 높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룹의 주인은 할아버지야. 그런데 내가 이런 일에 빠져 봐. 바로 나를 물어뜯을 사람만 해도 양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지.”

바로 다음 날도 아니고, 석간 속보로 도문그룹 회장과 도지완의 불화설이 나돌 거라고 말했다.

“그, 그럼…… 저도 갈래요!”

“……넌 안 돼.”

“왜요!”

“자격이 안 되니까. 초청장 있어?”

실물로 본 적도 없는 도문그룹 회장의 생일 파티 초대장이 있을 리 당연히 만무했다. 도지완의 말은 합당했기에 나는 그저 입술을 삐죽대는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 너 없는 사이에 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너는 확인할 수 없으니 안 됐군.”

입술 한쪽만 올려 비뚜름하게 웃는 도지완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를 놀리는 기운이 가득한 그의 태도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왜 또 반말하세요?”

꼬박꼬박 존댓말 하더니. 왜 또 갑자기 반말이냐, 이 말이었다.

내 질문이 뜻밖인 건지 황당한 건지 다시 도지완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지만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 * *

돌아오면 할 말이 있으니 얌전하게 있으라고 도지완이 말했지만 나는 순순히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초청장이 없으면…… 몰래라도 들어가면 되지.’

신께서 경고까지 하셨는데 그냥 두고 보는 걸론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파티가 어디서 열리는지 도지완은 알려 주지 않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자연은 모르는 게 없었으니까.

파티가 도문그룹의 호텔에서 열리는 것도, 도지완이 예약한 생일 선물을 가지러 가느라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것도 전부 전해 들었다.

‘이제 여길 어떻게 들어가냐인데…….’

파티장인 리셉션홀 근처를 기웃기웃하니 휘황찬란하게 꾸며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초청장 없이도 들어간다 쳐도 옷이 문제잖아?’

청바지에 티셔츠, 그 위에 야상을 걸치고 있는 내 모습과 저기 들어가는 사람들 모습은 천지 차이와도 같았다.

드레스 코드를 생각하지 않고 온 나의 멍청함에 이마를 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도지완이 온 줄 알고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봤지만 다행히도 상대는 도지완이 아니었다.

“누…….”

“너, 알바?”

“예?”

“너 알바하러 온 애 아니야?”

뭔진 모르지만 눈치상 예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제 오면 어떡해! 진짜 요새 애들은 책임감이 없어요!”

“…….”

“사람 모자란 것만 아니었으면 돌려보내는데. 아오!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 해?”

“예!”

성질을 부린 남자의 뒤를 쫓아가자 스태프들만 이동하는 공간이 나왔다. 그 길을 조금 걷자 탈의실이라고 적힌 방이 보였다.

“95면 되지? 자, 갈아입고 나와.”

“네…….”

탈의실에 같이 들어간 남자가 옷을 꺼내 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건네준 옷은 웨이터들이 입는 옷이었다. 빠르게 갈아입고 나가자 남자는 매무새를 확인하더니 뒤돌아서 빠르게 걸어갔다. 따라오란 말은 없었지만 눈치상 따라가야 할 것 같아 나는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중요한 일은 시키지 않을 거야. 그냥 가서 빈 잔 들고 있는 사람한테 잔 받고, 눈치껏 서빙하면 돼.”

“네…….”

“사고만 치지 마라, 사고만.”

“네…….”

대답을 했지만 남자의 눈에선 못 미더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스태프 통로를 이용해 리셉션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운이 좋네.’

아르바이트생으로 오인받은 덕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나를 끌고 온 남자가 제일 직책이 높았는지 나에게 이것저것 시켰다. 쟁반 위에 글라스나 핑거푸드 몇 개 얹어서 돌아다니는 게 다였지만 내 행색이 정말로 못 미더웠는지 그가 감탄했다.

“오, 꽤 하네? 비실비실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하하…….”

신지호는 이래 봬도 D급 헌터였다. 아무리 내가 마르고 어쭙잖아 보여도 일반인들 이상의 스펙이라는 소리였다.

‘능력자의 힘이나 균형 감각으로는 껌이지.’

양손과 머리 위에 술잔을 올린 쟁반을 얹고 외발자전거를 타도 거뜬할 정도였으니까.

상식적으로 D급 헌터가 이런 일을 할 리 없고, 나도 내가 D급 헌터라 말하지 않았으니 남자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덕분에 마이너스였던 호감도가 정상이 되었는지 남자는 아까보다 한결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렇게 주위 사람을 살피며 돌아다니던 그때, 저 멀리서 도지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 * *

도문그룹 회장인 할아버지의 생일 선물로 예약해 두었던 물건을 받아 백화점에서 나오며 지완은 픽 웃었다.

지호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던 탓이었다.

‘로또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당첨되기 힘든 로또에 당첨되어 하는 짓이 지완을 관찰하기 편하게 집을 빌린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그런 돈이 생기면 빚을 먼저 갚는 게 옳지 않나? 아무튼 기가 막혔다.

지완은 지호의 말이 딱히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짓이라면 들통날 것이 뻔한데 면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적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지완이 운전 중인 비서를 불렀다.

“배 비서님.”

“네.”

평소에는 직접 운전을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비서가 운전기사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룸미러로 눈이 마주치자 지완이 물었다.

“저번에 조사하라고 시킨 것. 결과 나왔습니까?”

“아, 네…… 두 군데에서는 자료를 보냈는데, 한 곳이 오늘까지 자료를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두 군데라도 제 메일로 보내 놓으세요.”

“네.”

그가 비서에게 조사하라고 시킨 것은 다름 아닌 신지호의 뒷조사였다.

혹시라도 조사한 곳이 다른 사람에게 매수되었을까 봐 비밀리에 세 군데로 나누어 조사를 시켰다.

로또 당첨 정도의 큰일이면 조사 보고서에도 적혀 있을 테니 곧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문 계열사의 호텔로 들어간 도지완은 파티장인 리셉션홀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옆구리에 꿴 선물상자를 회장의 비서에게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몇몇은 불쾌하다는 듯이, 몇몇은 반갑다는 듯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쾌하다는 쪽은 대부분 친척들이었고, 반갑다는 얼굴을 하는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지만 어느 정도 지완과 사업이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 길드장! 어서 와요!”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그래. 최근에 안나이트 광석이 나오는 던전을 클리어했다면서요?”

그들의 욕망은 아주 투명했다. 지완이 가진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원했다. 물론 대부분의 부산물은 도문그룹의 차지였지만 그들은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 같은 잔여물이라도 얻기 위해서 지완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네. 맞습니다. 던전 통로 하나가 광산으로 되어 있더군요.”

“광산!”

“그럼…… 채광량은 어떤가요? 광산이 크면 도문그룹도 전부 소화하기 힘들지 않나요?”

지완의 말에 모두가 흥분한 눈치였다. 지완은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다가 인상을 썼다.

여기서 보여선 안 되는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였다. 그러나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놓쳐 버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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