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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45화 (45/88)

45화

지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지완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호의 머릿속에서는 재검사를 했음에도 D등급 체력 강화가 뜨자 이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지완이 있었다.

〈나는 분명 치유력을 확인했다고!〉

그리고 그걸 본, 아직 들키지 않은 마왕의 추종자가 지호를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지완과 함께 지호를 납치해, 지완은 마왕으로 만들고 지호는 신성력 무한 공급기로 이용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러니까 계약 조건이 좋아지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길드장님 안전이 최우선 아니겠어요?”

제발 통해라, 하면서 지호는 속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잘 먹혔다.

“나를 위해서……?”

지호를 내려다보는 지완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눈치 보며 올려다보는 지호의 눈을 바라보면서 지완은 제 가슴속에서 솜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푹신하고 따뜻한 것이 자꾸 자라고 자라서 가슴속을 빠듯하게 채워 나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입술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질거려 헛기침하는 척하면서 손등으로 입술을 가린 그는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는 말했다.

“그래, 뭐…… 그런 것도 좋지.”

말하면서 지호를 힐끗 훔쳐보니 안도하는 얼굴로 보여 조금 이상하긴 했다. 지완은 정말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후회 안 하겠어?”

뭐 나중에 지호가 따로 해도 되겠지만 미리 해 놓는다면 대우가 달라질 건 자명했다. 그런데 지호는 정말로 개의치 않아 했다.

“괜찮아요.”

“…….”

“그리고 제 능력을 아는 건, 길드장님만으로 충분한걸요?”

“나?”

나만? 또 지완의 가슴이 삐걱거렸다. 설마 지호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 자신뿐이었던가? 하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네. 제 능력을 아는 사람은 길드장님뿐이니까요.”

자신이 능력을 쓴 사람도 오로지 그뿐이었다고 말하는 지호의 말에 지완은 떠올렸다. 함정 속에서 그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지호를 말이다.

‘온전한 내 것.’

그 순간 세상이 말 그대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카메라 필터를 씌운 듯이 반짝거리고 아름다워졌다. 그냥 삭막했던 협회 복도가 꽃길처럼 느껴졌다.

‘미쳤군…… 진짜 미쳤어.’

갑자기 말이 없어진 자신을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지호를 보자 필터는 더 강해졌다. 지호를 어떻게 하고 싶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그냥 제 방에 밀어 넣어 가둬 버리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밖으로 나가 지호가 제 것이라고 외치고 싶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는 마음에 지완은 미칠 것 같다가도 기이하게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지완은 지호를 마주 보기 힘들어 시선을 돌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계속 그 얼굴을 봤다가는 솟구치는 욕망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자신이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삐걱삐걱 지완이 걷고 있으니 그 옆으로 지호가 따라붙었다. 지호가 있는 방향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 * *

헌터 협회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도지완이 이상해졌다. 근데 어떻게 이상해졌는지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비서 형이랑 있을 때는 괜찮은데 말이지…….’

막…… 둘이 있을 때는 더운지 헐벗고 다녔다. 샤워하고 나올 때마다 이상하게 가운이 헐거웠다. 조금의 충격에 훌렁 벗겨질 것처럼 앞섬이 허술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도지완이 벗고 다니든 입고 다니든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벗고 다닌다고 마왕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이 집은 도지완의 소유였다.

‘자기 소유의 장소에서 뭘 하든 얹혀사는 내가 뭐라고 하긴 또 좀…….’

그래서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도지완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랬더니 이제는 다가오기까지 했다.

아이스티가 마시고 싶어서 싱크대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도지완의 몸이었다.

“나도 한 잔 줘.”

“히이익…….”

내 귓바퀴를 손끝으로 긁으면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도지완의 양팔이 나를 싱크대와 도지완의 몸 사이에 가둔 채였다.

“왜 그래? 추워?”

도지완이 고개를 숙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은근하게 입술이 귓바퀴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귀가 불타는 것 같으면서도 배 속이 저려 왔다.

왜인진 모르지만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며 땡땡땡땡 경종이 울렸다. 나는 아이스티가 든 잔을 손에 꼭 쥔 채로 몸을 휙 돌렸다.

샤워를 했는지 물기에 젖은 도지완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는 눈을 꼭 감고 빽 외쳤다.

“이거 드세요!”

“…….”

“저는…… 또 만들면 되니까! 먼저 드세요!”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던 도지완이 내 손에서 잔을 빼내 가자 나는 긴장이 풀렸다. 비틀거리며 싱크대를 붙잡은 나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도지완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아닌데.”

뭔진 모르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아까보다 목이 탄 나는 아이스티를 후딱 타서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걸로 모자라 한 잔을 더 타서는 거실로 걸어 나갔다.

거실 소파에는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가운을 걸친 도지완이 불퉁한 얼굴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하게 부끄러운 모습인 건 도지완인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나였다.

아이스티를 마시던 도지완이 갑자기 확 나를 돌아보았다.

“넌 나 보면 무슨 생각 안 들어?”

“……옷을 입으면 좋겠다?”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긴 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도지완이 원하던 대답은 아닌 듯했다. 도지완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도지완은 얘가 어려서 모르나, 하며 중얼거렸다. 어리다 하는 걸 보니 내 얘기 같은데 내가 뭘 모른다는 걸까?

“그럼 내가 옷을 입고 있다 쳐, 무슨 생각이 드는데?”

“……잘생겼다?”

구겨지는 도지완의 얼굴을 보자니 내가 여전히 오답을 고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게 그뿐인 걸 어쩌라는 말인가.

도지완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고 옷맵시도 좋았다. 목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가 전혀 답답하지 않고 단정하게 느껴졌고 몸의 비율 또한 좋아서 뭘 입혀 둬도 소화가 가능한 몸이었으니까.

신지호의 몸은 평균 정도 하는 키였지만 아쉽게도 마른 몸이라 옷의 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차라리 모델처럼 키라도 확 컸으면 모를까……. 내가 입으면 아버지 옷 빌려 입은 것처럼 거의 벙벙했다.

그런 데서 아쉬움을 느끼니까 도지완의 몸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거 같으니 그냥 말하지 말자.’

도지완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넌 나를 그냥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해?”

“예…….”

“그럼 내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말라고 하면 어쩔 거야?”

“그래도 따라다닐 건데요?”

당연한 걸 묻는 도지완에게 대답하자 도지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분노인지 짜증인지 모를 감정이 느껴지는 주먹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도지완이 다시 물었다.

“넌 정말 나한테 바라는 게 없어?”

묻는 목소리에 애원이 가득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그가 무릎을 꿇은 채 나에게 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분노에 가득 찬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그 주먹을 다시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생각난 게 있어 말을 바꿨다.

“예……. 아니, 있긴 한데…….”

그에 도지완의 눈이 커졌다.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리는 것을 보며 왜 저러나 싶은 찰나, 그가 나를 붙잡았다.

“뭔데?”

“별건 아닌데…….”

“말해 봐! 뭔데?”

자신이 뭐든 들어주겠다며 도지완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착하게 사세요.”

“……뭐?”

“선하게 사시라고요.”

마왕 같은 거 되지 말고. 그 순간 도지완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싸늘하게 변한 낯을 보자 몸을 부르르 떤 나는 에어컨이 갑자기 켜졌나 싶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공기는 싸늘해졌는데 에어컨은 꺼져 있는 상태였다.

“그게 다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도지완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다.

붙잡은 내 팔을 팩 하고 놓더니 기분 상했다는 티를 내면서 방으로 가는 도지완을 보자 아차 싶었다.

“길드장님!”

서둘러 일어난 내가 그를 붙잡았다. 내 손아귀 따위는 손쉽게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도지완은 잡힌 그대로 붙들려 서 있었다.

다시 한번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제가 착하게 살라고 했다고, 길드장님이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

“그냥 좀 더 선하게 사시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왜인지는 모르지만 도지완의 눈에서 기대감이 증발해 날아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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