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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36화 (36/88)

36화

세 곳의 자료를 모두 읽어 본 그는 지호의 말이 모두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고, 따로 지호를 조종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완은 손가락을 까딱여 태블릿 위를 두드리면서 지호를 바라보았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이제는 지호를 밀어낼 이유도 없었다. 그는 지완의 적 누구와도 내통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계속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지금은 지호가 자신을 좋아해 그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엔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평생 가지 않았다. 일방적인 애정의 끝이 어떤지 지완은 잘 알았다. 그의 계모가 그랬으므로.

그의 부친에게 결혼은 그저 정략이었지만 계모에게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친의 마음을 잡으려 노력했다.

부친의 부정의 산물인 지완을 끌어안기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애정은 파멸을 일으켰고, 계모는 괴물이 되었다. 그녀보다 더 독하고 못된 지완은 만약 지호가 변심이라도 하게 되면 자신이 어떤 괴물이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맘에 안 들어…….’

지완은 지호와 엮이면 자꾸 망설이고 겁쟁이가 되어 버리는 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그의 인간적인 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완은 인간처럼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것이 싫었다. 모든 것이 제 컨트롤 하에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을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사람을 대할 땐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편했다. 내가 주는 만큼 받을 수 있는. 한쪽이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였다.

지완은 잠든 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에 왔을 땐 창백했던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혈색이 좋아 보였다.

‘정말 어렵군.’

늦게나마 품어 버린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지완은 한숨을 쉬었다.

* * *

‘음…….’

정신을 차려 보니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왜냐하면 전에도 본 적이 있었으니까.

‘도문그룹 병원이구나…….’

도지완 앞에서 쓰러졌으니 그가 당연히 이곳으로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질 때와 달리 몸 상태는 좋아진 것 같아 나는 천천히 몸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어라?’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력이 전보다 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얼떨떨했다.

‘이상하다? 한 일이라고는 마기를 몸에 가둬 정화한 거밖엔 없는데…….’

설마 싶었다. 정화된 마기가 신성력으로 변한 건가?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했다.

‘천계에서는 신성력이 몸 안에 가득 차 있었지……. 그걸로도 모자라 회복도 엄청 빨리 되었고.’

그러니까 신성력이 모자란 것을 인지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득 차 있는 물컵에 물을 더 붓는다고 물이 위로 쌓이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마기를 정화하면 항상 흩어지기에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던 거군. 신성력으로 변화하는 거였구나.’

어쨌든 나에게는 괜찮은 일이었다. 오히려 아쉬운 상태였던 신지호의 몸이 이번 일로 정상이 되었을 정도니까.

마기를 한두 번 더 정화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였다.

‘잠깐, 그럼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지 않나?’

흡수한 마기를 신성력으로 바꾸는 나와 반대로 마왕의 추종자는 신성력을 흡수해 마기로 바꾸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 등골이 쭈뼛 섰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그들에게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느리긴 해도 신성력은 회복이 되니까.’

나에게서 신성력을 조금씩 빼내는 식으로 한다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나는 끊임없이 신성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우연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가능할 법해 나는 긴장했다.

‘나에게 신성력이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내가 능력을 남발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슬슬 몸을 일으킬 때쯤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왔다.

씻고 온 건지 뭔지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놓고 셔츠 목 부근의 단추도 두어 개 푼 상태의 도지완이었다. 평소 단정한 모습만 보다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색달랐다.

내가 멍하니 앉아서 보고 있자 들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도지완의 눈이 커졌다.

“신지호?”

“어……. 길드장님.”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일렁이던 눈동자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왜? 어째서? 나는 순간 누가 도지완에게 액체 질소라도 뿌린 줄 알았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래?’

진짜 비위 맞춰 주기 힘든 상대였다. 싸늘하게 노려보던 도지완은 다가와 너스콜을 눌렀다. 콜을 받고 온 간호사에게 의사를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거절당하리란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확신대로 얼마 안 가 의사가 찾아왔다.

“저 사람 몸이 괜찮은지 한 번 더 검사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익숙하다는 듯이 검사할 것들을 도지완과 상의했다.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예? 저 괜찮은데요?”

신성력을 쓰는 만큼 나는 내 몸에 대해 훤히 알았다. 그렇지만 그걸 모르는 도지완은 내 말에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괜찮다는 증거 있어?”

“……예?”

그…… 증거란 것은…… 눈앞에 살아 있는 제가 증거인데요? 하지만 이렇게 말해 봤자 도지완은 헛소리한다는 듯 쳐다볼 테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결국 나는 다시 검사 뺑뺑이를 돌 수밖에 없었다.

병원 순회를 마치고 기분이 나빠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나와 달리 검사 결과를 받아 본 도지완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영양실조가 사라졌군.”

“…….”

“알겠어? 몸이 좋다는 증거는 바로 이런 거야. 그냥 좋다고 우기는 게 아니고.”

우이씨……. 내가 살아 있는 게 증거인데……. 열이 받았지만 따지면 도지완이 말한 대로 우기는 형태가 될 것 같아 나는 입술만 오리처럼 삐죽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정말 좋아진 게 맞긴 하네.’

신성력이 늘어난 탓인지 고질병처럼 붙어 있던 영양실조가 사라진 건 좋은 일이었다.

내 몸이 정상인 게 도지완을 만족시킨 것인지 그는 전처럼 내 퇴원을 막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퇴원한 건 좋았는데 왜인지 모르게 나는 도지완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뭐 앞집이니까 가는 방향이 같으니 타고 가도 이상하진 않지만, 우리는 내가 쓰러지기 전만 해도 이런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아…….’

쓰러진 게 생각나자 도지완에게 마기를 내뿜고 사라진 마왕의 추종자가 생각났다.

“저기요오…….”

“무슨 일인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나는 마왕의 추종자의 이름을 몰랐다. 그렇다고 도지완에게 마왕의 추종자는 어떻게 되었냐 물을 수도 없었다.

그 탓에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더니 도지완은 알아듣기 힘든 건지 인상을 팍 썼다.

“그 사람이 누군데?”

“음…… 그…… 길드장님께 이상한 짓 한 사람이요.”

나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 왜! 맞지 않는가. KTX를 탄 채로 무한 텀블링하면서 봤다 해도 마왕의 추종자가 도지완에게 한 일은 이상한 짓이 맞았다.

내 말을 들은 도지완은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 달리던 도로 중간에서 그러길래 깜짝 놀랐지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 차량들이 그의 비싼 차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일은 맞았기에 나는 펄쩍 뛰었다.

“미쳤어요!”

“이상한 짓 안 했어.”

그런데 동문서답이 튀어나왔다. 황당해서 쳐다보고 있자 도지완이 인상을 팍 썼다.

“걔랑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예에…… 뭐, 아무 짓도 안 하긴 했죠.”

당하기만 했지. 내가 생략한 말을 용케 알아들은 도지완의 인상이 점점 더 구겨졌다.

“다시 말하지만 걔랑은 아무것도 안 했어.”

“예.”

“너랑은 했지만.”

“예. ……네?”

예, 예. 성의 없이 대답해 주던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도지완을 바라보았다. 도지완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이 뻔뻔해진 낯짝으로 말했다.

“사실 그것도 당한 거나 다름없지. 나는 심신 미약 상태였으니까.”

“허…… 참 내……!”

나에게 강제로 덮쳐졌기에 자기는 피해자라는 듯이 말하는 것이 아주 기가 막혔다. 콧김을 뿜어 대는 나를 보며 도지완은 웃었다.

“아무튼 그 여자, 궁금해?”

성질을 내기 전 도지완이 나에게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지완이 다시 천천히 운전을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이름은 민채은. 영일실업의 셋째에게 동문이라고 소개를 받았는데.”

“…….”

“사실 진짜 민채은이란 사람은 유학 중이더군.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어. 아는 건 얼굴 생김새랑 성별뿐이고 이름이고 뭐고 다 가짜니.”

조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다. 그러나 아직 마왕 추종자를 추적할 끈이 끊기진 않았다. 그녀를 소개해 준 사람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면 소개해 준 사람은…….”

“그 사람은 죽었어.”

“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더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죽었다고? 아무래도 꼬리를 끊은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잡지 못한 꼬리를 잡나 싶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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