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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48화 (48/88)

48화

허겁지겁 뛰어가 눈치를 살살 보니 도지완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순간 서운해서 괜히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한 주먹 내밀고는 꿍얼꿍얼 대답했다.

“마중 나왔죠!”

그 말에 도지완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를 한 번 돌아본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았다.

대체 뭘 찾아 저러는가 싶어 다가가자 나에게 물었다.

“배 비서는?”

“비서 형이요?”

“같이 안 온 거야? 그럼 어떻게 온 건데?”

그 말에 내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들자 그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네가…… 운전했다고?”

“네!”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다시 한번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비서 형을 찾는 도지완을 보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다가는 저녁이 다 되도록 비서 형만 찾을 지경이라 나는 그의 팔뚝을 붙잡고는 차로 향했다. 반항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도지완은 생각보다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 왔다.

“진짜, 너 혼자 온 거야?”

조수석에 앉으면서도 도지완은 끝까지 내가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인상을 쓴 내가 시동을 걸자마자 차 문 위에 달린 보조 손잡이를 자연스럽게 쥐는 꼴이 나를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비서 형. 당신이 틀렸어요.’

계속 나에게 연애니 어쩌니 해서 혹시 정말 도지완이 나를 그런 의미로 생각하는 걸까? 하고 잠깐 의심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니었나 보다.

‘도지완이 나를 좋아했으면 마중 온 나를 봤을 때 설레 하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도지완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혼자 온 게 아닌지 의심하고 나를 믿지 못하고 내 운전실력을 두려워했다.

나는 삐졌다. 아마 옆에서 보면 내 입이 두 주먹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입을 삐주욱 내밀고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10분쯤 달리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도지완은 감탄했지만 여전히 보조 손잡이를 움켜쥔 채였다.

“그럼 그동안 도로 연수를 한 건가?”

“그러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냥 농담이었지…….”

나는 어이없어서 되물었건만 어이없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의 농담 한마디에 비서 형은 바쁜 시간 쪼개 가면서 꼬박꼬박 도로 연수를 해 줬는데 말이다.

나와 비서 형은 실없는 농담에 놀아난 건가 싶어 황당할 따름이었다.

“참 나…… 뭐, 어쨌든 농담 한번 때문에 비서 형이랑 재미있게 돌아다녔으니 뭐 됐어요.”

“재미있게 돌아다녔다고?”

“예.”

도로 연수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파주까지 가서 임진강을 보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성북동 야경을 보면서 밥도 먹었으니까. 진짜 알차게 돌아다녔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 도지완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니 또다시 그 예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잘 놀았나 보네.”

“…….”

“내가 열심히 던전 도는 동안 두 사람은 아아주 재미있으셨겠어?”

또 왜 저래……. 자기 놓고 우리끼리만 놀아서 삐졌나? 그 말이 목 끝까지 치달았지만 나는 꾹 눌러 삼켰다.

“……또 가면 되죠. 이번에는 길드장님이랑 비서 형이랑 저랑 셋이요.”

“하, 길드장…….”

도지완의 목소리가 또 삐딱해졌다. 아씨, 이 말을 원하는 게 아니었나?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도지완이 번들번들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배 비서는 형인데, 나는 길드장?”

“…….”

“내 비서는 형이고, 나는 길드장이라 이 말이지?”

“아…… 또 왜 이래요.”

나는 울상을 지었다. 저렇게 둘러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하란 말이야!

내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니까 도지완이 입을 딱 다물더니 한참 뒤에 중얼거리듯 힌트를 주었다.

“……호칭이 마음에 안 들어.”

고작 호칭 때문에 사람을 피 말리게 하고 있었다.

‘진짜 한 번만 쥐어박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나는 을이었고, D급이었다. 갑인 데다 S급인 도지완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은 삼켜 버리고 그저 그가 마음에 들어 할 호칭이나 떠올렸다.

“그럼…….”

“…….”

“사장님이라고 부를까요?”

무난한 게 그것이었다. 그런데 도지완의 얼굴이 팍 찌그러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건 오답이었다 보다.

“……선생님?”

“내가 신지호 씨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두 번째로 무난한 호칭을 꺼냈더니 이번엔 진짜 토라졌는지 다시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눈물 날 거 같았다.

마음 같아선 ‘야, 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날 잘라 버릴 것 같아서 입에 올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완 씨.”

세 번째로 무난한 것을 꺼냈더니 도지완이 한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그게 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이 호칭은 아무래도 좀 그랬다.

“……이건 너무 격의 없죠? 죄송해요.”

“…….”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러면서 눈치를 봤는데 도지완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제 턱을 문질렀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도지완의 몸 위로 삐죽삐죽 날 서 있었던 가시가 한풀 꺾여 있었다.

“……그것도 좋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예? 뭐가요?”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혹시 남들이 들으면 저 직원은 왜 저렇게 되바라져서 사장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고 생각할까 봐 그러는 걸까?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말고 좋은 거 있잖아.”

“좋은 거요?”

그게 대체 뭐지? 호칭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 하나가 떠올랐다.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감이 그게 맞다 하였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호칭을 꺼내 보았다.

“형님……이요?”

뱉어 놓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조폭도 아니고……. 역시 이건 아닌가 싶어서 취소하려고 할 때였다.

“그거 좋네.”

도지완이 말했다. 내가 진심이냐는 듯이 바라보니까 변명하듯 그가 덧붙였다.

“……내 비서가 형이니까 나는 형님쯤이 맞겠지.”

그런데 비서 형이 도지완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꼬이고 꼬여 개족보가 되어 가는 상황에 나는 눈을 잘게 떨었다.

“뭐야? 그 눈은? 싫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내 길드원도 아닌 네가 나를 길드장으로 부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게 무슨 논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번에 열렸던 파티에서 보니 다들 도지완을 길드장이라고 부르던데, 그럼 그 사람들이 다 도문 길드원이라는 소린가? 어이가 없어서 흘겨봤지만 도지완은 많이 뻔뻔했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 알았어?”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

그때였다. 비어 있던 길 위에 누군가가 떡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안전 속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달리고 있던 터라 나는 상대방을 치지 않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다.

“뭐야, 저 사람은?”

브레이크 반동에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몸을 세운 도지완이 인상을 쓰며 앞을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은빛 갑옷으로 온몸을 가린 채였다. 그 모습은 마치 아이어맨의 슈트에서 색만 바꾼 것 같았는데, 결코 좋은 의미로 저기 서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왕의 추종자인가?’

근데 뭔가 이상했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방을 본 도지완이 무기인 검을 쥐며 나가려는 것을 본 나는 그를 막았다.

“미친 사람 같은데 나가지 마요. 그냥 도망가죠?”

도지완은 아이언맨을 노려보다가 나를 힐끗 보고선 내키지 않지만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크게 꺾어 멀리 그를 비켜 갈 생각을 할 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아이언맨이 갑자기 쑥 하고 눈앞에 나타나서는 주먹을 꽝! 내리쳐 차 보닛을 찌그러트렸다.

보통 미친놈은 아닌지 그가 주먹을 내지른 만큼 보닛이 푹 들어갔다. 엔진까지 쑤셔 박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욕설을 뱉은 도지완이 순식간에 위로 솟구쳤다. 차 지붕이 도지완의 주먹질에 날아가선 단박에 오픈카가 되었다. 그 황당한 모습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차 보닛을 주먹으로 친 놈이나 지붕을 주먹으로 쳐 날려 버린 놈이나…….’

둘 다 막상막하로 미친놈은 확실했다. 보닛 위로 연기가 살짝 올라오는 것 같아 나는 혹시 몰라 자동차 시동을 다급하게 끄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사이 도지완은 아이언맨에게 검을 내질렀다.

온몸을 가린 갑옷이 무거울 법도 한데 아이언맨은 도지완의 검을 손쉽게 피해서는 훌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제 등 뒤에서 봉 같은 것을 꺼냈는데, 그가 봉을 살짝 비틀자 숨겨져 있던 날이 튀어나오며 창으로 변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 아이언맨을 보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전생에서 봤던 자인가?’

저런 특이한 모습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딱 하고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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