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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43화 (43/88)

43화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자 도지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작 어이가 없는 건 나였는데 말이다. 열받는다고 중얼거린 그가 일어나서 어딜 가려고 하자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화장실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그러면서 씩씩거리고는 혼자 바깥으로 나갔다. 경호 대상을 혼자 두면 안 되지만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들어 왔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비서 형이 보였다.

음. 비서 형이 보기에도 도지완이 참 한심했나 보다. 나도 그렇다는 뜻으로 해죽 웃어 보이자 천천히 고개를 저은 비서 형이 나에게 물었다.

“아무 생각 안 들었습니까?”

“네?”

“길드장님께서 집착 없는 사람이 이상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죠?”

“현재 길드장님께 집착하며 따라다니는 사람은 신지호 씨밖에 없습니다만…….”

비서 형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도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대놓고 앞에서 너 싫다고 들었으니 상처받지 않았냐는 물음일까? 하지만 도지완이 말하는 건 연애 대상이었다.

나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게 그리 기분 나쁜 일일까?

‘음…….’

잘 모르겠다. 기분 나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지만 비서 형이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기에 나는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길드장님과 연애까지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요.”

“…….”

“저는 지켜보는 걸로 만족할 수 있어요.”

그 와중에 도지완이 누구랑 연애하든 나랑은 관계없었다. 아니, 관계있었다! 마왕의 추종자랑은 사귀면 안 된다!

“길드장님은 좋은 사람과 만나서 연애했으면 좋겠어요.”

마왕의 추종자같이 사악한 사람은 안 된다!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비서 형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는 게 아닌가?

“지호 씨…….”

안타까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비서 형에게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이 쾅!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도지완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화가 난.

‘왜 저래…….’

화장실 갔다 와 놓고 왜 저렇게 화를 내나 싶어 어이없이 바라보자 나를 뾰족하게 노려본 도지완이 자기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기분이 정말 나빠 보여서 괜히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도지완이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집착하는 사람도 좋은 것 같아.”

“…….”

“알겠어?”

“넹.”

내 대답에 도지완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만족감이 차올랐다. 정말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점심을 먹은 후, 도지완은 헌터 협회로 향했다. 협회장과 의논할 게 있어서였다.

비서 형은 사무실을 지키고 나와 도지완만이 협회에 가게 되었다. 당연히 운전은 도지완이 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아쉬워서 중얼거리자 도지완이 입으로 씁, 소리를 냈다. 숫제 개나 고양이 취급이었다.

헌터 협회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도지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헌터 협회 건물은 신지호의 기억에는 있지만 나는 처음 온 곳이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이 건물로 들어갔던 신지호는 꿈이 처참하게 박살 난 상태로 건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높은 등급을 받아 빚을 갚을 길이 열리길 빌었지.’

그러나 결과는 D급. D급이라도 일반인보다는 많이 벌었지만 아쉽게도 신지호는 절박한 것치고는 용기가 없었다.

높은 능력치로 안전하게 큰돈을 벌고 싶었던 그에게 D급에 맞는 던전을 도는 건 많이 힘든 일이었으니까.

신지호의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한 덕분에 내가 이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만…….

‘그래도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손을 뻗었던 것처럼, 정호 형이 신지호에게도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는 보수가 높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어시스트 일을 하면서 천천히 빚을 갚아 갔다면, 언젠간…….

“무슨 생각해?”

갑자기 손이 붙잡혔다. 내 손을 붙잡은 도지완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서 언뜻 걱정이 비쳐 보인 것은 착각일까?

나는 웃으며 대충 둘러대었다.

“예전에…… 협회에 왔었을 때 생각이 나서요.”

“그래?”

“네. 그때 많이 실망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니 더 이상 도지완은 묻지 않았다. 내가 뭐 때문에 실망했는지 그도 대충 눈치챈 듯했다.

협회에 오는 모든 헌터 후보들 중 대다수가 자신에게 내려진 등급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D급이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일 텐데.”

도지완이 말대로 D급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아예 무능력자 판정을 받는 일반인도 많았으니까. 흔한 취급을 받지만 D급도 사실은 운이 좋은 편이라면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철이 없었죠, 뭐.”

* * *

지호의 말에 열이 받아 지호도 찔려 보란 식으로 말을 뱉고 나간 지완은 조금 후회했다.

‘바보 같아.’

애새끼도 아니고 지호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해서는 나이답게 굴지 못하는 것이 바보 같았다.

화장실에 들러 숨을 잠시 돌린 지완이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 문을 열기 전이었다.

문 사이로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지켜보는 걸로 만족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완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바로 들어가 앞서 했던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조금 둘러 말하는 것으로 바꿨지만 맹한 지호가 과연 알아들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안도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반절 정도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말이다.

헌터 협회장과의 미팅을 위해 지호와 협회로 간 지완은 지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보고 의아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지만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일이었다. 물론 본인에게는 꽤나 별거일지 모르겠지만 각성 검사를 하고 난 후 자신이 헌터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일반인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 행운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등급의 문제였다.

상위 등급으로 일컬어지는 B급도 왜 어중간하게 B급이냐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 그 아래 등급은 더욱 심할 터였다.

그 좌절감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도지완으로서는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본인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지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없이 걸어 어느덧 협회장실에 도착했다.

“어서 오시게. 도문 길드장.”

지완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있던 중년 남자가 인사를 했다.

현재 헌터 협회장인 장대영이었다. 헌터 협회장인 만큼 그도 S급은 아니더라도 B급의 헌터였기에 꽤나 건장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은?”

장대영은 지완을 맞이하다가 덩달아 들어오는 지호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배 비서 외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지 못했던 터라 동행인인지 헷갈리는 듯했다.

“제 수행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오, 반가워요.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협회장인 장대영이에요.”

“신지호입니다.”

장대영이 손을 내밀자 지호가 그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악수하면서 지호의 이능을 살핀 건지 장대영의 표정이 오묘했다.

“……음. 그래요. 반가워요. 앞으로도 자주 보면 좋겠구먼.”

그 도지완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흥미를 가졌던 아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걸 눈치챈 지완이 혹시나 지호가 상처받지 않을까 싶었지만 당사자인 지호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손님을 계속 세워 둘 순 없지. 얼른 앉게나.”

어색해진 분위기에 장대영은 좀 더 호탕한척하며 두 사람을 소파에 앉혔다. 비서에게 음료를 부탁하고 그가 마주 앉자 얼마 안 되어 그의 비서가 들어와 다과와 함께 각각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음료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마시는 지호와는 달리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네. 몸은 괜찮은가?”

“예. 옆에 있는 사람 덕분에 큰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장대영의 얼굴에 의문이 돌았다. 옆에 있는 맹한 녀석 말하는 게 맞냐는 얼굴이었다.

무례하기도 했지만 그의 기분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라 지완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음……. 무례했군. 미안하네.”

장대영이 사과를 했으나 지호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는 눈치였기에 장대영마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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