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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46화 (46/88)

46화

한참을 나를 바라보던 도지완이 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야?”

“예…… 뭐…….”

그러더니 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서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는 도지완이었다.

* * *

도지완이 이상해졌다. 근데 어떻게 이상해졌는지 설명하기가 난감했다.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전에는 그렇게 헐벗고 다니더니 이제는 제대로 입고 다녔다. 야릇한 스킨십도…….

‘야릇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나는 고개를 붕붕 저어 단어를 날려 버렸다. 그냥 이상했던 스킨십도 이제는 없었다.

내외하다시피 같은 공간에 존재만 할 뿐 손끝 하나 스치는 법이 없었다.

‘그전처럼 돌아온 건데…….’

문제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렇다고 내쫓지는 않아서 계속 붙어 있을 수는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테스트를 하는 걸까? 한 일주일쯤 테스트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테스트 중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날 자르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꽝 찍어 놔야지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찬바람 쌩쌩 부는 도지완에게 다가갔다.

“저, 길드장님…….”

“왜?”

“저 언제까지 테스트를 봐야 할까요?”

내 질문에 도지완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저 표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인데……. 내가 물어본 게 기분이 나빠서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테스트를 끝내고 날 잘라 버리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

“하! 테스트에 떨어지면, 쫓아다니는 걸 그만두려고?”

갑자기 도지완이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눈이 부리부리해지더니 곧장 빔을 쏠 것처럼 안광이 번들번들 빛났다.

뭐에 분노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정정하려고 할 때였다.

“안됐네! 테스트는 평생이야!”

도지완이 이죽거렸다. 그 표정을 보니 조금 열이 받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이라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평생이라니까?”

“네……. 뭐, 테스트가 평생 계속된다니…… 혹시라도 떨어지면 그냥 따라다니려고 했으니 잘됐네요.”

그 말에 도지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틱틱 대는 것이 좀 줄었다.

“형. 저 요새 힘들어요.”

나는 이상하게 구는 도지완 때문에 힘들다고 비서 형에게 말했다. 푸념이 하고 싶어서였지 무슨 대안을 듣고 싶어서였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비서 형은 이상한 소리나 해 댔다.

“전 모릅니다. 원래 남의 연애에는 끼는 거 아니랬습니다.”

뭐라는지……. 내가 언제 연애 상담했나? 그리고 나는 연애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계 평화라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빴으니까.

“저 계속 테스트 본대요. 평생 테스트 보겠다고 했는데 만약 길드장님이 나중에 말 바꾸면 제가 고소해서 이길 수 있을까요?”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저번에 잘려 본 경험이 있어서 좀 걱정이 들어서요. 평생 테스트 본다고 했던 걸 녹취할 걸 그랬어요.”

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증거가 없는데 나중에 말 바꾸면 역시 승소하기 힘들 것 같았다. 녹음기를 켠 후에 다시 한번 대답을 유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지금 근무 중이란 걸 잊은 것 아닙니까?”

앞을 바라보자 언제 사무실로 돌아왔는지 싸늘한 얼굴을 한 도지완이 보였다. 이크, 하며 움츠러드는 내 옆에서 비서 형이 나를 배신했다.

“저는 계속해서 일했습니다. 일하는 저에게 찾아와 말을 건 것은 신지호 씨입니다.”

비서 형……! 너무해……! 내가 억울한 얼굴이 되어 쳐다봤지만 비서 형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자신의 무고함을 밝혔다.

도지완은 나와 비서 형을 반복해서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조심하십시오.”

뭐를? 뭘 조심하라는지도 모르는데 비서 형은 알겠다고 대답까지 했다. 뭘 조심해야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비서 형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도지완은 찬바람이 쌩쌩이라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도지완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다시 던전 공략에 들어갈 겁니다.”

그의 말에 나와 비서 형은 도지완을 돌아보았다.

“벌써 말입니까? 아직 암살자들의 꼬리도 잡지 못했는데요?”

“늙은이들이 욕심이 많아서 제가 가만히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군요.”

도지완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싸늘하게 웃는 모습이 그들의 작태를 비웃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저를 던전으로 밀어 넣어서 새로운 것을 얻어 내기 위해 회장님께 가서 알랑거렸나 봅니다.”

“……회장님께서.”

“그룹이 거의 다 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온전하게 가지고 싶으니 아직까지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요.”

덤덤하게 말을 마친 도지완의 얼굴은 언제 싸늘했냐는 듯이 평온하게 변해 있었다.

“암살자 때문에 던전 들어가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들로 충원 없이 갈 겁니다. 혹시라도 원래 멤버 중에서 배신을 하면 난감해지겠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행동하진 않겠죠.”

“저도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 말에 도지완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기다려.”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니 나도 더 우길 순 없었다. 시무룩해지는 나를 보며 도지완은 픽 웃었다.

“내가 던전 가 있는 사이 배 비서한테 운전 연수라도 받든가.”

그것참 좋은 생각이었다. 물론 비서 형의 얼굴은 귀찮다는 듯이 일그러졌지만 말이다.

* * *

도지완이 던전에 들어가고, 나는 도로 연수를 받을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다.

‘5일 뒤에 1차 던전 공략이 끝난다니까 그때 차 끌고 데리러 가야지.’

나는 도지완이 놓고 간 차에 앉아 비서 형을 기다렸다. 곧 약속한 시간이 되어 다가온 비서 형은 바로 조수석에 앉지 않고 뒤 창문에 무언가를 철썩하고 붙였다. 룸 미러로 바라본 그것은 ‘초 보’라고 크게 적혀 있는 스티커였다. 하얀 글자 외엔 투명하여 뒤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제 가면 됩니다.”

“밟을까요?”

“밟지 마십시오. 천천히…….”

비서 형은 속 쓰린 얼굴을 하고 입술을 깨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운전을 시작했다.

생각 외로 도로 연수는 사고 없이 잘 진행되었다.

도지완의 차가 스치기만 해도 옆자리의 사람을 팔아서 갚을 수 없는 고가의 차라 그런지, 혹은 비서 형이 뒤에 붙여 놓은 커다란 ‘초 보’ 스티커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도로에서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능숙하게 차를 몰 수 있었다. 차를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파주까지 나왔다.

자유로 근처 카페 테라스에 앉아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비서 형이 입을 열었다.

“남의 연애에 참견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냥 말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연애. 나는 부루퉁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제가 길드장님을 모신 지 6년쯤 되었습니다. 저보다 한참 어리신 분이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노력하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습니다.”

풍경을 바라보던 비서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알고 지낸 6년보다 지금 길드장님의 표정이 더 다채로운 건 알고 계신가요?”

“…….”

“저는 항상…… 예의가 깔린 표정만 봐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표정으로 호불호를 나타내는 것은 더욱 신기하고요.”

“…….”

“저는 신지호 씨의 등장이…… 길드장님께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비서 형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지완에 대해 말하는 비서 형의 얼굴엔 미약한 애정이 깔려 있었다. 연인을 보는 듯한 애정이 아니라, 알고 지낸 사람을 염려하는 듯한 애정이 말이다.

비서 형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감정은 나에게 여전히 어렵고 벅찬 일이었다.

‘연애…….’

나는 도지완과의 연애를 원하는가? ……알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오’라고 단번에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다만 간절히 원하는 바람이 한 가지 있다면, 도지완이…… 마왕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마왕이 되지 않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예전 같았으면 세상을 위해서 그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겠지만, 지금은 순번이 조금 바뀌었다.

도지완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좋은 사람이니까. 불행을 맛보았던 어린 시절 대신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서 형의 옆에서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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