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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1화 (51/88)

51화

“나를 돕기 위해 그랬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같은 행동은 하지 마.”

처음에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러나 낮에 내가 아이언맨을 구하기 위해 그를 돕는 척하면서 막아섰던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곧 깨달았다.

머쓱해진 내가 이마를 긁적이자 도지완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알겠어? 어차피 내가 위험한 상황이면 너는 크게 도움 안 돼.”

“…….”

“그러니 그냥 너라도 안전하게 있어.”

냉정한 말이었지만 나에 대한 염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확실히 둘의 기세를 받고 내상을 입을 정도의 나였으니 도지완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그래도 그걸 어떻게 두고 봐요.”

나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감정이 없는 천사였을 때도 누군가가 위험하면 도와주었다. 하물며 감정이란 게 생긴 인간이 되었는데, 어떻게 안면을 튼 걸로 모자라 이제는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의 위험을 무시한단 말인가?

비록 도지완이 마왕의 싹이었지만 아직까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를 미워하고 외면할 만큼 나는 냉정하질 못했다.

“다른 말은 다 들어도 그건 못 들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도지완이 또 성낼까 싶어 냉큼 방으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 쏙 들어간 것 때문에 나를 보며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지완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다시 시간이 흘러 지완이 2차 던전 공략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준비하는 그의 곁에서 배 비서가 걱정되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좀 더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암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이언맨의 습격 사건까지 일어난 터라 배 비서의 걱정은 타당했다. 하지만 지완은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안 될 것 같군요.”

지완에게 연속으로 일어난 나쁜 일이 자칫 잘못하면 큰 추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가 떳떳해도 거듭해 나쁜 사건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의심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렇게 집요하게 목숨을 노릴까, 하고 말이다. 그 의심이 모이고 모여 지완의 문제점으로 부각된다면 도문그룹에 큰 타격이 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좋아하겠지.’

지완을 이 자리에서 떨어트릴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작자들이었으니까.

알음알음 돌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을 겨우 잠재웠는데, 또 이런 일로 입에 오르내릴 순 없었다. 그래서 지완은 아이언맨의 일이 보도되는 걸 막았다.

다행히 습격자를 본 것이 그와 지호뿐이었고, 그 현장을 본 것도 전부 길드원들뿐이니 보도를 막기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니 순순히 물러났다고 하지만, 또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길드장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심이…….”

배 비서는 좋은 사람이었다. 지완이 이 주제를 불편해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완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주제넘는다고 생각했지만 지완은 참고 넘어갔다.

“어렵군요……. 일단 빠르게 공략을 마치는 방향으로 하죠.”

그의 적이 부리는 수족 하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적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결국 배 비서는 지완을 설득하지 못했다.

혼자 보낼 순 없다면서 배 비서와 지호가 지완을 던전까지 배웅했다. 가는 내내 배 비서가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4일 뒤에 뵙겠습니다.”

“저는…… 따라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덤덤한 지완의 말에 지호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지완은 고개를 저었다. 던전 안은 바깥보다 안전했으니까.

지호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결국 배 비서와 함께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 *

지완이 던전에 간 기간 동안 그냥 놀아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지호는 심심했기에 길드에 출근했다. 배 비서의 일을 도와주면서 시간을 보내던 지호는 불편한 얼굴로 스트레칭을 하는 배 비서를 보았다.

“비서 형, 몸이 안 좋아요?”

“아……. 잠을 설쳤더니 피곤하네요.”

그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지호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신성력을 써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미약한 피로 회복은 신성력이 그리 많이 들지도 않았으니까.

“제가 안마 한번 해 드릴께요.”

“안마요? 괜찮습니다.”

“에이, 한번 받아 봐요!”

사양하는 배 비서의 뒤에 붙은 지호가 안마를 하는 척하며 신성력을 약간 불어 넣어 주었다.

미심쩍어하던 배 비서였지만 지호가 신성력을 불어 넣자 몸에 도는 활력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호에게는 체내에 불어 넣은 신성력이 온몸을 순환하며 치유를 해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

“어때요?”

“정말 대단한 안마 실력입니다. 처음에는 아무 느낌도 안 나서 안마가 맞나 싶었는데 피로가 확 풀리네요?”

“하하…….”

안마하는 척이었으니 아무 느낌 안 나는 게 당연했다. 조금 찔린 지호가 어색하게 웃으니 어느새 책상을 정리한 배 비서가 지호에게 말했다.

“신지호 씨는 이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말에 지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5시라 퇴근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호가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배 비서가 말했다.

“도문 화학 쪽에 서류 전달할 것이 있어 가 봐야 하는데 저도 서류만 건네주고 퇴근할 거거든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무실이 비게 되고 지호가 더는 도와줄 일이 없으니 그냥 퇴근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다. 일찍 들어가 봤자 할 일도 없었으니까.

배 비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퇴근하고 저녁이라도 함께하죠.”

“좋아요!”

아는 게 많은 배 비서는 맛집도 잘 알고 있어 지호는 그와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즐거웠다. 운전에 익숙해진 지호가 운전대를 잡겠다 하자 비서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비게이션에 도문 화학의 주소를 검색하자 길드에서 40분 떨어진 곳으로 위치가 떴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대로 주행한 둘은 예상 도착 시간쯤 도문 화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전해 주고 나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를 보고 배 비서는 바로 떠났다. 홀로 남은 지호가 핸들에 손을 올리고 까딱까딱하며 배 비서를 기다린 지 10분쯤 되었을까.

건물 정문으로 나오는 배 비서가 보였다. 그런데 곧바로 지호를 향해 다가오던 배 비서의 발걸음을 누군가가 잡아채었다.

“배동호!”

이름을 불린 배 비서가 소리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능글능글 웃고 있는 상대가 보였다.

“이야, 오랜만이야!”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친한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선배.”

동문인 걸 제외하면 교류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와서는 아는 척을 하자 배 비서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에 도문 길드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아직도 다니는 건가?”

“아…… 네.”

이게 목적인가? 배 비서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지완의 비서가 된 이후 그에게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지완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남는 자리 있냐는 청탁 같은 거였다.

이 사람도 그런 뜻으로 다가왔겠구나 싶었더니 흥미가 식은 배 비서는 대충 상대를 하고 헤어지고자 했다.

“혹시 신규 충원 예정은 없어? 후배 중에 도문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애가 있더라고.”

“아쉽게도…… 당분간 신규 충원은 없습니다.”

지완이 위협을 받는데 사람을 새로 뽑을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상대를 들일 순 없으니 말이다.

거기다 배 비서 본인에게는 인사권이 전혀 없었기에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그래도 괜한 말을 듣는 건 성미에 안 맞아 인사권에 대한 건 그냥 속으로 삼켰다.

“그래?”

배 비서의 말에 상대는 아쉬워했다. 그러더니 다가와서는 배 비서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자리가 비게 되면 채워야지.”

“……그게 무슨?”

씩 웃음을 지은 상대는 붙잡은 배 비서의 손으로 마기를 불어 넣었다. 마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것보다는 효율이 떨어졌지만,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마기를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있잖아. 요새 힘들지는 않아?」

“…….”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상대는 계속 마기를 불어 넣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배 비서가 자신의 말을 그의 생각이라고 여기도록 세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몇 번이나 해 왔고 당연히 실패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배 비서가 곧 ‘네, 생각해 보니 조금 쉬고 싶어졌습니다’ 하며 곧 퇴사하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배 비서의 목소리에 그의 짙은 미소가 깨어져 나갔다.

“무슨 소리십니까?”

“……엥?”

“기껏 들어와서 잘 일하고 있는데 쉬기는 왜 쉽니까?”

어라? 이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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