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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4화 (54/88)

54화

* * *

배 비서를 세뇌해 그가 퇴사하게 하려고 했던 남자는 배 비서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내가 세뇌할 때 순순히 세뇌당할 것이지.’

그랬으면 안전하게 퇴사해서 퇴직금도 받고 동남아 어디 물 좋은 곳에 가서 쉬다가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세뇌에 걸리지 않는 바람에 동남아는커녕 저승으로 가게 생겼다.

“그런데 왜…… 세뇌가 통하지 않은 걸까?”

그는 교단에서 꽤나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은총의 힘도 커 중요 인물의 세뇌를 담당하게 된 지도 10년이 지났으니, 일반인인 배 비서가 그의 세뇌를 회피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배동호의 정신력이 생각보다 높았던 걸까?’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어쨌든 배 비서의 자리는 교단에 꼭 필요하니까 스스로 넘겨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받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배 비서가 D급의 헌터와 동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패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야 배 비서를 죽이기 위해 보낸 교인들은 헌터 등급으로 따지면 C급 두 명과 B급 하나였으니까.

B급이면 그와 같은 등급이었다. 정신력이 높아 세뇌를 무시할 수 있을지언정, 물리적인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성공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성공했다는 연락이 오지 않자 의아해졌다.

기다리다 결국 부하를 보내 알아본 결과 배 비서가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임무를 맡았던 교인들이 연락이 없다는 것은 임무 실패를 넘어 그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최소 잡혀서 감금, 혹은 전부 죽었거나…….’

아마 후자일 듯했다. 감금되었다면 누가 잡았는지, 어디에 감금되었는지 정도는 귀에 들어왔을 테니까 말이다.

남자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고민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게…….”

남자가 부하에게 물었다. 부하는 머뭇거리다가 자기가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경찰 조사 결과를 들었는데, 그 D급이 그분께서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자신에게 덤비는 교인들을 죽였다고…….”

“교인들이?”

그 말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지완이 아직 마왕으로서 각성하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그분은 마왕의 싹이었다.

아직 싹일지언정 신의 존체를 교인들이 공격했을 리가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계속되는 한편, 그는 윗사람에게 임무의 실패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제1 사도께서 나를 무능하다 여기면 어쩌지?’

세뇌와 목표물의 제거, 두 번이나 연속으로 임무를 실패했기에 그는 더 두려워했다. 하지만 두렵다고 회피할 순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제 위에 있는 상위 사제에게 향했다.

실장실이라고 적힌 사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노크하자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그에 태블릿을 매만지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곧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태블릿을 책상에 올려 둔 여자는 양손을 깍지 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패?”

“…….”

“이상하네, 왜 실패했을까?”

조롱하거나 압박하며 화내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의문이 담긴 목소리였다. 깍지 낀 손을 까딱까딱하며 침묵하던 여자는 작게 신음했다.

“이상하죠? 때가 와서 그분의 힘을 깨우려고 했더니 계속 실패라니…….”

“…….”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거죠?”

여자의 말에 남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쉽게 잡히리라 여겼던 D급 헌터가 힘을 내었고, 그가 발목을 잡은 사이 지완이 나타나 목표였던 배 비서를 구했다고 말이다.

“……현재 배동호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흠…….”

여자의 눈썹이 구겨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얼마나 방만한 것들에게 일을 맡겼으면 그만한 은총을 받고도 D급에게 농락을 당한 건가 싶어 기분이 상했다.

여자의 기분이 상하면 상할수록 남자는 잔뜩 긴장한 채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9사도가 그분을 방문했을 때 싹을 틔웠어야 했어요.”

“예…….”

“그러나 실패했죠. 이제는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분께서 힘을 깨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사람을 곁에 둬야 했는데…….”

여자의 눈이 남자를 향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남자는 더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그걸로 분노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으……으아악!”

바닥에서 뾰족한 송곳 같은 것이 솟아올라 꿇어앉은 남자의 다리를 꿰뚫었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한번에 관통된 남자가 아픔에 손을 벌벌 떨었지만 피 한 방울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해하기보다는 고통을 주어 고문하기 위한 스킬이었다. 아픔에 벌벌 떠는 남자에게 여자는 웃어 보이며 검지를 들어 보였다.

“쉬…….”

조용히 하라는 그 말에 남자는 흐느낌조차 삼켜 버렸다. 조용히 하라고 했으니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여자를 애타게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분을 깨우는 것은 우리의 비원이란 걸 잊지 말아요.”

“예…… 예에…….”

“어떻게든 우리 사람을 그분의 곁에 붙여야 해요.”

“…….”

“두 번이나 저를 실망시켰는데 한 번 더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 믿을게요.”

여자가 빙긋 웃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리를 꿰뚫었던 송곳은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신비하게도 꿰뚫린 다리를 감싸고 있는 바지는 뚫린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고통스러운지 다리를 절뚝이며 여자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사무실 안에서 여자는 생각에 빠져 손톱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톡, 톡,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던 손톱이 이내 멈췄다.

“……D급 헌터라.”

세뇌 실패 때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이 실패할 때마다 그 D급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여자는 마음에 걸렸다.

민채은으로 변장한 제9 사도가 지완에게 마기를 불어 넣었을 때도 D급의 난입 때문에 전부 불어 넣지 못했고, 이번에 배 비서를 도운 것도 그 D급이었으니까.

‘……고작 D급인데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걸까?’

고작이라는 단어가 붙을 정도로 D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에 꼽았다. 더군다나 이능력 따위로 마기를 막아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신성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제 생각에 어이가 없어 웃었다. 신성력을 가진 천사들은 천계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아니, 못 하는 것에 가까웠다.

천사들은 최전선에 서서 마왕의 마기로 생성된 마수들을 처리하는 데에 급급했다. 세상에 풀리는 던전은 그들이 미처 다 정화하지 못하고 놓치는 찌꺼기였다.

그렇게 치면 인간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마인과 마왕의 추종자들에게 유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큰 단점이 있었다.

현재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될 마왕이란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전대 마왕은 신과의 싸움에서 져 버렸다. 대신 세계에 마기를 퍼트리고 미래에 피어날 제 씨앗을 심어 두었다. 씨앗은 혈통을 타고 넘어가고 넘어가다 도지완이라는 좋은 토양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왕의 추종자들은 어찌 보면 정원사나 다름없었다. 도지완의 안에서 마왕의 싹이 아름답게 필 수 있도록 아끼고, 돌보는 존재.

여자, 제1 사도는 지호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녀의 상식상 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던 거지.’

작은 방해가 있더라도 약속의 시간이 되었으니 모든 건 그들의 바람대로 될 것이다.

“나의 신이시어…….”

그가 완벽한 악으로 자랄 수 있도록. 제1 사도는 태블릿 위에 떠 있는 도지완의 사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또 여기인가…….’

도문그룹 계열의 병원이었다. 이 천장도 세 번째 보게 되니 질렸다.

“일어났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자 까슬까슬한 얼굴을 한 도지완이 보였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떠오른 사람이 있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형……!”

으윽! 도지완을 부르며 일어나려던 나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에 인상을 썼다. 일어서려다가 다시 스르르 누우면서 끙끙 앓는 나를 보며 도지완이 한숨을 쉬었다.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졌어.”

“으으…….”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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