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회장님과의 대화는 끝나신 거예요?”
민채은이었다. 지호처럼 그녀도 지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죠. 민채은 씨는 회장님께 인사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이 파티에 온 사람은 전부 회장에게 눈도장 찍기 위해서 온 것이니 물었지만 채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사실 저는 다른 사람을 노리고 여기에 온 거거든요.”
다른 사람. 그게 누군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놓고 유혹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면 등신 천치나 다름없었다.
“우리…… 조용한 데서 술 한잔할래요?”
짙게 미소 지으며 채은이 속삭였다. 지완의 눈이 지호를 잠시 훑었다. 지호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리저리 바빠 보였다.
지호가 그와 채은이 있는 걸 보고선 화들짝 놀라더니 다가오려고 했다가 또 누군가의 제지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지완은 조금 심기가 뒤틀렸다.
그래서 조금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결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아니었다.
“좋아요. 하지만 밖에 나가긴 힘드니 옆방으로 가서 마시죠.”
리셉션홀 옆에는 잠깐 쉴 수 있는 작은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장실과 파우더룸이 있어 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은 물론 작은 의자나 테이블도 있어 기대어 쉴 수도 있었다.
지호를 두고 굳이 채은과 바깥에 나가서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제안했더니 채은은 아쉬운 티 하나 없이 좋다고 말했다.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가며 지호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자 뭐가 바쁜지 이번엔 그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가 휴게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냥 화장실을 이용하는 몇 명만이 보일 뿐이었다.
채은은 여기 들어오기 전에 스태프에게 받아 둔 술잔을 지완에게 넘겼다.
파티장에서도 마신 술이라 도수가 그리 높지 않아 지완이 거부하지 않고 술잔을 받아들여 홀짝이자 채은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완 씨는 어찌 보면 자수성가한 사업가나 다름없죠.”
“…….”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 오르셨잖아요.”
“과찬입니다. 저도 아버지의 지원이 있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요. 모두 제힘으로 했다기에는 어폐가 있지요. 운이 좋았던 겁니다.”
지완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운이 좋게도’ 각성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운이 좋게도’ 돈이 많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에게 지원을 받아 모은 사람들로 공략한 던전이 ‘운이 좋게도’ 비싸게 팔 만한 부산물이 많이 나와 대박이 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만큼 운이 따라 주던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마치 누군가가 그를 위해서 판을 짜 둔 것 같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 ‘누군가’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신적인 존재일 텐데 지완은 신을 믿지 않았기에 그저 재미있는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겼다.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짓는 지완을 빤히 바라보던 채은이 말했다.
“지완 씨는 세계가 불공평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세요?”
무슨 의도로 묻는지 몰라 바라보자 채은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어요. 굶어 죽든, 아니면 감기 같은 흔한 질병 하나 치료하지 못해서요.”
“…….”
“그리고 저 안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를 쥐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지완 씨는 겨우 발버둥 쳐 손에 쥔 것들을 저들은 태어나는 것만으로 손에 쥐었잖아요.”
지완은 코웃음 쳤다. 자수성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이 때문이었나? 비록 서자라지만 지완도 저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서자라고 딱히 학대를 받으며 자란 건 아니었으니까 그도 빈곤함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채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 당신에게 이 세계를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쩌시겠어요?”
채은이 슬며시 손을 뻗어 지완의 손등을 짚었다. 지완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글쎄요? 저는 제 길드 하나 운영하는 것도 힘이 들어서…… 세계라니, 너무 스케일이 큰 것 아닐까요?”
“어머나, 후후…….”
“아무튼 세계 같은 건 고작 인간인 제가 아니라, 신 같은 존재가 운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군요.”
물론 신은 없겠지만. 지완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지완의 말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채은을 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신은 정말로 존재한답니다.”
마치 지완의 속말을 엿들은 것처럼 말을 뱉어 내는 채은을 보고 지완은 조금 놀랐다. 그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갑자기 몸이 굳었다.
‘뭐지?’
지완은 당황했다. 앉은 채 채은을 바라본 상태로 몸이 완전히 단단하게 굳어 버렸으니까. 눈알 하나도 굴릴 수가 없었다. 그저 숨만 내쉬는 게 다였다.
“그리고 당신이 내 신이지.”
움직이지 못하는 지완을 보며 채은이 웃으며 일어섰다.
대체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지완은 무력하게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채은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가온 채은은 손을 뻗어 지완의 머리를 매만졌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부드럽고 정중한 손길이었다.
다만 그 사랑이 이성을 보는 사랑이 아니고 마치 추종하는 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웬 사이비 같은 놈에게 걸려서…….’
민채은을 소개한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악무는 지완의 고개를 채은이 젖혔다.
그를 내려다보는 채은의 눈에 열기가 가득했다.
‘설마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
입술 따위야 몇 번이고 부딪힌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곳은 아무나 출입 가능한 곳이었고,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게 된다면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저 너머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완의 적이었으니, 그들은 좋다고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이었다.
‘젠장.’
채은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지완을 보며 채은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나의 신이시여.”
그러더니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대었다. 지완은 피하긴 힘드니 노려보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지완의 얼굴과 한 뼘 정도의 거리만이 남았을 때 멈춘 채은은 입을 벌렸다. 그녀의 이상 행동에 의아해하던 지완의 얼굴은 곧 사색이 되었다.
갑자기 채은의 눈과 코, 입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와서였다.
‘이게 무슨……!’
연기란 것은 원래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은 이상하게도 폭포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피하려고 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지완의 얼굴에 연기가 떨어져 내렸다.
지완은 본능적으로 저것을 들이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닫고 눈을 감은 채 숨을 참았다.
각성자라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는 지완이었지만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끝내 지완이 숨을 들이켜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의 입으로 고여 있던 연기들이 흘러들어 갔다.
이상하게도 연기를 들이마셨지만 숨이 차지는 않았다. 그저 머리가 몽롱해질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거부하려고 했지만 그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연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 * *
‘아차, 도지완은?’
정신없이 일에 몰입하다 보니 도지완을 깜빡해 버렸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도지완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돌아간 건가 싶었지만 왠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여자도 없어.’
지완의 곁에 있었던 기분 나쁜 여자. 그 여자도 없었다. 생김새가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고 본능적으로 꺼려져 기분이 나빴었다.
두 사람이 우연히 동시에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하던 일도 멈추고 도지완을 찾아다녔다.
‘이런 멍청이! 중요한 건 도지완을 감시하는 건데…… 일에 몰두해 가지고…….’
몸을 쓰는 일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자책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디선가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이건?’
마기였다. 나는 서둘러 불쾌한 냄새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휴게실이 있는 방이었는데 문을 열려고 하자 누군가가 잠근 듯이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쇠 구멍은 없어.’
잠금장치가 달린 손잡이가 아니었다. 그럼 안에 있는 누군가가 잠근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신성력을 문고리로 흘려보냈다. 그제야 문고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지완 씨!”
나는 그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그가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감은 맞았다. 다만 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짓을!”
소파에 앉아 있는 도지완 위로 올라타다시피 앉아서는 그의 얼굴 위로 마기를 쏟아붓는 여자가 보였다.
내가 들이닥치자 여자는 마기를 쏟아붓는 것을 멈추고 깜짝 놀라더니 인상을 썼다. 가느다랗게 변한 눈으로 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거 같았지만 내가 소란을 피울 것처럼 굴자 도지완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곧바로 도지완에게 달려갔다.
“도지완 씨!”
“뭐, 할 일은 끝났으니 됐겠지.”
여자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지완을 살피던 내가 고개를 들어 여자를 올려다봤지만 그 자리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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