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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6화 (56/88)

56화

“몸이 이래서 일도 못 하는데 힘들지 말라고 챙겨 주시고…… 정말 길드장님께 죄송하네요.”

나는 비서 형의 말에 울컥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 앞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모든 걸 알고 있는 나로선 도지완이 챙겨 준 편의에 고마워하기보다는 더욱더 뜯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죽을 뻔했는데 이걸로 만족하면 안 되지! 위로금도 받고 유급 휴가도 받아 내라고요!”

“하하…….”

내 말이 농담인 줄 아는지 비서 형은 웃다가 곧 웃음을 그쳤다.

“하지만 정말, 다 나을 때까진 제가 일을 못 할 테니 제 대타가 필요할 텐데요…….”

그러면서 나를 물끄러미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나에게 맡기기 못 미덥다는 것 같았다.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봐!”

“하하…… 우리 TV나 볼까요?”

난처하게 웃으며 말을 돌리기에 이번만 넘어가 주기로 하고 아는 그가 원하는 대로 TV를 틀었다. 낮 시간이라 재미있는 건 안 하기에 뉴스 채널이나 틀어 두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도 뉴스에서는 우리가 겪었던 사건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이야, 저기서 살아났다니. 정말 살면서 쓸 운을 다 끌어다 쓴 거 같아요.”

습격이 일어났던 현장 사진들을 보면서 비서 형이 말했다. 두려워하거나 당시의 상황이 플래시백되어 괴로워하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알고 보면 비서 형도 참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트라우마가 생겼으면 어쩌나 했는데 쫓길 때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는지 흥분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고, 막상 차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을 때는 핸들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내상을 입어 죽어 갈 때는 당연히 정신이 없었으니 딱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뭐…… 어쨌든 다행인가.’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간이 큰 게 훨씬 나았다. 그렇게 잡담을 하며 뉴스를 계속 보는데 갑자기 속보라는 단어가 뜨더니 화면 속 사람들이 어수선해졌다.

뭐 때문에 그러나 싶어 우리는 대화도 멈추고 TV를 들여다보았다. 곧 아나운서가 외쳤다.

[오늘 전 세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유일한 SS급의 헌터가 한국에서 나타났습니다.]

“뭐?”

“SS급?”

뉴스를 보던 비서 형과 나는 깜짝 놀랐다. 아나운서가 말한 것처럼 SS급은 전 세계에서 처음 등장해서였다.

뉴스 데스크를 비추던 화면이 곧 바뀌어선 어디선가 본 건물 입구를 찍고 있었다.

“……헌터 협회 건물인데, 저긴.”

비서 형이 중얼거렸다. SS급이 나타났다는 게 진짜인 건가? 그때 건물 입구 유리창에 흐릿하게 인영이 비쳤다.

흐릿했던 인영은 자동문이 사악 열리면서 좀 더 또렷하게 변했다.

‘어?’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이…… 사람이 SS급이라고?’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SS급이라는 등급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처음 들어봤다. 천사였던 내가 인간계에 관심이 없어 이런 소식에 둔감해서 잘 모르는 탓도 있었지만…… 아무튼 저 사람이 SS급이라고 하니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연호진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지호로서가 아닌 천사인 내가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SS급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도 오래된 기억이고 그간 많은 일이 있다 보니 헷갈렸다.

SS급의 옆에 전에 만났던 헌터 협회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SS급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협회장님! 저분이 정말로 전 세계 최초의 SS급인가요?]

[이름은 어떻게 되고 어디 소속인가요?]

기자들이 마이크를 내밀면서 질문들을 마구 뱉어 대었다. 그 모습이 화면 너머로 보는 나도 질릴 정도였는데 SS급의 사람은 표정이 아주 덤덤했다.

전생의 인연 덕분에 그에 대한 호감이 높았던 나는 그 모습마저 좋아 보였다.

[자, 진정하세요. 하나하나 답변해 드릴 테니까.]

헌터 협회장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기자들을 달랬다.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 최초로 SS급이 나온 것이 맞습니다. 여기 있는 연호진 씨가 그 주인공이고요.]

헌터 협회장이 손바닥을 펼쳐 상대를 가리키자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눈이 부실 법도 한데 연호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등급의 산정은 어떻게 하시는지 대충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헌터 등급의 산정은 가지고 있는 이능의 총량에 따라 결정된다.

정확한 수치는 나도 알지 못하지만 예를 들자면, E급이 100의 이능을 가지고 있다면 D급은 200의 이능을 가진다. 그리고 C급은 400의 이능을 가졌다.

급이 올라갈수록 전 단계가 가진 이능의 두 배가 되는 것이었다.

[연호진 씨의 이능 총량은 S급들의 이능 총량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러니 SS급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다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기자들이 아우성치며 질문을 건넬 때마다 당사자인 연호진은 가만히 있었고 헌터 협회장만 떠들어 대었다.

[연호진 씨! SS급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 그런데 혹시 어디에 속하실 건가요?]

[SS급이면 몸값이 상당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외국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 중이십니까?]

사람들은 궁금한 듯했다. 그가 어디에 속할지, 한국에 있을지, 외국으로 갈지. 한국에 남는다면 어느 길드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말이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연호진이었지만 유일하게 그 질문들에는 반응했다.

[저는…….]

그가 입을 열자 시장통 같던 소란이 잦아들었다. 그때만큼은 플래시도 터지지 않을 정도였다.

[헌터 협회 소속 헌터가 될 생각입니다.]

그의 말에 소란이 번졌다. 헌터 협회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질문에 대답을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연호진이 꾸벅 인사하며 다시 헌터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몸이 달은 기자들이 연호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헌터 협회장이 인터뷰는 여기서 끝이라고 말하며 연호진의 뒤를 따르자 그들은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 * *

연호진의 등장으로 국내외에서 난리가 났다. 그의 충격적인 등장 덕분에 이제는 TV와 인터넷에서 도지완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음모론자들이 정치인들의 잘못을 언론으로 덮는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군.’

도지완의 사건은 이미 쉰 떡밥이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자극적인 탓에 계속 언급이 되었는데 새로운 대형 떡밥, 연호진이 등장하자 모두가 뒤도 안 돌아보고 연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연호진은 대한민국의 워너비가 되었다. 모두가 연호진의 모든 것을 궁금해했고 연호진을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그전에는 도지완의 자리였으니 도지완은 한순간에 왕좌에서 밀려나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병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퇴근하고 내 병실로 찾아오는 도지완에게 물었다.

“구 오빠가 된 건 어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도지완의 얼굴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듯 찌푸려졌다. 나는 낮에 들었던 사람들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원래 새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면 전에 좋아했던 아이돌은 구 오빠가 되는 거래요.”

그러니까 연호진에게 밀린 상황을 살짝 놀리는 것이었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도지완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그건? 사람들이 구 오빠든 현 남친이든 멋대로 떠들어도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흐음.”

“애초에 사람들 멋대로 나를 좋아하다 멋대로 버리는 게 처음도 아니고.”

나는 그 말에 아차 싶었다. 도지완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더 심했었다. 지금처럼 떠오르는 뉴비에게 자리를 빼앗긴 게 아니고 우상처럼 떠받들어지다 갑자기 끌어내려져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았으니까.

그때를 덤덤하게 말하는 도지완에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를 보니까, 도지완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니까 별거 아니란 소리야.”

‘신경 쓰지 마’를 그렇게 둘러 말했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심심해 TV를 틀어 놓고 있었기에 우리는 잠시 멍하니 TV를 들여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연예인 누구와 누구가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느니 마느니 하던 연예 채널이었는데, 갑자기 연예인도 아닌 사람이 떡하니 나타났다.

‘엥? 왜 연호진이…?’

헌터도 연예인인가? 어찌 따지면 연예인보다 더 핫한 연반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진의 최근 사진과 함께 연예 채널의 리포터가 멋들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요새 가장 핫한 남자죠. 세계 유일 SS급 헌터 연호진 씨! 인정할 수 없다던 외국에서도 수치를 확인하고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었죠.]

[수치를 확인하자마자 미국에서 바로 조건을 제시하며 영입하려고 했다는데, 자신은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거절을 했다고.]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그런 연호진을 전. 격. 해. 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서울…….]

나와 도지완은 멍하니 리포터의 말을 들으며 연호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듣다가 도지완을 힐끗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도지완이 TV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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